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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공백은 어찌 이리도 쓸쓸하십니까

말하지 못한 마음의 자리

by Helia

지극히 개인적인 고백처럼 들린다면 미안하오. 그러나 나는 정말로 묻고 싶었다. 당신의 공백은 어찌 이리 쓸쓸하십니까. 마치 말끝을 흐리고 돌아선 뒤에도 오래 남는 그 잔향처럼, 한 번 스쳤을 뿐인데 쉽게 잊히지 않는 바람처럼. 당신에게 스며 있는 공백은 단순한 빈칸이 아니었다. 손끝에 닿으면 저며오는 서늘한 감정, 한 번 바라보면 떨쳐내기 힘든 그늘, 오래된 골목의 휘어진 표지판 같은 처연함이 있었다. 말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넘기면서도, 당신의 눈빛 깊숙한 곳에서 오래 눌린 흔적이 번져 나왔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당신의 말보다 당신의 침묵을 더 듣게 되었다. 아무 말도 꺼내지 않는 그 순간에 오히려 많은 이야기들이 엉켜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종종 입술로 말하지 못한 것을 어깨로 말한다. 당신의 어깨엔 늘 한 줌의 피로가 얹혀 있었고, 무심한 듯 걷는 걸음에서도 오래된 무게의 자취가 묻어났다. 익숙한 얼굴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어딘가 반 발짝 멀리 서 있던 당신. 그 모습은 남을 배려하기 위해 뒤로 물러선 자세 같기도 하고, 혼자 있어야만 숨을 쉬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기이하게도 당신의 공백은 아무도 없는 방이 아니라, 너무 많은 사람이 스쳐 지나간 자리처럼 느껴졌다. 누군가는 머무르고, 누군가는 떠나고, 또 누군가는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 빈방. 오래 닫혀 있던 책장의 냄새 같은 것들이 당신의 공백에서 은은히 영기처럼 떠올랐다. 그 향은 따뜻함과 쓸쓸함이 동시에 배어 있었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되레 조심스러워졌다. 무언가를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고, 너무 깊이 들여다보면 당신이 흩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 있었다.

나는 문득 고민했다. 당신에게 공백은 무엇일까. 잃어버린 시간일까, 놓쳐버린 사람일까, 말하지 못한 후회일까. 아니면 단순히 오래된 상처가 굳어버린 자리일까. 하지만 곧 깨달았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 공백이 당신의 감정 전체를 가릴 만큼 크게 자라났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당신은 그 공백을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설명은 종종 마음의 문을 연다는 뜻인데, 당신은 문 뒤에 스스로를 가두는 쪽을 더 익숙해한 듯했다. 스스로를 가두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을 보호하려는 사람들이다. 그 보호의 습관은 오랜 상처에서 비롯된다는 걸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한 번은 당신의 등을 바라본 적이 있다. 비 오는 초저녁, 우산도 없이 빗속을 걷던 당신의 모습은 이상하게도 눈에 밟혔다.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보다 더 먼저 떨어지는 건 당신의 무언가였다고, 나는 그렇게 느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당신의 고독이 빗소리보다 더 선명하게 들렸다. 거기에 어떤 감정을 끼워 넣어도 어색하지 않은, 말 그대로 완벽한 공백. 비어 있지만, 동시에 너무 많은 감정이 소용돌이치며 남겨진 자리.

나는 곧 깨달았다. 당신의 공백은 ‘함께한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해진 적 없는 감정이 너무 많아서’ 쓸쓸한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한 번도 자신을 온전히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적 없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생각보다 에너지를 많이 쓰는 일이라, 대부분은 귀찮거나 무겁다고 뒤로 물러난다. 그래서 당신은 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말해도 이해받을 수 없을까 두려워서, 혹은 괜히 마음을 들켰다가 또다시 다칠까 봐서. 그래서 당신의 공백은 쓸쓸하다.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들여보낼 문을 너무 오랫동안 닫아두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공백이 죄는 아니다. 빈자리를 가진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조심스러워지고, 한번 다친 마음은 쉽게 열리지 않기 마련이다. 오히려 나는 그 공백 속에서 당신의 강인함을 본다. 버텨온 시간의 두께, 침묵 속에 묻힌 인내의 결, 말하지 않고 넘어간 수많은 밤들이 당신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공백은 당신이 살아남기 위해 치른 대가일 것이다. 상처 없이 살아온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그 상처가 당신을 더 조용한 사람으로 만들었을 뿐.

그러나 나는 바란다. 당신의 공백이 언젠가 조금은 밝아지기를. 누군가가 당신의 침묵을 억지로 열지 않더라도, 당신의 마음이 스스로 문을 조금이라도 열어젖히길.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지만, 누구든 당신이 덜 외로워지기를 바라는 순간들이 있다. 그 순간이 지금이기를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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