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배에 슬픔을 실어 보낼까

슬픔을 띄우는 가장 조용한 방법

by Helia

오늘, 나는 오래 붙들고 있던 마음을 접어 작은 종이배 하나를 만들었다. 기껏해야 빗물 고인 웅덩이 위를 잠시 떠다니다 금세 젖어 찢어질 얇은 종이였지만, 이상하게도 그 배가 오늘만큼은 내 슬픔을 떠밀어 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를 비워내려면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방식이라도 필요할 때가 있다. 우리는 종종 비논리적인 행동들로 스스로를 건져 올리니까.
손끝에서 태어난 작은 배를 바라보며 문득 깨달았다. 오늘 떠내려 보내고 싶은 건 슬픔 자체가 아니라, 그 슬픔을 품고 있었던 ‘어제의 나’라는 걸. 오래된 감정은 무게보다 모양이 문제였다. 마음 한쪽을 구부리고 접어두는 동안 쌓여 굳어버린 그림자 같은 모양. 그걸 부수는 대신 펼치고 다시 접는 과정이 필요했다. 종이는 한 번 접혔다고 영영 그 자국을 지우지 못하지만, 마음은 다르다. 구겨져도 다시 펴면 그만이니까.

종이배가 완성되자 나는 잠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배 위에 얹을 슬픔을 떠올리려니 묘하게 손가락이 떨렸다. 너무 오래 품어둔 감정이라 이미 내 일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버린다기보다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플까 두려웠다. 하지만 너도 그런 순간이 있었지. 말하지 못해 툭 하고 삼킨 날들.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해 목구멍까지 차오른 고였던 숨들.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무게의 감정이 몇 날 며칠을 뒤척이다가, 어느 순간 문득 한 방울로 뚝 떨어지는 그런 날.

나는 그 조각들을 하나씩 종이배 위에 놓았다. 놓을 때마다 가슴 어딘가가 콕콕 찔리듯 아팠지만, 신기하게도 손끝은 점점 가벼워졌다. 무거운 건 슬픔이 아니라 그것을 붙들고 있던 내 완고 함이었다. 사람은 왜 그렇게 마음을 쥐고만 있으려고 할까. 버리지 않으면 나라는 존재가 함께 무너질까 봐? 아니면 붙들고 있으면 언젠가 변할 거라는 기대 때문일까? 하지만 기대는 종종 미련으로 변하고, 미련은 다시 슬픔으로 굳어버린다. 그렇게 오래 들고 있던 바위 같은 감정이 물 위에서는 의외로 작은 자갈처럼 보였다. 흘려보내기만 하면 되는데 나는 왜 그동안 두 손으로 꼭 움켜쥐고 있었던 걸까.

슬픔을 실은 종이배를 물 위에 올려두는 순간, 아주 작은 파동이 일었다. 종이배는 생각보다 더 안정적이었다. 나는 일렁임을 따라 시선도 천천히 흔들렸다. 그 배는 지금 나를 떠나는 걸까, 아니면 내가 마음에서 손을 떼는 걸까. 잠시 고민하다 깨닫는다. 떠나는 건 슬픔이 아니라 집착이다. 감정 자체는 늘 우리 안에 머물러 있었지만, 집착만 놓아도 마음은 다른 얼굴을 띤다. 너도 아마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하나의 감정을 떼어낸 것이 아니라, 감정에 붙어 있던 무리한 의미들을 내려놓고 나니 몸이 어느새 가벼워지는 순간.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슬픔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하지만 시간이 슬픔을 치유하는 게 아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슬픔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때로는 회피하고, 밀어내고, 다시 마주하는 과정이 우리를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느슨한 반복이 쌓여 어느 순간 감정의 지형이 조금 달라지는 것뿐이다. 그러니 오늘 내가 종이배에 실어 보내는 이 마음도 시간을 통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나는 이제 이 마음을 바라보고, 건드리고, 들어 올리고, 내려놓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뿐이다. 그게 변화다.

