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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꿈 단편집

골목 끝에서 들려온 고백

두 계절 사이에서

by Helia

밤새 뒤척이던 마음이 꿈의 문을 열었다. 천장이 희미하게 흔들리더니, 어느새 나는 포장마차의 주황빛 아래 앉아 있었다. 김이 피어오르는 국물 냄새, 어둑한 천막 아래 눅진하게 달라붙은 사람들의 목소리, 그리고 내 앞에 마주 앉은 두 남자. 한 사람은 오래 알고 지낸 소꿉친구 같았고, 다른 한 사람은 최근에 알게 된 듯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시선이 가는 얼굴이었다. 둘은 서로를 처음 본 것처럼 굳어 있었지만, 내 주변에 오래 머물기 위해 이미 여러 번 맞붙어온 사람들처럼 침묵 속의 신경전이 치열했다.

오래 알고 지낸 듯한 그는 잔을 조용히 내려놓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오랜 시간 쌓인 온기가 묻어 있었다. 편안한 기척, 예측 가능한 안정,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은 묵묵함. 마치 마음 깊은 곳, 가장 오래된 서랍 속에서 오랫동안 묻혀 있던 편지를 다시 꺼내 보는 느낌. 그가 웃을 때마다, 잊고 지낸 어떤 따뜻함이 내 어깨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반면 최근에 알게 된 듯한 남자는 조금 더 낯선 빛을 띠었다. 눈빛은 빠르게 움직였고, 표정의 결은 읽기 어려웠다. 서늘한 듯 따스하고, 장난스러운 듯 진지했다. 그의 존재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 같았다. 아직 이름 붙일 수 없지만 자꾸만 손을 뻗게 되는 계절처럼. 오래된 친구가 내 마음의 뿌리라면, 그는 아직 꽃이 피지 않은 새 가지였다.

두 사람의 침묵은 오히려 말보다 뜨거웠다. 포장마차 안의 조명은 세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비추며 긴장의 파동을 만들었다. 술잔 가장자리에서 반짝이는 작은 물방울조차도 두 남자의 경쟁처럼 보였다. 나는 잔을 들고 입술에 가져갔지만, 술맛보다 시선의 무게가 먼저 느껴졌다. 둘 다 나를 본다. 한 사람은 오래도록 지켜봤다는 든든함으로, 다른 한 사람은 이제 막 알아가고 싶은 설렘으로.

그 순간 아무 말이 없어도 ‘내가 중심에 있다’는 감각이 고요하게 퍼졌다. 누군가에게 선택받는 게 아니라, 내가 누군가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 깊은 곳에서 작은 불씨가 피어오르는 느낌. 꿈은 종종 현실에서 잊고 있던 내 모습을 과하게 비추곤 한다. 그 과함이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술자리가 끝난 뒤, 우리는 셋이 나란히 포장마차를 나섰다. 천막을 나서는 순간 바람이 얼굴을 스쳤고, 골목은 흐릿한 주황빛 가로등 아래 고요하게 젖어 있었다. 셋이 걷는 사이사이, 소리 없는 경쟁이 여전히 따라오고 있었다. 둘은 나를 가운데 두고 걸었고, 나는 비틀거리며 앞장서다 순간 발목이 삐끗했다. 몸이 앞으로 기우는 순간, 양옆의 손이 동시에 나를 붙잡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이 정확히 같은 타이밍으로 내 팔을 잡았다. 마치 내 몸이 바닥에 닿기 전에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 두 사람의 반응은 똑같았다.

순간 골목이 잠시 멎은 것 같았다. 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균형을 잡았다. 양쪽에서 전해진 온도가 다르게 느껴졌다. 한쪽은 오래된 체온, 다른 한쪽은 막 피어난 온기. 두 손이 동시에 나를 붙잡았을 뿐인데, 그 짧은 순간에 나는 두 개의 마음 사이로 가늘게 찢기는 듯한 기묘한 울림을 느꼈다.

그리고 이어진 건 더 기이한 장면이었다. 내가 다시 서자마자 한 남자가 무릎을 확 굽히더니 넓은 등을 내밀었다.
“업어.”
단호한 목소리였다. 오랜 친구 같은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자리를 주장하듯 등을 보였다.

