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기한 지난 마음을 왜 아직도 붙잡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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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기한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 단지 상자에 찍힌 숫자일 뿐인데, 그 작은 숫자 하나가 내가 얼마나 미루는 사람인지, 얼마나 못 버리고 사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냉장고 문을 열면 늘 그것들이 있다. 버리라고 손짓하는 반찬통, 이미 흰 꽃을 피워버린 곰팡이, 단단하던 야채가 숨을 놓아버린 채 가라앉아 있는 모습. 그걸 보면서도 나는, 또다시 뚜껑을 닫고 냉장고 안으로 도로 밀어 넣는다. 아끼는 게 아니라 미루는 건데, 그걸 인정하는 데 유통기한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왜 못 버릴까. 음식이 아까워서? 아니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버리는 순간, 내가 귀찮음을 핑계로 방치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정돈하지 않은 시간들이 냄새를 풍기며 눈앞에 나타나는 것 같다. 그게 어쩐지 부끄럽다. 그래서 나는 못 본 척한다. 명백히 상했는데도 “혹시 모르니 놔두자”라고 말하며. 하지만 속으로는 알고 있다. 절대 먹지 않을 거라는 걸. 손을 대지 않을 것이고, 결국 더 썩을 것이며, 그건 곧 내가 미루고 방치한 마음의 모양과 똑같다는 걸.
냉장고 속에서 오래 묵힌 음식들은 마치 내 마음의 잔해처럼 보인다. 끝난 마음, 다한 관계, 이미 변해버린 감정들. 유통기한이 훌쩍 지나버린 줄 알면서도 다시 넣는다. 왜냐면 비워진 칸이 주는 공허가 두렵기 때문이다. 빈자리라는 건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동시에 책임도 요구한다. 채워야 하고, 관리해야 하고, 다시 신경 써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상한 걸 붙들고 산다. ‘있는 게 나으니까’라며 자위하면서.
하지만 상한 건 결국 냄새를 풍긴다. 눈을 피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도 그렇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붙들고, 더는 설레지 않는 관계를 끌고 가고, 이미 끝난 감정을 억지로 되살리려 애쓰며 스스로를 괴롭힌다. 단지 버리는 게 아까워서가 아니라, 인정이 두려워서다. 그 마음이 변질됐다는 사실, 내가 그걸 방치해 왔다는 사실을 마주하기가 무서워서다.
유통기한이 지나면 감각부터 변한다. 음식의 색이 바래고, 향이 탁해지고, 손에 잡히는 촉감이 딱 알 수 없는 불쾌함으로 변한다. 그런데 마음도 똑같다. 예전에는 보들보들하게 설렘이 묻어나던 관계가, 이제는 만지기만 해도 까슬까슬하게 불편함이 묻어난다. 말의 향이 달콤했는데 어느 순간 신 냄새로 바뀌고, 함께 있는 게 편안했는데 이제 이유 없이 무겁고 답답하다.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 마음을 어떻게 다시 먹고살겠는가. 익숙하다는 이유로 버리지 않는 건 방치지 아낌이 아니다. 그리고 방치는 결국 곰팡이를 키운다.
냉장고 청소를 할 때면 늘 같은 순간이 찾아온다. 버리기 직전, 아주 잠깐, 단 몇 초 동안 ‘혹시 괜찮지 않을까?’라는 미련이 스친다. 이미 곰팡이가 핀 것을 보면서도, 눈에 보이는 변질을 느끼면서도, 그 아주 적은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본다. 그건 음식에 대한 미련이 아니다. 어쩌면 그 음식과 함께 흘려보낸 시간, 그때의 나를 버리는 것 같아서다. 나의 게으름이, 나의 선택이, 나의 미련이 모두 한꺼번에 버려지는 것 같아서다.
하지만 결국 뚜껑을 열어 쓰레기통에 비워 넣는 순간, 이상할 만큼 마음이 가벼워진다. 무게는 줄었는데, 삶은 오히려 넓어진다. 비워지는 건 잃는 게 아니라 다시 맞아들일 준비와 같다. 남겨둔 자리가 썩어가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새로 들어오지 못했다. 어쩌면 나보다 먼저 변질된 건 음식이 아니라 내 마음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미뤄두고, 덮어두고, 괜찮은 척하며 오래 놔둔 마음의 냉장고가 더 심하게 상해 있었을지도.
그래서 이제는 조금 솔직해지고 싶다. 버려야 할 건 버려야 한다.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것처럼, 더 이상 나를 기쁘게 하지 않는 마음도, 나를 지치게만 하는 관계도, 마감 기한이 지나버린 기대도. 언제까지고 냉장고 안에 넣어둘 수 없다. 넣어둘수록 냄새는 더 진해지고, 나중엔 문을 열기도 싫어질 테니까. 버림은 잔혹함이 아니라 정리의 첫걸음이다. 정리가 되어야 삶이 숨을 쉰다.
이제 나는 조금 더 과감해지고 싶다. 유통기한 지난 마음을 붙잡지 않을 용기. 다한 관계를 억지로 살리지 않을 결단. 비워진 칸을 무서워하지 않을 태도. 남겨둔 자리가 있다는 건 선택의 여지가 있다고 말해준다. 새로 채워 넣을 수 있고, 혹은 한동안 비워둬도 괜찮다는 뜻이다. 빈 공간은 가능성이지 결핍이 아니다.
오늘 냉장고를 열며 다짐했다. 다시 묻어두지 말자고. 더 이상은 상한 마음을 삶에 끼워 넣지 말자고. 눈 감아주기만 하는 습관을 그만두자고. 이미 알고 있었다. 버리면 끝나는 게 아니라, 비로소 시작된다는 걸. 비워둬야 채워진다는 단순한 진리를 나는 늘 미뤄왔다.
그러니 오늘만큼은 나에게 말하고 싶다.
버려.
이미 끝난 건 붙잡을 이유가 없다.
유통기한 지난 건 음식이 아니라, 네 마음이었다.
그리고 버린 자리에, 언젠가 더 신선한 무언가가 찾아올 거라고.
그걸 믿는 게 어른의 용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