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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꿈 단편집

가본 적 없는 곳이 자꾸 꿈에 나타난다면

마음이 먼저 기억한 풍경

by Helia

가본 적도 없는 스키장이, 내 꿈에서는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실에서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스키를, 꿈속의 나는 마치 오래전부터 연습해 온 사람처럼 능숙하게 탄다. 몸이 기억하지 못한 동작을 마음이 먼저 재현해 내는 건지, 혹은 마음속 어딘가에 이미 존재하는 또 다른 ‘나’가 잠들어 있다 깨어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눈 덮인 경사 위에서 나는 언제나 흔들림 없이 서 있었다.

이상한 건 그 시작이다. 눈이 부신 게 아니라 익숙한 풍경처럼 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먼저 찾아온다. 스키장에 가본 적이 없는데도, 마치 어린 시절 수없이 미끄러지던 썰매장의 잔향이 모양을 바꿔 나타난 듯하다. 내가 기억하는 건 고작 오래된 플라스틱 썰매와 차갑게 스며오던 겨울바람인데, 꿈은 그 경험 위에 더 넓고 부드러운 하얀 세계를 덧칠한다. 꿈이라는 붓질이 현실의 빈 공간을 채워서, 내가 살아본 적 없는 풍경을 그럴듯하게 만들고 마는 것이다.

그곳엔 늘 ‘그들’이 있었다.
얼굴은 또렷한데 이름은 흐릿하다. 실존하는 사람도, 기억 속에만 남은 사람도, 아직 오지 않은 인연도 뒤섞여 있는 듯한 느낌. 그들은 스키장이라는 낯선 장소에서 내 옆을 스치고, 웃고, 장난치고, 멀어졌다가 다시 돌아온다. 현실에서는 함께한 적 없는 사람들인데, 꿈속에서는 마치 늘 같은 계절을 함께 보낸 사이처럼 편안했다.

스키는 그들과 나를 이어주는 실처럼 보였다.
우리는 함께 내려가고, 함께 넘어질 듯 흔들리다가도 비슷한 속도로 눈 위를 미끄러졌다. 서로를 앞지르며 장난을 치다가도 어느 순간 다시 나란히 섰다. 그들의 웃음은 눈 표면처럼 반짝였다. 바람에 실려서는 금방 사라질 듯한데, 또 어느 순간 바로 옆에서 이어졌다. 이런 장면이 반복될수록, 꿈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흐릿해지고 현실 같은 질감이 생겨났다.

속도가 너무 빨라질 때도 있었다.
현실이었다면 겁에 질려 브레이크조차 제대로 못 잡았을 텐데, 꿈속의 나는 오히려 그 미끄러짐을 즐겼다. 마치 삶에서 놓치고 지났던 것들이 눈길 위에서 다시 다가오는 듯한 묘한 해방감. 통제할 수 없는 순간이 다가와도 이상하게 두렵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였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앞에서, 누군가는 뒤에서, 또 누군가는 옆에서 나를 지키듯 같이 흘렀다. 마치 마음이 만들어낸 ‘안전지대’가 인물의 얼굴을 빌려 나타난 것처럼.

때로는 그들이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는 듯했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표정만이 눈부신 햇빛 아래 선명하게 떠올랐다. ‘괜찮아’라고 말하는 얼굴. ‘같이 가자’고 웃는 얼굴. 현실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인데, 꿈에서는 익숙하고 그리운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비현실적인데도 어딘가에서 확실히 알고 있던 감정의 형태였다.

어린 날 가던 썰매장이 떠오른 건 그 때문이었다.
내가 발을 디딘 눈밭의 감각이 그 시절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겨울이면 늘 있는 놀이터의 언덕, 찬 바람, 손끝이 얼어붙던 감촉, 누군가의 손을 잡고 내려가던 순간. 그 조각들이 꿈속에서 더 크고 부드러운 스키장으로 변형되어 나타난 것일지도 모른다. 마음은 기억을 재료로 삼아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그리고 그 새로운 세계에서 나는 현실에서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동작으로 날아다녔다.

꿈속의 스키장은 나에게 “내가 아직 가보지 않은 세계로 향하는 감정의 속도” 같았다.
현실에서는 두려워 멈춰 섰던 길도, 꿈에서는 누구보다 가볍게 내려갈 수 있었다. 그들과 함께라면, 미끄러지는 순간조차 위험이 아니라 자유였다. 삶에서 늘 조심스레 딛던 한 발이, 꿈에서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속도를 높였다.

그러다 문득, 꿈이 꿈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들은 여전히 웃고 있었고, 나는 그들 속에서 여유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마음 한쪽에서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왜 이곳을 한 번도 실제로 가보지 못했을까?’
‘왜 꿈은 나를 이곳으로 자꾸 데려오는 걸까?’

그 답을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아마도 내 마음이 먼저 도착해 있는 장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보다 내면이 앞서서 그 풍경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가보지 않았어도, 경험한 적 없어도, 마음이 먼저 체험한 감정의 세계.
스키장은 내가 잊고 살았던 나의 속도, 나의 용기, 나의 여유를 꿈이 대신 보여주는 무대였다.

눈은 계속 흩날렸고, 우리는 끝없이 웃었다.
스키의 날이 눈을 가르며 지나갈 때마다 가느다란 빛이 튀었고, 부서지는 소리는 마치 오래된 기억이 깨어나는 순간처럼 아련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났고, 넘어질 줄 알면서도 웃으며 속도를 높였다. 뒤를 돌아보면 그들이 있었다. 나를 확인하는 눈, 나를 따라오는 속도, 나를 기다려주는 마음.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이상하게 공기가 가벼웠다.
현실의 방 안이 아닌, 아직 어딘가에서 눈을 밟고 있는 기분이었다.
스키를 탄 적 없는 내가 왜 이렇게 능숙했나 생각하다가, 문득 알 것 같았다.
그곳은 단순한 겨울 풍경이 아니라,
내가 마음속에서 이미 수없이 지나온 길,
내가 아직 가보지 않은 세계이면서도 어쩌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자리.

그래서 꿈은 나를 그곳으로 데려간다.
스키를 타지 않아도 스키를 알고 있고,
가보지 않아도 그곳을 기억하고,
만난 적 없는 사람들과도 함께 웃을 수 있는 곳.

그곳은 아마,
내 마음이 먼저 도착해 있던 세계의 한 장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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