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흔들리는 하루의 한가운데서

by Helia

몸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다시 학교로 갈 수 있을 거라는 걸.
마음이 따라오지 못해도, 발은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

아침 공기는 아직 차가웠다.
부엌에서는 이모가 밥솥 뚜껑을 여는 소리가 났고, 김이 천천히 빠져나왔다.
국을 젓는 소리, 숟가락이 그릇에 닿는 소리.
그 소리들은 어제와 같았고,
그래서 오늘도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모는 소녀의 얼굴을 오래 보지 않았다.
괜히 들여다보다가 내가 흔들릴까 봐,
아니면 자기가 먼저 무너질까 봐
시선을 조금 비켜 둔 사람처럼.

“국 더 줄까.”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치는?”

“응.”

짧은 대답들이 식탁 위에 놓였다.
숟가락을 들고, 입에 넣고, 씹고, 삼키는 일.
그 반복이 오늘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학교로 가는 길은 여전히 같았다.
횡단보도, 편의점, 전봇대 그림자.
달라진 게 있다면 발이 덜 미끄러웠다는 것뿐이었다.
무섭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미 한 번 해본 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교실 문을 열자 가연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늘 먼저 와 있었고, 늘 자기 옆자리를 비워두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 자리는 자연스럽게 소녀의 자리가 되었다.

“왔네.”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설명도, 이유도, 위로도 필요 없었다.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소녀는 학교에 갔다.
사람들의 시선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복도에서 웃음이 소녀를 스치듯 지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가연이 있는 자리에서는
공기가 조금 달랐다.
소녀는 굳이 혼자가 되지 않아도 됐다.

그러던 날, 국어 시간이 한창일 때였다.
교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낯선 어른 몇 명이 선생님과 함께 들어왔다.
아이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고,
수업 중이던 공기가 단번에 굳었다.

선생님은 칠판을 등지고
어른들과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다.
누구의 이름도 불리지 않았는데
몸이 먼저 알아챘다.
이건 소녀, 자신의 이야기라는 걸.

어른들의 시선이 교실을 훑었다.
묻기 위해 온 눈이 아니라
확인하기 위해 온 눈들이었다.

그때 가연이 말없이 소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두 손으로 소녀의 귀를 막았다.
세지도, 어색하지도 않게
그냥 들리지 않게만.

“이런 얘긴 안 들어도 돼.”

손바닥 너머로 소리는 흐려졌고
심장 소리만 또렷해졌다.
쿵, 쿵.

전부 들리진 않았지만
단어들은 틈으로 스며들었다.
전학, 같은 교실, 아이들 정서.
가연의 손이 아주 조금 떨리고 있었다.
소녀는 숨을 크게 쉬지 않았다.
지금 무너지면
그 손도 같이 흔들릴 것 같아서.

어른들은 결국 교실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교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책장이 넘어가고, 연필이 움직였다.
선생님은 수업을 이어갔다.

가연은 그제야 손을 내렸다.

“괜찮아?”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는 말은 아직 입에 걸렸지만
버틸 수는 있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
복도는 잠깐 시끄러워졌다.
학부모들과 선생님들이 교장실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구두 소리와 낮은 목소리가 멀어지자
한바탕 소란이 일던 복도는
거짓말처럼 비어버렸다.

그 정적 속에서
가연이 반장을 향해 돌아섰다.

“야, 오나림.”

나림은 가방끈만 만지작거렸다.

“네가 말했지?”
“너네 엄마가 학부모회장이잖아.”
“네가 아님 여기 왜 오시겠어?”
“네가 다 말했으니까 오신 거 아냐?”

나림은 시선을 피했다.

“현숙이가 전학을 왜 가야 하는데?”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왜 현숙이한테 그래?”

아이들 몇 명이 숨을 삼켰다.
아무도 끼어들지 않았다.

가연은 복도에 남아 있던 아이들을 둘러봤다.

“다들 입 있으면 말해봐.”
“현숙이가 괜히 그러겠어?”
“엄마를 살리려고 그런 거잖아.”
“가만히 엄마가 죽게 보고만 있으란 거야?”

잠깐의 침묵.

“나였어도 그렇게 했어.”
“너네도 알잖아.”
“그거 정당방위였단 거.”

가연은 한 번 더 숨을 고르고 말했다.

“그 상황에서 엄마가 죽을 거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다면—”
“그게 진짜 패륜아 아니야?”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가연이 돌아서려는 순간
나림이 작게 내뱉었다.

“짜증 나.”
“최가연.”
“지가 뭔데 난리야.”
“지가 현숙이 대변인이야 뭐야.”
“오버스럽기는.”

말은 작았는데 또렷했다.
이번엔 귀를 막아주는 손도 없었다.

가연의 발이 멈췄다.
이번엔 완전히.

가연은 천천히 돌아섰다.

“오나림.”
“너 뭐라고 했냐?”
“할 말 있으면 해.”
“뒤에서 속삭이지 말고.”

나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뭐야?”
“내 말이 틀려?”
“맞잖아.”

가연은 숨도 고르지 않았다.

“나 현숙이 대변인 아니고.”
“친구거든.”

잠깐의 정적.

“넌 나 같은 친구 있어?”
“네 편 들어주는 친구.”
“없지?”

그건 질문이 아니었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해.”

선생님 발소리가 복도 끝에서 들려왔다.
아이들은 각자 교실로 흩어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연은 소녀 쪽으로 돌아왔다.
목소리를 낮췄다.

“괜찮아.”
“네 잘못 아니야.”
“너 아무도 못 건드리게 내가 지켜줄게.”
“쫄 거 없어.”
“알았지?”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가연은 먼저 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내 옆이 아니라
반 걸음 앞에서.

앞을 먼저 보겠다는 사람처럼.

소녀는 그 뒤를 따라 걸었다.
학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움직였지만
소녀의 안에서는 분명히 하나가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는 학교가 자신을 삼키는 곳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오늘은 소녀가 학교를 조금 삼킨 것 같았다.

아직 목에 걸리는 조각들이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물을 마시면 넘어갈 수 있을 만큼.

그리고 무엇보다
소녀 옆에 있는 사람은
그 물컵을
빼앗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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