손에 들고도 찾는 날들
요즘 나는 기억력이 내보란 듯이 도망치고 있다.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조차 잃어버린 줄 알고 찾고, 문을 열고 서 있다가 ‘내가 왜 열었지?’ 하고 멍하니 서 있는 순간이 하루에 몇 번씩 찾아온다. 날짜 개념은 구름처럼 흩어지고, 해야 할 일은 작은 구슬처럼 굴러다니다가 이내 사라진다. 그런데 웃긴 건, 이렇게 깜빡거리는데도 핸드폰은 끝내 잃어버리질 않는다는 거다. 그 사실이 요즘 나에게 은근한 자부심이 된다. ‘기억력은 새어나가도, 생존 감각은 여전히 살아 있네?’ 하는 그 묘한 뿌듯함.
사실 기억력은 늘 당연하게 따라오는 능력이라 생각했었다. 나라는 사람의 기본 옵션 중 하나. 그런데 요즘은 그 기본 옵션이 종종 오작동한다. 캘린더를 켜놓고도 날짜를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하고, 방금 들은 말을 금세 잊어버리고, 휴대폰 화면을 끄자마자 “어? 방금 뭐 하려고 했지?” 하고 다시 켜는 내 모습.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놀라며 살아가는 요즘이다. 예전엔 분명 그렇지 않았는데, 기억력은 어느 순간 예고도 없이 서랍 속으로 숨어버렸다.
특히 핸드폰 찾는 상황은 정말 압권이다. 영상을 재생해놓고 보고 있으면서도, 다른 손으로는 폰을 찾고 있다.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 위를 더듬으며 “어디 갔지? 분명 여기 있었는데…” 하다가 결국 들고 있는 휴대폰 화면이 나를 밝게 비춘다. 그 순간의 허탈함과 피식 웃음. 이 정도면 나 스스로가 꽤 귀엽지 않나 싶다. 그래도 잃어버리지는 않는다니, 이건 거의 기적에 가깝다.
날짜는 더 큰 문제다. 요일은 마치 의도적으로 숨바꼭질을 하는 듯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고, 하루가 끝난 뒤에야 비로소 ‘오늘이 며칠이더라?’를 떠올린다. 일정은 머릿속에서 금세 희미해지고, 캘린더에 적어두지 않으면 순식간에 사라진다. 주머니에 넣어둔 종이조각처럼, 조금만 움직여도 구겨지고 잃어버리는 느낌. 그런데 또 막상 중요한 건 절대 기억에서 멀어지지 않는다. 참 이상한 일이다.
생각해 보면 머리가 나빠진 게 아니라 ‘너무 많이 담아서’ 그런 것 같다. 하루의 감정, 해야 할 일들, 잡다한 생각들, 스트레스, 작은 후회들까지 머릿속 서랍에 전부 넣어두고 살아가니, 서랍이 제자리를 잃는 게 당연하다. 마음속 공간이 좁아질수록 기억은 가장 먼저 밀려난다. 그래서 요즘의 깜박임은 단순한 건망증이 아니라, 내 삶이 얼마나 꽉 차 있었는지 알려주는 신호 같기도 하다.
어릴 때는 모든 게 선명했다. 교실 환하게 비추던 오후 햇빛, 친구가 건네주던 사탕 봉지의 색깔, 운동장 모래 냄새까지도 기억났다. 하지만 이제는 아침에 있었던 대화가 점심쯤 되면 흐려지는 날이 있다. 그땐 세상이 늘 선명한 선으로 그려져 있었는데, 지금의 세계는 연필심처럼 부드럽게 닳아있다. 그렇다고 나빠진 건 아니다. 단지 오래 살아온 만큼 기억의 모서리가 둥글어진 것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 남는 건 늘 따로 있다. 좋은 말, 반짝였던 순간, 나를 울렸던 장면, 내 손을 잡아준 사람의 온기. 이건 절대 잊히지 않는다.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선택이다. 어쩌면 기억은 매일 도망치지만, 마음은 늘 중요한 것들만 챙겨서 품고 다니는 건지도 모른다.
가끔은 이런 깜박임이 나에게 작은 여유를 준다. 모든 걸 기억할 필요는 없다. 잊어도 되는 건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도 된다. 머릿속에서 굳이 집착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까지 떠안고 살면, 삶이 더 무겁다. 잊어버린다는 건 비워내는 과정이기도 하고, 숨을 고르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지나간 실수를 잊는 것은 새로운 날을 위해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깜박거리는 나를 보면 조금 귀엽다. ‘아, 얘 또 이러네’ 싶으면서도 미워지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불안 해했겠지. ‘내가 왜 이러지? 내가 뭘 놓쳤지?’ 하며 자책했겠지. 그런데 지금은 그런 나를 보며 오히려 미소가 난다. 내가 나에게 너그러워지고 있다는 증거다. 기억력이 흔들려도, 나는 예전보다 더 나를 이해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잊어버린다고 해서 내가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기억은 흐려져도 중심은 남는다. 하루를 지탱하는 감정, 나를 움직이게 하는 가치, 누군가에게 건네고 싶은 마음 같은 것들. 이런 것들은 절대 깜빡이지 않는다. 잡동사니 같은 기억들이 흩어지는 동안에도, 정말 중요한 건 언제나 제자리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기억력이 완벽할 필요는 없다고. 깜박깜박하는 하루 속에서도 나는 잘 살고 있고, 중요한 기억은 잃어버리지 않는다. 잊을 건 개운하게 잊고, 지킬 건 끝까지 품으면 된다. 그게 요즘 내가 깨달은 생활의 기술이다.
오늘도 나는 손에 들린 폰을 또 찾을 것이다. 다시 날짜를 확인하고, 이미 해둔 일도 다시 확인하고, 문 열어두고 목적을 잊은 채 서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잊어버려도, 잃어버리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그런 나를 바라보며 나는 오늘도 웃을 것이다.
기억은 흐를지라도,
나는 여전히 나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