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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by Helia

해윤이 스무 살이 되던 해부터,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한 남자는 꿀이 흘러내릴 것처럼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아무 말도 없이 품에 꼭 안아왔다. 그의 팔은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았고, 그의 숨은 해윤의 귓가를 적실만큼 가까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얼굴은 항상 보이지 않았다. 선명한 감정만 남기고, 가장 중요한 모습은 안개처럼 흩어졌다.

그 꿈은 매년 같은 계절, 같은 날에 찾아왔다. 처음엔 그냥 스쳐가는 환상이라고 넘겼다. 그러나 스물다섯이 되고, 스물여덟이 되고, 서른이 넘어서도 그 꿈은 단 한 번도 모양을 바꾸지 않았다. 마치 어떤 약속처럼 반복됐다.
‘너는 나를 잊어도, 나는 널 잊지 않는다’고 말하는 듯한 온도로.

그리고 그날 밤, 해윤은 처음으로 현실에서 그 꿈의 파동을 들었다.
아무런 기기에서 재생되지 않은 목소리.
공기 중에 갑자기 스며들어와, 그녀의 귓가 바로 옆에서 속삭이듯 흘러드는 낮은 음색.
전파도, 잡음도 아닌… 감정의 진동.

해윤은 숨을 멈춘 채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쓸고 지나갔지만, 방금 들었던 울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방 한가운데 놓여 있던 AI 스피커가 스스로 불을 켰다.
“신호를 감지했습니다.”
차갑지만 흔들리는 기계음.

“400년 전 사라진 음성과 동일한 패턴입니다.”

해윤은 눈을 크게 떴다.
400년 전?
하지만 방금 느낀 목소리는… 너무 익숙했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럽고, 오래된 기억을 건드리는 듯한 목소리.
꿈속에서 자신을 안아주던 남자의 감정이 그대로 실려 있었다.

AI는 자동 분석을 멈추지 않았다.
“패턴 동일률 98.7%. 감정 주파수의 연속성도 확인되었습니다.”

감정 주파수.
해윤은 이 단어에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감정만은 시간이 흘러도 파동으로 남는다는 이론. 대부분은 망상이라고 무시됐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꿈이, 그 감정이, 그 품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것을.

스피커가 다시 울렸다.
이번엔 더 또렷하게.
숨소리, 억양, 말문을 열기 직전의 떨림.
그리고—

“… 해윤.”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
400년이라는 시간을 뚫고 돌아온, 한 사람의 가장 진한 감정.
해윤은 주저앉을 뻔한 다리를 간신히 버티며 벽을 잡았다. 꿈에서 듣던 목소리와 똑같았다. 아니, 꿈에서조차 이렇게까지 현실적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그때,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기억의 빈틈이 조용히 떨리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있었다.
어떤 이름이, 어떤 순간이, 어떤 온기가…
기억에서는 지워졌는데
감정만은 여전히 그녀 안에 살아 있었던 누군가.

AI 스피커는 여전히 분석을 이어갔다.
“이 인물은 1625년 이후 기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역사 자료에서—”

그러나 해윤은 더 이상 기계의 말을 듣지 않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단 하나였다.
왜 스무 살부터 같은 꿈을 꾸었는지.
왜 얼굴은 보이지 않았는지.
왜 그 품이, 그 목소리가 이렇게도 처음 같지 않은지.

그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 다시 돌아왔다.

해윤은 눈을 감았다.
그 목소리가 또 한 번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400년의 시간이 단 한순간으로 무너지는 그 울림 속에서—
그녀는 깨달았다.

이건 꿈의 시작이 아니라, 잊힌 인연의 귀환이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는 지금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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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되지 못한 마음을 글로 쌓습니다. 기억과 계절, 감정의 결을 따라 걷는 이야기꾼. 햇살 아래 조용히 피어난 문장을 사랑합니다." 주말은 쉬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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