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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비 Oct 08. 2019

여름산책

     작년 이맘때였나? 지금보다 더워서 모기랑 매미들이 떼죽음 당했던 여름날, 지금의 애인과 택시를 타고 어딘가로 이동 중이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걷는 걸 좋아하는 우리가 왜 택시를 탔는지도 기억은 안 나지만 둘이 손을 잡고 있었던 건 기억난다. 사귀기 전이였지만 그전부터 우린 곧잘 손잡고 팔짱 끼고 볼에 뽀뽀도 하던 그런 사이였다. 애인은 손과 발에 땀이 정말정말 많은데, 날씨가 뜨거울수록 물의 양은 많아진단다. 그날도 손에 땀이 차서, 나의 손과 그 아이의 손에 찰박찰박한 느낌이 났다. 손에 왜 이렇게 젖어있는지 물어보니까 아이는 손을 소스라치게 빼면서 “난 원래 땀이 많아. 다한증이거든” 라고 말했다.
나는 그 해의 여름보다 더 전의 여름, 그러니까 정확히 4년 전 1학년 새내기 여름에 만났던 남자애가 생각이 났다. 이름도 기억 안 나는 그 친구도 다한증이 심했었다. 대낮에 칵테일바 야외에 앉아서 손에서 땀이 난다고 생각하면 나게 할 수 있다고 하며, 정말로 단 몇 초의 순간 만에 손가락에서 송글송글 땀이 나는 것을 보여 주었었다. 햇빛에 반사 되어 몽글몽글하게 땀이 올라온 손가락 끝을 만지면서 정말 신기 하다고 생각했다.
 다시 작년으로 돌아와서, 아이의 손을 가져와 다시 잡으면서 전에 썸을 탔던 애도 너와 같이 다한증이 심했었노라고 말했다. 애인은 지금 와서 말하지만 (그가 하는 말을 그대로 가져와서 적어 보자면) 아, 이건 위험하다. 좋아하게 될 거 같다. 좋아하게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면 진짜로 좋아하게 된다고 끝장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진짜 귀여워.
 그런 일이 있고난 해의 겨울. 크리스마스이브 때 우리는 소수의 사람들과 작은 파티를 했다. 아이의 회사를 위해 일하는 직원들과 작가들, 그리고 그가 아는 누나의 친구들이 참석했다. 파티가 열렸던 동역사의 숙소는 새벽까지 불이 켜져 있었고, 마침내 모두가 잠이 들 때에 나와 애인은 침대가 부족한 관계로 모르는 남자애와 셋이 누워서, 남자애의 잠든 숨소리를 들으며 사랑을 고백했다. 서로 껴안고 키스를 하고 부비적 댔다. 또 서로가 같이 일하는 동료라는 사실을 떠올라며 아 여기까지야. 이러면 안 돼. 라고 하기도 하고, 그러다 다시 키스하며 밤을 새웠다. 그 당시 옆에 있던 남자애는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우리는 지금 웃으며 걔는 아마 큐피드였던 거 같다고 얘기하곤 한다.  

    애인과 나는 연애 디나이얼 기간이 있었다. 애인은 내가 폴리아모리 라는 것을, 남자도 좋고 여자도 좋고 젠더퀴어인 애들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좋아하는 거 같아!! 라고 생각하는 바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마조) 우리는 초반에 그것 때문에 잠깐 삐걱거렸다. 애인 외에 남자친구가 둘이 더 있고, 얼마전에 헤어진 여자친구도 있었으니 모노인 애인에게는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애인과 연애하기 위해 다른 애인들과 헤어져야겠다. 결심한 일은 몇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크리스마스 당일날 둘이 
만나서 샤오룽바오를 먹으며 한 얘기다. 당시 두 명의 애인 중 한 애인과는 이미 헤어질 각을 재고 있었고, 또 다른 애인(이하 표범)과는 아직 관계가 괜찮은 상태였다. 우리는 늦은 점심을 먹으며 에곤 실레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아이는 표범과 본인 중 무엇이 샤오룽바오며 무엇이 에곤 실레인가 물어보았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질 않는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나는 얘를 가장 사랑하는구나 깨달았다.
 나는 애인의 그런 점들이 좋았다. 강변 고속 터미널 앞의 담배 부스에서 홀로 담배를 피우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에드워드 호퍼 같다는 말을 하거나, 침대가 디피되어 있는 수제 버거집에 앉아 있는 날 보고 벨라스케스의 그림 같다는 평을 해주고, 내 볼에 있는 세 개의 점에 각각 아그리파, 호메로스, 히포크라테스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안톤 비도클의 전시를 둘이서 끝까지 남아서 보는 그런 점. 허리우드 극장을 소개해 주고, 거기서 40년도 넘은 흑백 영화를 보고 같이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라서 좋았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로부터 2주일 후 잠실의 한 모텔 욕조에서 지나가는 말처럼 뱉은 결혼하자는 소리에 고민도 안 하고 승낙한 거 같다. 둘이 새벽에 나와 석촌호수 산책길에 보이는 앙상한 나뭇가지들을 보며 내 모든 인생을 이 사람에게 걸어도 괜찮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지금 이 순간. 이제는 온전히 우리 둘이서만의 여름을 보내게 되게까지도 안 바뀌었다.
 날이 더워져도 우리는 동대입구에서 한강진까지 걸어가며 정말 덥다라고 감탄하는 대신 같이 진행하는 공동 작업이야기를 한다. 동료이자 연인이자 공동작업 작가이자 배우자인 사람이 다 같은 사람이라는 건 정말 드문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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