그러나 그보다 늦지 않게, 다른 남자도 바로 반대 방향에서 무릎을 굽히며 등을 내밀었다.
“나한테 업혀.”
두 사람의 표정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다. 서로가 지지 않겠다는 의지, 누군가에게 선택받고 싶은 욕망이 한 번도 숨기지 않은 채 드러났다.

그 넓은 두 등 사이에서 나는 잠시 숨을 고르듯 멈췄다. 골목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두 사람의 등에서 피어오르는 체온이 날 둘러싸는 것 같았다. 등 하나를 고른다는 건 어느 한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꿈속의 나는 고민하지 않았다. 몸은 스스로 길을 찾았다. 나는 먼저 등을 내민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몸을 맡겼다.

등 위에 업히는 순간, 들리는 한숨 같은 숨결.
“너 진짜 가볍다. 밥 좀 먹어.”
잔소리인지 걱정인지 모를 말투로 나를 부축하던 그는 내 다리를 단단히 받쳤다.
“살 좀 찌워라. 이렇게 가벼워서 어디 다니니.”
그러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골목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할 때까지 그는 말없이 걸었다.

반대편에서 등을 내밀었던 남자는 잠시 멈춰 서 있었다. 씁쓸한 표정이었지만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약 사 올게. 기다려.”
그 말만 남기고 그는 골목 어딘가로 뛰어갔다. 뒷모습이 빠르게 멀어졌다. 고개를 돌린 그의 어깨선에 아쉬움이 가득 묻어 있었고, 약을 사러 가는 발걸음에는 어쩌지 못한 마음이 실려 있었다. 선택받지 못한 마음의 무게가 발 뒤꿈치에 걸려 끌리는 듯했다.

등 위에서 나는 다리를 조심스레 고쳐 들었다. 그 순간 그의 손이 나를 더 단단히 감싸며 말했다.
“괜찮아? 많이 아프진 않아?”
그의 말투는 잔소리 같았지만, 그 속에는 오래된 마음의 뜨거운 결이 있었다.

골목은 조용했고, 그 조용함 속에서 내 심장 소리가 등과 등에 얇게 닿았다. 등 위로 전해지는 그의 체온은 낮은 불빛처럼 은근히 따뜻했다. 걸음이 흔들릴 때마다 그의 팔이 더 깊이 나를 감싸왔고, 그 사이사이에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미세하게 뒤섞여 나를 스쳤다.

그러다, 갑자기 그가 멈춰 섰다.
작게 떨리는 숨이 들렸다.
“있잖아.”

골목의 어둠이 더 깊어지는 순간, 그의 목소리가 아주 낮게 이어졌다.
“… 나, 너 좋아해.”

그 말은 골목의 바람도 멈게 할 만큼 조용했고, 그래서 더 컸다. 등 위에서 나는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그의 고백은 꿈이라는 장막을 뚫고 현실의 심장까지 울리는 것처럼 생생했고, 오래된 친구 같은 온기가 이 순간에서 처음으로 다른 결을 드러냈다.

꿈은 그 고백과 함께 흐릿해졌다. 골목의 불빛이 멀어지고, 그의 등 위의 체온이 손끝에서 희미해졌다. 눈을 뜨자 이불 위에 누워 있었다. 새벽 공기는 차갑고, 방 안은 너무 조용했다. 하지만 내 몸은 아직도 누군가의 등에 업혀 있었던 듯 가벼운 흔들림을 가지고 있었다.

꿈은 아무런 답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내 안의 두 감정이 서로를 밀치며, 또 끌어당기며, 오래된 마음과 새로움을 동시에 향해 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고백의 마지막 잔향만이 아침까지 희미하게 따라왔다. 그날의 등, 그 골목, 그리고 두 사람의 숨결. 그 모든 것이 현실처럼 선명했지만, 결국 꿈이었다. 그러나 꿈이라서 더 솔직할 수 있었던 감정들이 있었다.

나는 그런 마음을 천천히 품은 채 이불을 당겼다. 오늘은 아마 조금 다르게 시작될 것 같았다. 꿈속에서 누군가에게 업혀 골목을 지나던 나는, 현실에서도 누군가의 마음을 가볍게 흔들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잠시나마 믿고 싶어졌다.
그 믿음이 오늘 하루를 어딘가 모르게 따뜻하게 만들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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