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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ix Aug 08. 2022

두보와 천천히 걷기

내 마음이 마땅한 곳을 만나니 - 바라캇 서울에서 만난 두보

 나는 걸음이 빠른 편이다. 어디선가 날듯이 걸어서 사라졌다는 구절을 읽고 빨리 걷기 시작했다고 하면 멋있겠지만, 그 보다는 성격이 급한 부모님을 만나 꾸물거리면 호통을 들으며 자라났기 때문에 빠른 걸음을 지니게 되었다. 심폐지구력은 좋지 않지만 근력만큼은 좋아 장시간 빠르게 잘 걸을 수 있다. 동행과 뒷산의 산책로를 걷다보면, 동행이 마치 말 안듣는 힘센 대형견을 산책시키다 지친 견주같은 표정으로 외친다. "제발 천천히 좀 가~!"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듯 다양한 걸음걸이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걸음이 유독 빠른 이들 중에는 필자를 기특해하며 걸음이 빠르다고 칭찬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그러면서 걸음이 유독 느린 다른이를 힐난 한다. 걸음이 빠르기에 나름 편리한 점은 있으나, 우쭐거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걸음이 느려 질책을 받은 이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두보처럼 마음이 마땅한 곳을 만나셨나보군요."


 몇년 전 바라캇 서울에 갔다가 전시관의 벽에 두보의 시 구절이 적혀있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나는 천천히 걷는다. 이 아름다움이 내 마음에 깃들기 바란다."

- 두보 -


그리고 밑에는 영어로 그 구절이 적혀있었다.

"When a place is so lovely I walk slow, I long to let loveliness drown in my soul."

- Du Fu-


 아름다운 구절이나, 한시나 문학에 소양이 없는 나라도 어딘가 이질적인 것을 느꼈다. 아름답고 고요한 곳에서 천천히 정취를 느끼는 그 순간에 함께하는 기분은 든다. 문제는 전시관에 써있는 저 피상적인 문장만으로는 두보가 지은 원문을 찾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당시 바라캇 서울에서는 오너인 파에즈 바라캇의 작품도 전시하고 있었는데, 그의 그림은 둘째치고 명나라 목조 불상에 잭슨 폴록같이 페인트를 흩뿌려둔 "작품"은 동양문화에 대한 모독처럼 느껴졌다. 1층의 우아한 전시관 관리자의 "지하에는 회장님이 계시니 한번 가보시겠어요?"란 권유에 넘어가지 않았으면 파에즈 바라캇과 대화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그런 행운은 나에게 따르지 않았다. 나에게 "회장님"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감상을 물었다. 미술에 문외한인 만큼 비비드한 색감이 맘에 든다거나, 당신의 티벳 불교에 대한 이해가 느껴진다 따위의 피상적인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대충 대화를 끝내고 올라가고 싶었지만, 그는 기대에 찬 얼굴로 더 할 말이 없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도 물었다. "왜 명나라 목조 불상에 전통적인 보존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현대에서 쓰는 페인트를 저렇게 덧씌웠나? 당시에 썼을 법한 옻칠은 현대에서도 재현이 가능했을텐데?" 그는 그 질문에 엄청난 모욕을 당한듯 거칠게 대답했다. "너는 어느 래커 회사에서 나온 거냐?"


 어쨌든 당시의 파에즈 바라캇과의 유쾌하지 않은 사건에도 불구하고, 벽면에 써있던 두보의 시라고 주장한 문장은 아름다웠다. 결국 저 문장이 어떤 시에서 나온 것인지는 수많은 구글링을 통해 찾아낼 수 있었다.


배이금오화하음(陪李金吾花下飮)-두보(杜甫)

이금오와 더불어 꽃나무 아래서 술을 마시다.


勝地初相引(승지초상인) : 경치 좋은 곳으로 처음으로 같이 갔는데

徐行得自娛(서항득자오) : 여유롭게 걸어가니 제풀에 즐거웠다오.

