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마포 노가리'라는 집이지만, 나는 공덕 나막스 집이라고 부르는 가게가 있다. 이유는 마포라 부르기에는 공덕역 코 앞에 붙어있으며 생전 처음으로 나막스라는 물고기가 있다는 것을 이곳에서 알았기 때문이다. 나막스를 왜 나막스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다. 원래 이름은 물메기, 붉은메기 같은 것으로 불리는데, 영문명에도 학명에도 나막스의 단서를 찾을 수 없다. 허름하기 이를 데 없는 마른안주 집으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그 허름한 곳에서 삶에 대한 태도를 더 고정시켜버렸기 때문이다. 어느 날 소주에 나막스를 까다가 전 직장 동료 중 가장 어린 친구가 '제발 우리 앞으로 살고 싶은 대로 살자'라고 부르짖었다. 전 직장에서는 위아래로 4~5살 차이가 나도 서로 반말을 했는데, 이 때문에 우리를 잘 아는 모 애널리스트는 "OO자산 너네들은 참 위아래가 없어"라며 하나도 지탄하는 것 같지 않은 말투로 지탄을 하기도 했다. 위아래 없는 곳에서 천둥벌거숭이로 살던 우리들은 욕망에 충실하기보단 성질 뻗치는 대로 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막스 회동 이후로 더 마음대로 살아오고 있다.
날씨가 많이 좋았던 최근의 어떤 주말 종로에서 볼일을 보고, 충동적으로 교보에 들러서 책을 몇 권 샀다. 본능적으로 그날은 책이 잘 읽힐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사두고 읽지 않은 벽돌책들이 쌓여있었지만 이런 날은 새로 골라온 책이어야만 했다. 그래서 골라온 책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행복의 정복"이었다. 오후부터 소파에 누워 바람을 느끼며 책을 읽어 내려가 가기 시작했다. 일단 그전에 사뒀던 "밀림의 귀환"부터 마무리를 하고 새로 사 온 책들을 읽었다.
그 세 권의 책은 사실 공통점을 찾으래야 찾기 힘들다. '밀림의 귀환'은 지난 20년간의 비정상적인 평화 상태가 미국이 패권국으로써 혼란과 혼돈을 억제했기 때문에 이뤄진 것이고, 미국 스스로의 번영과 안정을 위해 다시 정원사로 돌아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결론에서 주장하는 것을 제외하면, 최근에 읽었던 지정학 관련 서적 중 가장 사실에 근접한 내용을 간결하게 지적한 책이다. 세상에서 가장 쿨한 선지자처럼 보이는 유발 하라리는 인류가 과학과 지성에 기반하여 협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하는데, 결국 그 길이 미국이 주도하여 민주주의와 자유시장 경제가 전 세계의 독트린이 되어야 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을 '밀림의 귀환'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 같아서 씁쓸했다. 아마도 유발 하라리는 산속의 사원에 칩거하고 명상을 하며 세상을 외면하고 살게 될 것 같다. 또한 나심 탈레브가 말하는 불관용주의가 오히려 전반적인 인류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심 탈레브도 결국 그의 지나치게 발달한 이성 때문에 어딘가에 칩거하게 될 것 같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결국 미국은 정원사던, 경찰이던, 목양견이던 뭐가 됐던 자신이 해오던 역할을 내팽개치고 칩거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개인의 자유와 개성이 존중되었던 20년은 가고 국가의 개성이 더 드러나며 개인의 자유는 침탈당할 것이며, 극단주의와 국가주의가 바보들의 선봉에 설 것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표지만 보고는 생물학의 분더카머에 대한 것이거나, 이와이 슌지의 '월리스의 인어'같은 신화적인 이야기일 거라는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다. 결국 그렇게 모험적인 이야기는 아니었다. 과학자를 아버지로 둔 작가 본인의 자전적인 이야기와 생물학자였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일대기를 엮은 책이다. 우리는 살면서 내가 왜 이러고 사는가에 대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거기에 대해서 작가가 나름대로 답을 얻어, '우리는 그래도 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라는 것을 이야기해준다. 자세한 책의 내용은 미래의 독자를 위해 남겨두겠다.
