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길에서 다시 살아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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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êverie: Pour évoquer un rêve perdu dans le silence du soir
사색이 취미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뜬다. 특별한 장비도 없고, 결과물이 손끝에 남는 것도 아닌데 무슨 취미냐는 듯. 하지만 나는 그 질문 대신 조용히 웃는다. 사색은 누가 봐도 보잘것없는 하루 속에서 나만의 숨구멍을 찾아내는 기술이고, 삶이 무료해지지 않도록 나를 다시 살아 있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흙길 위에서 떠오르는 생각만큼 솔직한 것은 없다. 마음이 엉키면 흙길이 풀어주고, 생각이 막히면 흙길이 길을 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 길을 걷는다.
흙길을 밟을 때마다 느끼는 묘한 안정감이 있다. 발바닥 아래에서 부스러지는 흙의 감촉은 마치 마음속 오래된 짐들을 천천히 갈아 없애는 기계 같다. 바람은 잔가지 사이를 스치며 내 생각의 먼지를 털어주고, 햇빛은 말없이 어깨 위에 내려앉아 기분을 데워준다. 이런 순간에 나는 비로소 세상이 내게 말을 건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흙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가장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곳이다.
생각을 정리하려고 억지로 애쓸 필요도 없다. 사색은 억지로 열리는 문이 아니다. 오히려 마음의 힘을 풀어놓을 때, 물처럼 스며드는 순간에 열린다. ‘오늘은 왜 이렇게 지쳤지?’ 하는 질문이 떠오르면, 흙길은 마치 오래되고 부드러운 의자처럼 그 질문을 그대로 받아준다. 돌멩이 하나, 떨어진 낙엽 하나에도 세상이 남긴 흔적이 묻어 있어, 나는 그 작은 흔적들 속에서 나를 다시 찾는다.
간혹 흙길을 걷다가 오래된 기억이 성질 급한 아이처럼 치고 올라올 때가 있다. 누군가와 나눴던 말, 놓쳐버린 기회, 끝내 붙잡지 못한 감정. 예전엔 그런 기억들에 다시 휩쓸리는 게 무서웠다. 하지만 사색을 오래 하다 보니 알게 되었다. 기억이라는 건 갑자기 날카로워지는 칼날이 아니라, 오래 만져서 둥글어진 조약돌 같다는 것. 손에 쥐고 있으면 묵직하지만 따갑지는 않다. 흙길에서 떠오르는 기억이 유난히 부드러운 이유는, 아마도 그 길이 나를 다그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사색을 취미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나를 살리는 여러 기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마음이 흐트러질 때, 관계가 조금씩 삐걱거릴 때, 방향을 잃었다고 느낄 때, 사색은 가장 먼저 나를 일으켜 세운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묻혀 내 마음이 보이지 않을 때, 흙길은 조용히 손을 내밀어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말해준다. 그 말이 들릴 때면 숨이 조금 고르고, 심장이 다시 규칙적인 리듬을 찾는다.
사색의 좋은 점은 정답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생각이든 그대로 통과시키고, 어떤 감정이든 머물고 싶으면 머물게 둔다. 억지로 정리하려 하지 않아도, 사색은 스스로 마음의 창고를 분류한다. 버릴 건 모래처럼 흘려보내고, 간직할 건 천천히 닦아 빛을 준다. 그래서 사색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이면 마음속 서랍이 조금은 정돈된 느낌이 든다. 흙길은 나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치료이고, 가장 조용한 명상이며, 가장 정직한 내면의 지도다.
어떤 날은 사색이 깊어져 시간의 감각이 흐려진다. 발걸음은 이곳에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계절을 걷는다. 봄의 향기 속을 지나기도 하고, 장대비가 쏟아지는 여름 한복판을 지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느 순간엔 가을의 잔향이 뒤섞인 슬픔 속을 걷는 듯하다. 그렇게 계절을 건너오면 묘하게 마음이 가라앉는다. 몸은 한참을 걸었는데 마음은 돌아오자마자 새로 태어난 것 같다.
사색은 나를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일한다. 예전의 나는 ‘빨리’가 능력이라고 믿었다. 빨리 결정하고, 빨리 움직이고, 빨리 잊는 것이 삶을 잘 사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색을 하고 난 뒤, 나는 알게 되었다. 느림에도 기세가 있다는 걸. 천천히 걸을수록 더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더 깊은 감정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색은 내 삶에 ‘여백’을 심어주었다.
흙길에서 나는 지금의 나와 솔직한 대화를 나눈다. 오늘의 나를 바라보며 가만히 묻는다. “괜찮아?” 그 질문은 참 간단하지만,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뜻이 담겨 있는지 걸을수록 깨닫는다. 남들의 속도에 계속 끌려가면 숨이 차고, 내 감정보다 해야 할 일들이 커져버리면 마음이 기울어지는데, 사색은 그런 나를 다시 균형으로 데려다준다. 흙길이 가진 마법은 어쩌면 단 하나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허락해 주는 것.
삶이 무료해지는 이유는 거창한 사건이 없어서가 아니다. 마음속 공기를 환기시키는 시간이 부족해서다. 생각이 고이면 탁해지고, 감정이 쌓이면 눅눅해진다. 사색은 그 눅눅함을 말려주는 햇빛 같은 존재다. 흙길 위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 구석구석에 바람이 드나드는 것 같다. 걸을수록 생각의 틀 사이로 빛이 스며들고, 어둡던 감정도 물기를 잃고 산뜻해진다.
그래서 나는 사색을 멈추지 않는다. 바쁜 날도, 피곤한 밤도,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도, 흙길을 걷기만 하면 다시 숨이 트인다. 길 위에선 누구도 나를 비교하지 않고, 누구도 나에게 서두르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만의 속도로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이토록 큰 위로가 될 줄 예전엔 몰랐다. 사색은 나에게 “천천히 살아도 괜찮다”라는 언어를 가르쳐주었다.
길의 끝에 서면 늘 똑같은 생각이 든다. 사색은 멈춤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의 이동이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위로이고, 가장 깊은숨이고, 나를 가장 나답게 돌려놓는 시간이다. 세상은 빠르게 돌아가도, 내 마음은 그 속도를 따를 필요가 없다. 흙길 위의 사색이 나에게 알려준 삶의 기술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흙길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 삶이 무료해지지 않도록, 내 안의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도록, 사색이라는 느린 여행을 계속하기 위해.
오늘의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단단하고, 내일의 나는 오늘보다 조금 더 부드러워질 것이다.
사색은 그렇게 나를 변화시키며, 조용히,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내 삶을 이끌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