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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ix Oct 10. 2022

여의도를 떠나기에 앞서

나 역시 한 때는 저 불빛들 중 하나였다네.

 여의도첫 인은 나빴다. 내가 여의도에 대한 어떤 느낌을 갖게 된 것은 대학교 4학년 때로 취업지원센터에 올라온 LG필립스LCD의 면접을 보기 위해 트윈타워에 갔었을 때였다. 이곳저곳 공사판의 모래가 섞인 여의도 특유의 거친 강바람을 맞은 데다, 면접의 결과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삭막한 동네에서는 일하기 싫다는 생각을 했다. 첫 직장의 본사는 종로였고, 근무지는 분당이었다. 광화문과 강남에 가까운 곳들이라 앞으로도 웬만해선 광화문이나 강남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었다. 석사시절 인턴을 광화문의 외국계 은행에서 하면서 광화문에 대한 선망은 더욱더 커졌었다.


 솔잎 먹던 벌레가 갈잎을 먹을 수 없듯 결국 대학원을 졸업하고 다시 자본시장 바닥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대학원 졸업 전 처음 면접을 본 운용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여의도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면접을 봤는데 C레벨들의 무례하고 거친 질문에도 불구하고, 막상 면접 보던 시기의 날씨가 좋아 여의도에 대한 인상은 한결 나아졌다. 결국 10년도 넘게 이 좁은 섬에서 밥벌이를 해오고 있다. 오래 몸 붙이고 살면 정이 드는지, 강남에서 일했던 동료와 '그래도 강남보단 여의도가 덜 삭막하다'며 마음까지 붙이 일은 여의도에서 술은 마포에서 마시는 전형적인 여의도 귀신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여의도에서 좋아하는 곳 중 하나인 여의도 공원의 연못이다. 내 허벅지 만한 잉어들이 살고, 가끔 왜가리가 물고기 사냥을 한다. 이 앞에 서있다 보면, '서부전선 이상 없다'의 '우리는 외롭고 또 외로울 때 자연을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는 문장이 떠오른다.  


 여의도 사람들은 돈돈 거린다. 친한 사람을 만나던, 안 친한 이를 만나던 결국 대화의 주제는 돈으로 귀결이 된다. 친한 사람과는 돈 말고 다른 주제를 논하기도 하지만, 안 친한 사람과 돈과 골프 외의 이야기만 하다 보면 머저리 취급을 당하기 십상이다. 언젠가 여의도의 친구와 친해지기 전의 식사시간에 돈 얘기만 한 적이 있다.  점심식사가 마무리될 때쯤 그 친구가 말했다. "오늘은 돈 얘기만 했네요." 나는 "여의도에서 돈 말고 딴 얘기하면 어색하잖아요."라고 답했다. 그 이후론 그 친구와 돈 밖의 이야기를 많이하게 되었다. 협소한 여의도에서는 모두가 돈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살기 때문에 다들 돈돈하는데, 오히려 이렇듯 물질 지향적인 태도 때문에 사람들이 더 순수하고 직선적이다. 혹자는 이를 자본주의의 천박함으로 폄하하나, 나는 여의도 사람들이 목표지향적이고 솔직하다고 생각한다. 이 섬의 사람들은 결국 어린 왕자처럼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같은 소리를 하면 못 견디고 몸을 배배 꼬게 되어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물질주의를 극단으로 추구하다 보면 선하지는 않지만 순수함만이 남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들 살을 에이는 강바람을 맞다가 인격에 성마름만이 남아있게 된 걸까? 역설적이게도 여의도에는 기이한 사해동포주의가 존재한다. 한정된 산업의 다양한 회사 사람들이 한 구역에 밀집되어있기 때문에 그런 듯하다. 전 직장의 사람 좋은 형님 "helix야 여의도는 대학 캠퍼스 같지 않니? 어느 회사의 누구라고 하면 대충 두 다리만 건너면 다 알잖아. 꼭 어느 과의 누구 안다는 것과 같은 거지."  라고 말씀하셨다. 실제로 날 좋은 날 점심시간에 한강공원이나, 여의도 공원, 담배 거리를 지나가다 보면 끊임없이 '안녕하세요'를 해야 하는 날도 있다. 이렇듯 좁은 공간이기 때문에 같은 회사의 적들과는 물어뜯어도, 느슨한 관계의 잘 모르는 사람들과 잘 몰라도 아는 척하고 살기도 하고, 안 친해도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주기도 한다. 이상하게도 남의 곤란을 외면 못해서 범법을 저지르고 영어의 몸이 되는 경우도 종종 봤다. 정말로 기이한 사해동포주의 아닌가? 하지만 이러한 느슨한 형제애 때문에 모르는 사람과 쉽게 친해지기도 하고, 친하다가도 순식간에 멀어지는 "회자정리, 거자필반"이 가장 어울리는 지역이 바로 여의도이다.


 파주 쪽으로 야간 골프를 치러갔다 돌아오며 강변북로를 타고 여의도를 지나쳐 본 사람이라면, 서강대교쯤에서 병풍처럼 펼쳐지는 여의도 야경에 감탄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특히 최근의 여의도는 예전보다 고층빌딩이 많이 들어서서, 홍콩에서 스타페리를 타고 볼 수 있는 풍경에 버금가는 위용을 자랑한다고 생각한다. 최근의 어느 날도 야간을 치고 집으로 운전해 돌아오며 은하와 같은 여의도의 야경을 보 감탄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저 불빛들 중 일부구나. 비록 가장 빛나 본 적도 없고, 가장 큰 성단에 속해있던 적도 없는 주변부의 작은 빛 중 하나였지만 그저 저 중의 하나였던 것만으로도 괜찮다. 그거면 됐다.


신혼시절 살던 마포에서 밤에 한강으로 운동을 나가서 찍은 여의도 사진. 지금은 훨씬 더 멋있다.
IFC에서 내려다본 서여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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