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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장|길들여진, 짝사랑이여

오래 길러낸 마음의 그림자

by Helia

추천 클래식

**Ralph Vaughan Williams –

“Fantasia on a Theme by Thomas Tallis”**


짝사랑은 어느 순간 조용히 뼈 안으로 스며든다. 처음엔 단순한 호감이었을 뿐인데, 어느 날 눈을 뜨면 그 감정이 피부 아래 자리 잡고 있다. 마치 오래 길들여진 버릇처럼 사라질 기미도 보이지 않은 채. 내가 너를 좋아한 마음도 그랬다.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듯 보였지만 실은 아주 오랜 시간, 나도 모르는 사이 자라나고 있었다. 나에게서 한 뼘도 떨어지지 않는 그림자처럼 네가 따라다녔고, 나는 그 그림자를 애써 외면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이건 사랑이 아니라 습관이 되어 있었구나. 너 없는 하루가 상상되지 않는, 말랑하지만 아픈 습관.

아침 공기가 유독 투명해 보이던 날, 네 이름이 스치는 순간 바람의 결이 바뀌는 기분이 들었다. 너를 떠올리면 마음이 이상하게도 가벼워졌다가 무거워지곤 했다. 대수롭지 않은 순간마다 네가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 불쑥 찾아왔고, 그 생각이 하루의 온도를 결정했다. 네가 내 앞을 스쳐 지나가면 마음은 어느새 들뜬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었고, 네가 보이지 않는 날엔 이미 늦은 저녁부터 하루가 허전했다. 내 감정은 너의 존재 여부에 따라 오르내리는 조수와 같았고, 나는 그 파도에 아무 말 없이 몸을 내맡겼다. 밀려들면 쓸려가고, 빠져나가면 버려졌다.

사람들은 말한다. 짝사랑은 자기 파괴적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온전히 믿지 못했다. 너를 좋아한 마음이 나를 파괴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살아 있게 만들기도 했기 때문이다. 너는 모르는 작은 장면들이 나를 버티게 했다. 네가 커피 마시며 웃던 옆모습, 갑자기 핸드폰을 보며 미소 짓던 순간, 귀에 꽂은 이어폰 줄이 바람에 흔들리던 모습. 그 사소한 장면들을 마음속에 담아두며, 나는 하루의 먼지를 털어낼 수 있었다. 완전한 절망 속에서도 단 한 줄기 빛을 찾는 사람처럼, 나 역시 너의 흔적에서 작은 희망을 찾았다.

그러나 짝사랑이 길어질수록 이상한 변화가 찾아왔다. 너를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너를 잃는 감각도 함께 커졌다. 가진 적도 없는데 잃었다고 느끼는 기묘한 감정. 네가 다른 사람과 웃을 때마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로 가득한 너의 세계를 마주할 때마다, 내 마음의 깊은 곳에서 작은 균열이 생겼다. 나는 그 균열을 감추기 위해 애썼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감추는 일조차 자연스러워졌다. 감정이 나를 지치게 한다기보다, 지침이 곧 감정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을 수 없던 이유는 단순했다. 너를 포기하면 마치 내가 잃어버린 계절이 하나 생겨버릴 것 같았다. 봄을 경험하지 못한 겨울이 된 것처럼. 꽃 한 송이 피지 않고 지나가버린 해처럼. 너는 내 마음속에서 그런 존재였다. 현실에서는 손끝조차 닿지 않는 거리였지만, 마음속에서는 항상 가장 안쪽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너는 그곳에 앉아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지만, 그 침묵마저도 내겐 충분한 존재감이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너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사랑한다는 감정은 늘 나를 움직였고, 그 움직임 속에서 나는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네가 아닌 내가 더 중심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는 꽤 오래 걸렸다. 너를 향해 뻗은 감정이 사실은 나를 버티게 하던 기둥이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마음 한 곳이 따뜻하게 저려왔다. 네가 몰랐던 내 마음이 아니라, 나조차 몰랐던 나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짝사랑이 길들여지면, 사람은 결국 자신을 잃기도 한다. 너에게 맞추느라 내 마음의 결을 잊어버리고, 네가 좋아했을 것 같은 모습만 남기려 애쓰고, 결국엔 내 진짜 얼굴이 흐려진다. 너의 시선이 멈추지도 않았던 곳을 위해 꾸준히 존재를 깎아내는 일. 그리고 그 일을 오랫동안 ‘사랑’이라 착각하곤 했다. 이제야 알겠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응답 없는 기다림에 익숙해진 마음의 버릇’이었다는 것을. 그 버릇이 너무 단단해져 어느 순간부터는 떼어낼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느 비 오는 저녁, 우산을 접으며 문득 생각했다. 나는 왜 너를 이렇게 오래 품고 있었을까. 그 이유를 찾으려고 애써보니, 정작 명확한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단 하나, 아주 단순한 사실만이 조용히 속삭였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순간, 나는 나의 한 조각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지도, 완전히 떠나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그 자리가 편해서가 아니라, 그 자리가 이미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익숙함은 때로 사랑보다 더 강력한 감옥이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감정은 스스로 결론을 내린다. 짝사랑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끝나지 않고 버틸 수는 있어도, 계속해서 뜨겁게 타오르진 않는다. 불꽃이 잦아들면 남는 건 저녁 공기 속의 온기뿐이고, 그 온기가 사라지면 자리에 남는 건 조용한 재다. 나는 그 재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여전히 미련이 남아 있었지만, 그 미련마저도 조금씩 흩어지는 게 느껴졌다. 마음속 공간이 서서히 비워지는 감각. 그 빈자리에 처음으로 내가 들어설 수 있었다.

길들여진 짝사랑은 결국 한 사람을 향한 고백이 아니라, ‘내 마음이 견딜 수 있는 깊이’를 배우는 과정이었다. 너를 좋아한 시간은 나를 지치게도 했지만, 동시에 단단하게 만들었다. 내 감정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지, 그리고 결국 어디까지가 나의 한계인지. 나는 너를 통해 그 모든 것을 배웠다. 사랑을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사랑하는 법을 제대로 배운 셈이었다.

이제야 말할 수 있다.
잘 가라, 길들여진 짝사랑이여.
너를 보내는 일이 슬프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너를 보낸 자리에서 이제야 비로소 내가 선다.
네가 떠난 자리는 공허가 아니라, 내가 나를 다시 품을 공간이다.
나는 그곳에서 비로소 나를 사랑하는 법을 시작한다.

그러니, 잘 가라.
오랫동안 나를 흔들어놓고, 동시에 나를 붙잡아주었던 감정이여.
네가 사라져도 나는 괜찮다.
왜냐하면 나는 너를 잃은 것이 아니라, 나를 되찾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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