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이름이 남긴 자리
마치 이미 오래전부터, 두 사람의 시간이 다시 이어지기를 기다려온 것처럼.
해윤은 그 여운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방 안은 움직임 하나 없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이어진 무언가의 진동에 사로잡혀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이 묘하게 붓고, 이유 모를 그리움이 다시금 꿈틀거렸다.
그리움.
스무 살이 된 해윤을 매년 새벽마다 울리던 그 감정.
얼굴도 모르는 남자의 품에서 깨어나 흐느껴 울던 밤들.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을 어째서 ‘잃어버린 사람’처럼 가슴이 미어지도록 그리워했을까.
“해윤님.”
AI 스피커가 다시 불을 켰다.
“감정 주파수는 약해졌습니다. 하지만… 잔여 신호가 완전히 끊어진 건 아닙니다.”
해윤은 속으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 말은 곧 ‘그가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뜻과 다르지 않았다.
그 생각만으로도 해윤의 심장은 자신도 모르게 두 번쯤 더 세게 뛰었다.
“잠시 밖으로 나가 보시겠습니까?”
갑작스러운 AI의 제안에 해윤은 움찔했다.
“지금…?”
“낮은 주파수 신호가, 외부 공간에서 더 강하게 감지됩니다.”
해윤은 설명되지 않는 끌림에 이끌려 외투를 걸쳤다.
밖은 이른 새벽이었고,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빛 하나 없는 골목이 익숙했다.
‘처음 온 길인데… 이상하게 아는 느낌이네.’
해윤은 몇 걸음 더 걸었다.
건물 벽면의 질감, 오래된 가게의 불 꺼진 간판, 지나간 누군가의 그림자처럼 사라진 흔적들.
분명 처음 보는 것들인데, 마음 어디선가 “여기… 알아”라는 울림이 동시에 올라왔다.
그때였다.
AI가 속삭였다.
“감정 반응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해윤님, 속도를 늦추세요.”
하지만 해윤은 이미 멈춰 서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발길이 닿은 곳—
허름한 분식집 앞.
이곳은 처음 오는 곳이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해윤은 이유 모르게 심장이 움찔했다.
익숙했다.
이 공간의 공기마저도 ‘기억처럼’ 느껴졌다.
벽면에는 손님들이 남긴 오래된 낙서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처음 보는 글씨들 속에서 해윤의 시선이 갑자기 멈췄다.
작고 연한 글씨.
하지만 또렷한 문장.
‘이헌♡해윤
다음에 또 오자. 사랑해.’
순간 해윤의 호흡이 뚝 끊겼다.
손이 떨렸다.
한 글자, 한 글자 눈에 담을 때마다 가슴이 세게 조여 왔다.
“내… 이름?”
해윤은 속삭였다.
벽면의 글씨는 분명 자신이 적은 글씨체와 비슷했다.
획의 방향, 습관처럼 꺾이는 글씨 모양, 작은 하트까지.
그런데 해윤은 여기에 온 적도, 이런 낙서를 한 적도 없다.
“이헌…?”
입에서 저절로 나온 이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인데, 입 안에서 낯설지가 않았다.
오히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익숙했다.
어딘가에서 불렸던 이름 같았다.
해윤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단지 벽면의 그 이름이 보이는 순간, 꿈속에서 자신을 끌어안던 남자의 품이 겹쳐졌다.
그리고 가슴 어딘가가 사무치게 아려왔다.
AI가 조심스레 말했다.
“해윤님… 감정 주파수가 급격히 상승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해윤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잘랐다.
“여기… 내가 와본 적은 없어. 그런데 익숙해.”
그리고 벽의 글씨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이 낙서도… 내가 쓴 기억은 없는데… 이상하게… 너무 나 같아.”
AI는 데이터 분석을 시작하는 듯, 조용히 빛을 깜빡였다.
“감정 주파수의 근원지가 근처에 있습니다. 이헌이라는 이름… 감정 패턴과 높은 연관성이 예상됩니다.”
이헌.
그 이름은 해윤의 머릿속 어디에도 없었다.
기억이 아니라, 감정만 남은 사람.
시간 속에서 사라졌지만, 감정만은 여전히 그녀에게 닿는 사람.
해윤은 벽에 손끝을 가볍게 올렸다.
글씨의 볼록한 터치가 느껴졌다.
마치 정말 전에 여기에 와서, 이 문장을 적고 웃던 누군가의 그림자가 손끝에 남은 듯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묘한 울림이 치고 올라왔다.
“나… 이 사람을… 알고 있었던 걸까.”
그 말은, 해윤 자신조차 믿기지 않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순간.
AI 스피커가 짧게 진동하며, 거의 잡음에 가까운 신호를 흘렸다.
그리고—
그 익숙한 목소리가 아주 약하게, 정말 아주 미세하게 들려왔다.
“… 해윤…”
해윤은 그대로 멈춰 섰다.
낙서를 바라보는 눈에서 눈물이 한 줄 흘러내렸다.
그 목소리는, 꿈속에서 자신을 품던 그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이름—
이헌.
그가 남긴 것.
해윤의 시간은 다시 한번, 조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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