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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사라지는 마음의 토끼

by Helia

그 목소리는 말랑숲의 어떤 동물도 아니었어요. 너무 가늘고, 너무 약하고, 너무 멀리서 오래 울다 겨우 남은 잔향 같았어요. 제 손 안의 은빛 조각은 아주 작은 금을 내며 흔들렸고, 그 흔들림은 제 심장까지 전해져 손끝을 얼게 했어요. 저는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고 문 앞의 텅 빈 색을 바라보았어요. 숲의 색도 아니고, 밤의 색도 아니고, 그저 ‘사라지는 무언가’의 색이었어요.

“어디 있어…?” 제 목소리는 방금보다 더 낮고 떨렸어요. 그러자 어둠 속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작은 발끝 하나가 문턱을 더듬듯 내밀어졌어요. 마치 나올 용기를 몇 번이나 잃었다가, 겨우 한 번만 다시 낸 것처럼요.

첫 번째로 보인 건 털빛이었어요. 은빛. 마음 조각의 빛과 너무나 닮은, 희미한 새벽색. 그리고 그다음에 보인 건… 떨리는 두 귀였어요. 매우 길고, 매우 가늘고, 작은 바람에도 움찔할 것 같은 귀. 그 순간 저는 알았어요. 그 아이는 아기 토끼였어요. 말랑숲 동물들 중 가장 겁이 많고, 작은 소리에도 가슴이 먼저 덜컥하는 존재. 토끼는 마음이 쉽게 흔들리고 찢어지는 아이들이었어요. 하지만… 제 눈앞의 아이는 단순히 흔들린 게 아니었어요. 마치 오랫동안 방치된 조각처럼 색을 잃고 있었어요.

아이의 눈동자가 천천히 드러났어요. 너무 커서, 너무 흔들려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했어요. 눈물은 이미 말라 은빛 자국이 되어 털 위에 굳어 있었어요. 아이는 제 눈을 잠깐 보다가 바로 시선을 떨구었어요. 작은 어깨가 들썩였고, 떨림이 발끝까지 번져 있었어요. 저는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어 토끼의 귀 끝을 만졌어요. 따뜻해도 될 귀가 차갑게 식어 있었어요.

“… 미안해요…” 아이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제가… 너무 많이… 떨어뜨렸어요…”
말이 끝나자 아이 가슴에서 또 하나의 조각이 또르르 굴러 나왔어요. 이번 조각은 텅 비어 있었어요. 감정의 가장자리조차 남아 있지 않았어요. 마치 마음이 아니라 ‘기억의 빈 껍질’만 바닥에 떨어진 것 같았어요. 저는 조각에 손을 대기도 전에 아이를 먼저 안았어요. 너무 가벼워서, 너무 떨려서, 너무 어두워서—제 품의 고요를 아이가 전부 흘려보낼 정도였어요.

“괜찮아. 네 잘못 아니야.” 저는 토끼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어요. “조각을 떨어뜨린 건… 네가 오래 혼자 아팠다는 뜻이야. 너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야.”
그 말을 들었는지 아이의 귀가 아주 조금, 아주 약하게 기울어졌어요. 하지만 목소리는 금방 부서질 것 같았어요. “근데… 날 보면 다들… 무섭대요. 색이 이상하다고… 몸이 투명해지는 것 같다고…” 아이의 말은 흐느낌에 닿기 직전이었어요. “저… 사라지는 거 맞나요…?”

저는 아이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올렸어요. “사라지지 않게 하려고 내가 있는 거야. 너는 지금… 꿰매야 하는 마음일 뿐이야.”
그 순간, 아이의 눈동자 안에서 아주 미세한 빛이 흔들렸어요. 슬픔 속에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연약한 희망의 흔적처럼요.

하지만 그때였어요.
문 밖의 텅 빈 색이, 갑자기 파르르 떨렸어요. 한순간 희미한 파동이 방 안으로 밀려왔고, 제 등줄기가 서늘하게 굳었어요. 루루는 제 옆구리에 바짝 붙었고, 쿠쿠는 제 앞치마를 세게 잡았어요. 모두가 동시에 어떤 기척을 느낀 거예요.

그리고—
문틈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어요.

“…그 아이를… 지켜줘.”

이번엔 단순한 속삭임이 아니었어요. 누군가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말한 듯한, 그러나 실체가 없는 목소리. 낮지도, 높지도 않지만 오래된 비에 젖어 있는 듯한 목소리. 저는 본능적으로 토끼를 더 꽉 안았어요.

“누구야…?” 제가 조심스럽게 묻자, 텅 빈 색은 대답 대신 아주 짧게 흔들렸어요. 마치 말을 하려다 삼킨 것처럼요.
그 순간, 제 손안에 있던 은빛 조각의 금이 조금 더 벌어졌어요. 마치 조각이 ‘숨을 쉬는’ 것처럼.
토끼가 제 품에서 떨며 속삭였어요. “저… 저 목소리… 알아요… 한 번… 들은 적 있어요…”

그 말에 제 심장이 멈췄어요.
그리고 저는 깨달았어요.
토끼의 마음이 사라지고 있는 건 단순한 아픔이 아니라—
누군가가 이 아이의 마음을 ‘부르고’ 있다는 신호라는 걸.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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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되지 못한 마음을 글로 쌓습니다. 기억과 계절, 감정의 결을 따라 걷는 이야기꾼. 햇살 아래 조용히 피어난 문장을 사랑합니다." 주말은 쉬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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