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흔들리는 현실의 결

그 이름.
이헌.
그가 남긴 흔적 하나하나가
해윤을 어디론가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끌림은 새벽이 지나자 더욱 선명해졌다.
해윤은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눈을 감으면 그 목소리가 들렸고,
눈을 뜨면 벽의 낙서가 떠올랐고,
꿈과 현실의 경계는 얇게 흔들렸다.

그렇게 밤을 넘겨 출근한 회사는 여느 때처럼 시끄러웠다.
전화벨, 키보드 소리, 팀장의 날카로운 지시가 뒤섞인
광고회사 특유의 정신없는 공기.
평소라면 익숙했겠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모든 소리가 희미하게 멀게 느껴졌다.

“해윤 씨, GA 광고 음성 가이드 파일 들어왔어. 확인해 줘.”
팀장이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해윤은 머리를 짚으며 헤드셋을 썼다.

익숙한 목소리.
광고 모델의 명확하고 단정한 톤.
그 뒤에, 기계가 섞어 넣은 BGM.
여기까지는 평범했다.

그런데—
파일 4번을 재생하자마자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겹쳐 들어왔다.

——“… 해윤.”

순간, 숨이 턱 막혔다.
해윤은 반사적으로 헤드셋을 벗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누구도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파일을 다시 재생해도
그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 환청이었나.”
해윤은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심장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아까 들린 목소리는
새벽에 들렸던 그 목소리와
완전히 같았다.

AI 스피커가 가방 속에서 미세하게 진동했다.
회사라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알 수 없는 에러음이 계속 울렸다.

왜 회사까지 따라오는 거야…
이건… 일상에 침투하려는 건가?

기억은 없는데
감정이 너무 선명한 그 이름.
그 남자.

해윤은 손끝을 말아쥐었다.
심장이 조여들어 아플 정도로.

점심시간이 되자
해윤은 혼자 옥상으로 올라갔다.
찬 바람이 불었지만,
오히려 그 바람에 숨이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하지만 그 평온도 오래가지 못했다.

휴대폰 화면이 갑자기 흔들렸다.
전혀 눌러지지 않은 상태에서
알림이 하나 떴다.

[녹음 파일 재생 중…]

“녹음한 적 없는데…”
해윤은 화면을 눌렀다.

그리고 들렸다.

——“기억해.”
——“시간이… 곧—”
——“… 해윤.”

목소리는 끊겼다가 이어졌고,
마치 오래된 전파로부터 전달되는 것처럼 왜곡되었다.
그러나, 누가 들어도 명확했다.

이헌의 목소리였다.

해윤은 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이… 이게 어떻게…”

AI 없이는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이제는 휴대폰에까지 침투하는 건가.

그때,
갑자기 옥상 난간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바람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의 몸 전체에서도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AI 스피커가 가방 안에서 진동하며 깜빡거렸다.

“시간 간섭 증가—
기억 파동 활성화—
해윤님, 부디—”

기계음이 절반은 잘렸고
말도 되지 않는 잡음이 섞였다.

그러자 또다시
짧지만 선명한 기억의 파편이 번쩍했다.

캄캄한 밤.
누군가가 해윤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며 말했다.

“해윤아, 널 다시 잃지 않을 거야.”

그 목소리는
꿈속 목소리와 완벽히 같았다.

해윤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숨을 몰아쉬었다.

“왜…
대체 왜…
이 사람이 나한테…”

그때—
바람이 한 번 크게 스쳐 지나갔다.
귀 뒤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그리고
바람 속에서 들려왔다.

꿈보다 더 가깝고,
새벽보다 더 선명하고,
녹음 파일보다 더 뚜렷한 목소리.

“… 해윤.”

해윤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난간 너머
햇빛과 그늘이 교차하는 곳에
사람 그림자가 서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존재가 누구인지
심장은 이미 알고 있었다.

“돌아와.”
그 목소리가 말했다.

해윤의 호흡이 멎었다.

그리고 그녀의 세계는
예고 없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