見輕吹鳥毳(견경취조취) : 바람에 날려가는 새털도 바라보고

隨意數花鬚(수의수화수) : 내 맘대로 꽃송이도 헤아려봤다오.

細草偏稱坐(세초편칭좌) : 부드러운 풀밭에 비스듬히 기대 앉으니

香醪懶再沽(향료나재고) : 잘 익은 막리라도 다시 사오기 귀찮네.

醉歸應犯夜(취귀응범야) : 술 취해 돌아가면 응당 야간통금에 걸릴텐데

可怕執金吾(가파집금오) : 아이고, 무서워, 단속하는 이금오가 정말 두렵네.


출처 : https://blog.naver.com/samson1264/222150896341



 승지초상인, 서항득자오를 "When a place is so lovely I walk slow, I long to let loveliness drown in my soul."로 잘못 번역한 것을 널리 알린 책은 윌 듀런트의 "문명 이야기"였다. 1920년대에 서양에서 나온 책이니, 어쩔 수 없긴 하지만 원문이 이상하고 서양인 기준으로 낭만적으로 변질됐다는 점에서  저 번역은 파에즈 바라캇이 형광 페인트로 칠해둔 명나라 시대의 목조 불상같다. 그 덕에 아름다운 시를 알게된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원문은 두보가 친구들과 밖에서 술을 까먹고 꽐라가 되니 신나 죽겠다는 마음을 노래한게 사실 아닌가?


 그렇다면, 천천히 걷는 사람을 위해서는 어떤 구절로 위로를 해줘야할까? 사실 구글링을 하면서 찾아낸 멋진 다른 시가 있다.


대운사찬공방사수(大雲寺贊公房四首) - 두보(杜甫)

대운사 찬공(贊公) 스님의 방에서  


其一

心在水精域(심재수정역) : 마음이 수정같이 맑아지고

衣霑春雨時(의점춘우시) : 옷은 봄비에 젖는구나.

洞門盡徐步(동문진서보) : 마주한 문마다 천천히 걷는 사람들

深院果幽期(심원과유기) : 오래 생각한 조용한 사원에 찾아왔네.

到扉開復閉(도비개복폐) : 사립문에 이르자 열렸다가 다시 닫히고

撞鐘齋及玆(당종재급자) : 종을 치니 스님들 재하려 모이네.

醍醐長發性(제호장발성) : 시원한 제호 탕은 불성을 돕고

飮食過扶衰(음식과부쇠) : 음식은 늙은이 분수에 넘치네.

把臂有多日(파비유다일) : 손을 마주잡고 여러 날을 지내는데

開懷無愧辭(개회무괴사) : 가슴을 열어(속마음) 터놓아도 부끄럽지 않네.

黃鸝度結構(황리도결구) : 노란 꾀꼬리가 불전에 넘나들고

紫鴿下罘罳(자합하부시) : 자줏빛 비들기가 그물 밑으로 내려앉네.

愚意會所適(우의회소적) : 내 마음이 마땅한 곳을 만나니

花邊行自遲(화변행자지) : 꽃밭에서 거니는 발걸음 절로 더디네.

湯休起我病(탕휴기아병) : 탕휴가 나의 병든 몸(문장 癖)을 일으켜

微笑索題詩(미소색제시) : 시를 지어 달라고 미소로 말하네.


출처 : https://domountain.tistory.com/17955165


"When a place is so lovely I walk slow, I long to let loveliness drown in my soul."과 가장 정서적으로 비슷한 구절이 바로 "내 마음이 마땅한 곳을 만나니, 꽃밭에서 거니는 발걸음 절로 더디네."인듯 하다. 비록 같이 걷기에 답답하긴 하지만, 누군가 걸음이 느린이를 질책한다면, 이렇게 항변해주고 싶다. "마음 붙일 곳이 없어, 바삐가는 우리와 다르게 두보처럼 마음이 마땅한 곳을 찾으셨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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