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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장|동전을 손에 쥐여주었더니

작은 원이 데워준 마음의 온도

by Helia

추천 클래식.

The Gentle Warmth of a Small Silver Circle Left on the Sunlit Stairwa


동전을 손에 쥐여주었더니, 차갑던 금속이 내 체온을 훔쳐 가듯 얼른 데워졌다. 아주 작은 원 하나가 손바닥에서 이상한 힘을 갖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게가 실려 있는 듯, 오래된 기억의 문을 살짝 흔든다. 동전은 풍경을 바꾸지 못해도 마음의 방향을 조금 비틀어놓는 재주가 있다. 그 미세한 틀어짐이 억눌러둔 추억을 깨우고, 잊고 살던 표정 하나를 조용히 떠올리게 만든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건물 계단을 매일 닦아내며 하루를 시작하던 할머니의 뒷모습이었다. 할머니는 늘 새벽 공기가 아직 젖어 있을 때 나를 등에 업고 출근하셨다. 오래된 건물의 냄새가 나는 좁은 복도를 지나 계단을 오르는 동안, 나는 할머니의 등에서 미세하게 오르내리는 숨결을 느꼈다. 그 숨결이 내 귀에 닿을 때마다, 마치 짧은 자장가처럼 나를 달래주었다. 할머니는 한 번도 무겁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나를 업은 채 대걸레를 들고, 양동이를 옮기고, 고무장갑을 끼고, 그 긴 계단을 위아래로 여러 번 오르내렸다.

옥상 입구 바로 아래에 작은 계단참이 있었다. 햇볕이 잘 드는 자리였다. 할머니는 그곳에 나를 살그머니 내려 앉히곤 했다. “여기서 조용히 앉아 있어라.”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를 토닥였다. 나는 늘 그 자리에 앉아 할머니가 내려갔다 올라오는 모습을 지켜봤다. 대걸레 끝이 바닥을 쓸며 내는 리듬 같은 소리. 양동이 속 물이 출렁거리는 소리. 발걸음이 오르내릴 때마다 바스락거리던 고무신의 마모된 밑창. 그 모든 소리가 할머니의 하루를 채웠고, 동시에 내 어린 시절의 배경음을 만들었다.

내가 칭얼거리기 시작하면, 할머니는 일하던 손을 잠시 멈추고 주머니를 뒤적이셨다. 그 안엔 언제나 동전 몇 개가 있었다. 할머니는 주머니에서 하나를 골라 내 손바닥에 조심스레 올려주곤 했다. “자, 이거 잡고 있어라.” 동전은 늘 차갑게 시작해 천천히 미지근해졌다. 금속 하나가 온기를 얻는 동안 내 울음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 작은 원 안에는 할머니의 마음이 들어 있었다. 말보다 오래 남고, 말보다 솔직한 마음.

그때는 몰랐다. 왜 동전 하나로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동전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 할머니가 나를 업고 다녔던 무게, 일하면서도 내려가 날 한번 더 살피던 눈빛, 허리가 굽어가던 몸짓 속에서 건넨 조용한 사랑이었다. 할머니는 부드럽고 말이 적은 사람이었기에 마음을 동전에 담아 건넸던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 마음을 정확히 읽어냈던 것이다. 말보다 손이 먼저 기억하는 온기. 그게 동전이 가졌던 진짜 힘이었다.

성인이 된 지금, 누군가에게 동전을 쥐여줄 일이 거의 없다. 돈은 카드와 문자로 흘러가고, 사람의 손바닥은 더 이상 거래의 자리가 아니다. 피부와 피부가 맞닿을 틈이 없다. 그래서일까. 마음이 더 자주 냉각되는 기분이 든다. 할머니가 전하던 온기는, 이제 세상 어디에서도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대중교통 단말기의 삑 소리, 편의점 자동결제기의 삡 소리는 손바닥의 온기를 대신하기엔 너무 차갑다. 손을 맞잡는 대신 서로의 화면을 바라보는 시대가 오고, 따뜻한 것을 건네는 방식도 점점 귀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지하철 계단 아래에서 종이컵 하나를 앞에 둔 노인이 있었다. 지나가던 아이가 어설프게 주머니를 뒤져 작은 동전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 동전을 노인의 손등 위에 살짝 올려두었다. 쨍그랑 소리조차 나지 않은, 너무 조용한 건네줌. 그 순간 오래 묵은 기억 하나가 정확히 되살아났다. 옥상 입구 계단에서 칭얼대던 나를 달래기 위해 동전을 쥐여주던 할머니의 손. 그 손의 온도가 떠올라, 가슴 한쪽이 이상하게 뜨거워졌다.

동전에는 누군가의 마음이 담길 여지가 있다. 아주 작은, 그러나 분명한 여지. 편의점에서 잔돈을 들고 나오는 손들을 보면, 그 잔돈이 삶의 큰 틀에서는 아무 의미 없어 보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누군가의 일상에 스며드는 조용한 리듬이었다. 잔돈 몇 백 원 때문에 상처받거나 기뻐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작은 것은 언제나 생각보다 깊이 새겨진다. 삶은 큰돈이 아니라 작은 동전들 사이에서 더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나도 누군가에게 동전을 건네본 적이 있다. 기부함 앞에서 망설이던 친구에게 아무 말 없이 동전 하나를 쥐여주었다. “이거라도 넣어.” 그 말 대신 손바닥이 먼저 움직였다. 친구는 조심스럽게 동전을 떨어뜨렸고, 금속끼리 맞부딪히는 소리가 은근히 울렸다. 아주 작은 선택이 마음을 바꾸는 순간이었다. 말보다 조용했고, 그래서 더 단단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잊고 산다. 동전의 감각을. 그 금속이 손바닥에서 데워지기까지의 짧은 시간을. 그 사이에 스며 있던 마음을. 그래서 어떤 날에는 그 감각이 미치도록 그리워진다. 손바닥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을 견디지 못할 때면, 마치 손끝에서 작은 금속이 굴러다니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존재하지 않는 동전이 마음 어딘가를 건드린다. 그건 동전 자체의 무게가 아니라, 그 금속 속에 담겨 있던 마음의 잔향 때문이다.

할머니가 내 손에 쥐여주던 동전은 단순한 백 원짜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할머니가 가진 따뜻함을 가장 단순한 형태로 압축한 조각이었다. 말을 아끼던 사람의 마음은 손길 속에서 더 선명해졌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종종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따뜻함을 전한다는 건 결국 거창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동전처럼 작고 둥근 마음 하나만 있어도 된다는 것을. 그것만으로도 누군가의 하루가 조금은 단단해질 수 있다는 것을.

동전을 손에 쥐여주었더니, 오래전 할머니의 숨결까지 함께 되살아났다. 굽은 어깨로 나를 업고 계단을 오르던 그 흔들림, 내 칭얼거림을 잠재우기 위해 건넨 작은 금속의 온기, 말없이 흘려보내던 마음의 결. 나는 그 모든 것을 동전 하나로 배웠다.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위로가 반드시 큰 손길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따뜻함은 언제나 작은 것 속에 숨어 있다는 걸.

그래서 오늘도 나는 마음을 적실 작은 원 하나를 떠올린다.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 조심스레 내려앉을 온기의 무게를 생각한다. 손과 손이 맞닿는 일은 줄었지만, 마음을 건네는 일만큼은 잊지 않기 위해서. 할머니가 내게 가르쳐준 방식 그대로.
작고 둥근 마음 하나가 누군가의 하루를 데워줄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여전히 믿는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에게 조용히 건넬 그 작은 온기의 순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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