종이배는 유난히 가볍게 앞으로 나아갔다. 물결의 모양이 잔잔한 파도처럼 일렁였다. 순간, 마음속에 오래 머물던 말들이 떠올랐다. “슬픔은 감추면 썩는다.” 그 말이 물 위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동안 나는 슬픔을 숨기는 데에만 익숙했다. 잘 보이는 곳에 두면 누군가 건드릴까 두려웠고, 드러내면 어딘가 부끄러울 것 같았다. 하지만 숨긴 감정은 금세 곰팡이가 피고, 오래된 상처는 더 깊어지기 마련이다. 반면 꺼내놓으면 공기가 닿아 말라버리고, 말라버리면 더 이상 날카롭지 않다. 나는 그 당연한 이치를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멀어져 가는 종이배를 지켜보면서 마음 한구석이 시리게 아렸다. 하지만 그 아림은 고통이 아니라 작별의 인사처럼 느껴졌다. 아픔이 나를 할퀴던 날들, 외면하던 감정의 조각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오래 울리던 낮은 진동 같은 슬픔들이 천천히 멀어지는 듯했다.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닐 것이다. 인생의 어느 모퉁이에서 또 다른 형태로 찾아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나는 이 감정을 떠나보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너도 가끔 느끼지 않나. 어느 날 문득, 내가 붙잡고 있던 것이 슬픔이 아니라 ‘이 슬픔을 절대 놓으면 안 된다’는 고집이었다는 사실을. 정작 나를 힘들게 했던 건 감정이 아니라, 감정을 해석하는 방식이었다는 걸. 그래서 우리는 종종 슬픔을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붙들고 있었던 나를 놓아주는 것이다. 그 깨달음이 찾아오면 마음이 비로소 조금 평온해진다. 오늘의 나는 그 평온을 천천히 배우고 있었다.

물 위를 가르는 작은 배는 내 시야에서 점점 더 멀어졌다. 어둡거나 슬픈 풍경이 아니라 오히려 밝고 고요한 정경처럼 느껴졌다. 마치 마음의 먼지가 한 겹씩 걷히는 순간 같았다. 종이배가 사라지자 마음의 한 부분이 비어졌다. 빈 공간은 낯설었지만 불안하지 않았다. 공간이 생기면 무엇인가 들어와 자리를 잡기 마련이다. 때로는 햇살이, 때로는 바람이, 때로는 새로운 시작 같은 희미한 떨림이 스며든다. 빈자리는 그래서 필요하다. 꽉 찬 마음은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 비워내야 숨이 통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문득 생각했다. ‘슬픔을 떠나보낸다는 건 결국 나를 다시 시작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의 종이배는 하나의 작별이자 작은 출발이었다. 그저 한 장의 종이에 불과한 것이 어떻게 마음의 무게를 덜어줄 수 있을까 생각했었는데, 결국 떠나보낸 건 종이가 아니라 나였다. 오래된 감정을 놓아주고 나니 마음 안쪽에서 바람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아주 약한 바람이었지만, 그 결이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돌아오는 길, 나는 또 다른 종이를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혹시라도 마음이 다시 무거워질 날을 대비해서. 삶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순간에 우리를 뒤흔든다. 아무 이유 없이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날도 있고, 사소한 말 한마디에 오래된 상처가 되살아나는 날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제 조금 더 현명해지고 싶다.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그렇다고 삼키지도 않고, 내 안의 흐름대로 흘려보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너에게도 작은 종이배 하나쯤 있었으면 한다. 꼭 물가가 아니어도 괜찮다. 너의 슬픔이 한 번쯤 내려앉아 쉬어갈 수 있는 작은 공간.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을 만큼 조용하고, 스스로에게는 솔직할 수 있는 은밀한 자리. 그곳에 너의 마음 한 조각을 살며시 올려두면 된다. 떠나보내지 않아도 되고, 당장 흘려보낼 필요도 없다. 다만 너도 알게 될 것이다. 때로는 마음을 손에서 살짝 놓아도 괜찮다는 사실을. 떨어뜨린 게 아니라 비워낸 것이라는 걸.

슬픔은 때때로 우리를 단단하게 만든다. 휘청이게도 만들지만, 다시 서는 법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종이 한 장을 접는다. 조용히, 천천히, 마음의 결을 따라 접어 나간다. 접다 보면 알게 된다. 마음도 이렇게 서서히 모양이 생긴다는 것을, 어떤 감정도 결국은 손끝에서부터 다시 시작된다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 이 종이배처럼 내 마음도 더 멀리, 더 가볍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너도 그런 날이 오기를 바란다. 아주 작은 배 하나가 너의 마음을 덜어내고, 오래된 감정을 살며시 떠밀어 주는 날. 그날, 너의 물결 위에서 또 다른 시작이 잔잔하게 흔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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