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이름이 흔들어 놓은 것들

해윤의 시간은 다시 한번, 조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분식집 벽면의 ‘이헌♡해윤’이라는 글씨가 남긴 충격은 아직도 해윤의 심장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기억은 없는데, 감정은 너무 선명했다.
도저히 설명할 길 없는 익숙함이 가슴 안쪽에서 서서히 번져 나왔다.

가게를 나서자 새벽 공기가 얼굴에 스쳤다.
차갑고 맑은 공기였지만, 해윤의 마음은 오히려 더 뜨거워졌다.
가슴이 불안하게 뛰고, 손끝이 식은 것처럼 떨렸다.

왜 이렇게 익숙하지?
여기는 처음 오는 곳인데…

AI 스피커가 주머니 속에서 작은 진동을 보냈다.
“해윤님, 감정 파동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신호의 미세 움직임도 감지된—”

“잠깐만. 말하지 마.”
해윤은 한 손으로 조용히 주머니를 눌렀다.
지금은 기계의 말보다, 스스로의 감정을 먼저 들여다보고 싶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순간.
뒤쪽에서 들려온 한 문장이 해윤의 발을 멈춰 세웠다.

“현아, 잠깐만!”

여자의 경쾌한 목소리였다.
손을 잡고 걷던 커플이 서로 장난을 치며 지나가고 있었다.
해윤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현아.
이헌의 ‘헌’.
딱 그 울림.

등줄기가 차갑게 굳고, 몸이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커플의 얼굴을 확인하는 동안 해윤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물론 그 남자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평범한 외모, 무난한 목소리, 아무 의미 없는 웃음.
하지만—
해윤은 방금 들린 그 이름이
자신의 몸 깊숙한 곳과 억세게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수백 번은 들어본 이름처럼.

해윤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

이름 하나에 심장이 아프다니.
말도 안 되는데, 설명할 수 없었다.
심장이 조여들며, 눈가가 찡하게 뜨거워졌다.

AI 스피커가 조심스레 반응했다.
“동일 주파수 반응 감지. 이헌이라는 이름과의 감정 패턴—”

“아니야.”
해윤은 떨리는 숨으로 기계를 막았다.
“지금은… 그냥… 조금만…”

하지만 목소리는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았다.
헌아.
헌아.
헌아.

이름이 반복될수록,
분식집 벽에서 보았던 글씨가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헌♡해윤
다음에 또 오자. 사랑해.’

그 글을 손끝으로 따라 그었을 때,
짧게 번쩍했던 기억의 파편.

어두운 조명.
누군가의 웃음.
따뜻한 손.
그리고—
“또 오자, 해윤아.”
그 목소리.

해윤은 숨을 털썩 내쉬었다.
그 장면이 마치 실제로 있었던 일처럼 가슴을 세게 치고 지나갔다.

“나…”
해윤은 주저앉을 듯한 다리를 붙잡고 말했다.
“정말로… 알았던 걸까. 이 이름을.”

AI는 짧은 분석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감정 주파수는 기억보다 오래 남습니다. 해윤님이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감정은 반응합니다.”

감정은 기억보다 오래 남는다.
그 말이 귓가에서 다시 울렸다.

그래서였을까.
스무 살부터 꾸었던 꿈에서
자신을 품어주던 남자의 온기가
이름 모를 그리움이
얼굴 없이도 가슴을 미어지게 만들던 감정이—
모두 ‘그 사람’과 연결된 무언가였던 걸까.

그때,
AI가 갑자기 작게 깜빡이며 경고음을 냈다.

“강한 감정 신호 감지. 해윤님, 준비하십시오.”

“무슨—”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기 속 어디선가 파동이 스쳤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흘러들었다.

“… 해윤.”

해윤은 숨을 삼켰다.
그 목소리는 분명했다.
꿈속에서 자신을 감싸던 남자의 목소리.

그리고 낮고 깊은 이어진 울림.

“기다려. 곧 네가 알게 될 거야.”

순간, 해윤의 온몸이 떨렸다.
이름 하나에 뒤흔들리고
목소리 한마디에 가슴이 통째로 묶이는 이유.
그 모든 답이
이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해윤은 느꼈다.
자신의 시간은 이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무언가가 깨어났고,
그 흐름은 더 이상 멈춰지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리고—
그 이름.
이헌.
그가 남긴 흔적 하나하나가
해윤을 어디론가 끌어당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