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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비 Oct 15. 2019

온 세상을 다 우려내려나 보다.


    그러니까 한강진 사무실. 스페인 대사관 근처에 있는 그곳은 굉장히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가야 비로소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사실 지하로 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로 건물에 진입할 수 있는 방법도 있지만, 그렇다면 사무실의 멋진 정원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고행을 택하곤 한다. 근처 주택 공동현관 앞엔 낡은 자전거 한 대가 세워져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졌지만, 티백 하나가 자전거 뒷 짐칸에 혼자 묶여 있었다. 그 티백은 혼자서 꽤나 긴 시간을 묶여져 있었는데, 그와 동시에 낡은 자전거의 녹도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어서, 아마 온 세상을 다 차로 우려 내 버리려고 묶어 놓았나 싶었다.

 그 티백을 보니 청담동에서 살던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때는 한국에 기록적 폭우가 내렸던 2011년이었을까? 비가 며칠은 와서 창문을 꼭 닫아 놨던 엄마가 답답해서 못 살겠다며 환기를 위해 창문들을 다 열었다. 그때에 엄마는 폭우 때문에 눅눅하다며 습기 제거제 또한 틀어 왔었는데, 아빠는 네 엄마가 온 세상의 습기를 다 빨아들이려나 보다! 라고 외치셔서 나는 한참 동안을 까르륵거리며 웃었고, 아직까지도 그때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엄마랑 아빠는 하나부터 열까지 안 맞는 사이었다. 엄마는 화가 나면 대화로 풀어야 하고 아빠는 입을 꾹 다물고 화가 풀릴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입을 다물고 있는 남편 때문에 더 화가 나서 목소리가 높아지고 아빠는 그런 아내를 보고 화가 나서 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가 13년도쯤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하다가 마침내 서로 단 한마디도 안 하게 된 지 4년이 되었다. 엄마는 자신의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고 화를 내지만, 아빠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화가 나서 그것에 대한 어떠한 변명도 해명도 사과도 하지 않은 채 한동안 집으로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온 세상의 습기를 다 들이던 제습기를 끈 것은 아빠였다. 탁한 공기를 환기하느라 열어 재낀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습기를 빨아들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셨던 것이다. 아빠는 샤워하면 화장실 문을 열고 화장실을 향해 선풍기를 틀어 곰팡이가 생기지 말게 하자던 집안의 규칙도 이해하지 못했다. 새벽마다 샤워하고 문을 굳게 닫고 가는 아빠를 향해 엄마는 비명을 질러 댔다. 아빠는 어차피 나가서 집에 존재하지 않는대도 그를 향해 소리 질렀다. 그 모든 소음은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 했다. 건포도처럼 마른 엄마가 무릎을 꿇고 화장실 바닥의 녹과 곰팡이를 닦아내는 것을 보며 비명 지르던 엄마의 모습도 잊은 채 내 칫솔에 곰팡이가 생길 것을 두려워하여 방안으로 들고 오곤 했다. 어느 날 아빠는 화장실 컵에 칫솔이 자신의 것밖에 꽂아져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이게 가족이냐고 그랬다. 아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주로 그 말은 엄마나 친언니가 하던 말이었고, 나는 지금 가족이 산산조각 난 것에 대한 책임을 아빠에게 묻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때 공기 청정기는 왜 껐으며, 화장실 문은 왜 닫고 다니는지, 바람은 왜 피웠고 집에는 왜 안 들어 왔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세면대에 뭉쳐져 있는 머리카락만 보며 꼼지락대는 아빠 손가락이 어쩐지 짜증이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식새끼라고 아빠 닮아서 성질이 나면 입을 다물게 되는 것이다. 


    온 세상을 다 우려내던 티백은 어디 갔는지, 아직 공기 중에 얼그레이 빛이 보이지 않는데도 제거된 것을 보면, 누군가 티백만의 규칙을 어기고 치워 버렸는가보다. 자전거의 녹은 그대로인데, 치우려면 녹도 같이 치우지 어지간히 우리 가족만치 무심한 사람인가 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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