'행복의 정복'은 십수 년 전에 나의 모친이 그 책을 읽던 것이 기억나서 집어왔다. 영국 최고의 지성 중 하나인 버트런드 러셀의 저작으로, 우리가 불행을 느끼는 원인을 분석하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쉽지만 신랄한 언어로 서술했다. 20대에는 읽다가 말았지만, 40대에 가까운 지금은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버트런드 러셀은 이 책을 1930년 영국에서 발간했음에도 2022년 한국의 저출산 현상과 그 원인까지 정확히 예견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사실 책이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저출산은 아니긴 하다. 문장 하나하나가 신랄하기 이를 데가 없는데, 자기 세계에 빠져 우울함에 간혹 빠지는 영혼으로써 가장 폐부를 찔린 단락을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관심은 어떤 적극적인 활동으로 이어지기 힘들다. 기껏해야 일기 쓰기에 매달린다거나, 정신분석을 받으러 정신과에 다닌다거나, 승려가 되거나 할 뿐이다. 하지만 승려가 된 사람도 규칙적인 수도 생활에 쫓겨 자신의 영혼을 잊을 수 있어야 비로소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승려가 종교에 귀의한 덕분에 누리고
있다고 믿는 행복은 그가 어쩔 수 없어서 도로 청소원이 되었더라도 누릴 수 있었던 행복에 불과하다.
- 행복의 정복, 버트런드 러셀 -
버트런드 러셀의 인생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수많은 결혼과 이혼, 연애와 불륜이 나온다. 저런 지적인 난봉꾼은 어떻게 탄생하는지 궁금했는데 글을 읽으면 수긍할 수밖에 없다. 외부세계에 관심이 많고, 행동력이 좋으며 유머감각이 뛰어난 영국 귀족을 누가 마다할 수 있겠는가? 행복의 정복에서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은 결코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각자 타고난 성정과 환경이 행복을 느끼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쟁취해야 한다고 했다.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바깥세상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건전한 방식으로 끊임없이 몰입할 대상을 가져 성취감을 느끼고, 마음껏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요약해 놓으면 당연한 개소리 같지만 책으로 문장을 통으로 읽다 보면 능동적인 자유주의자의 말에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주말을 서로 다른 3명의 문자 속에 침잠하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행복은 결국 자유에 달려있으며, 좋든 싫든 결국 지금 내가 속해있는 세상이 더욱 지속되길 바래야 한다고. 3권의 책 저자들은 국적도, 성별도, 태어난 시대도, 성적 지향성도 다 다르다. 작가와 나의 간극이 클수록 그와 내가 비슷하게 느끼는 부분에서 더 이해받는 느낌이 들고 위안을 받는다. 그리고 그의 말은 더 큰 설득력을 갖는다. 차이에서 오는 공감은 독자가 받아들이는 세계를 더 확장시킨다. 차이는 결국 더 확장된 다양성에서 오며, 이 다양성은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에 지배되는 세계가 아니라 아무나 아무 말을 떠들 수 있고, 그게 활자화가 가능한 세계에서 실현이 가능하다. 그게 아니라면 레즈비언 작가가 쓴 우생학자의 일대기를 통해 우리 모두와 같은 작은 존재가 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에 위안을 받을 수 있었을까? 나막스 집에서 부르짖듯 마음껏 살기 위해서는 자유가 필요하다. 만약 지금과 같은 세계가 스러진다면, 우리는 미래에 1984에서 주인공에게 탑 해트를 쓴 자본가에 대해 질문받았을 때 너절한 대답을 이어갔던 노인처럼 지금의 세계에 대해서 대답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