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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비 Dec 09. 2020

바보들의 왕


  어렸을 적 살던 집에는 베란다가 있었다. 차가운 타일로 되어 슬리퍼를 신고 돌아다녀야 하는 베란다가 두 개 있었고. 거실과 같은 나무 장판이 깔려 보일러가 닿는 따뜻한 곳까지 세 개가 있었다. 사실 따뜻하다고 해봤자 외풍은 여전히 불었기 때문에 공기는 차가웠다. 겨울에는 전기스토브를 가져다 놔야 했다. 우리는 따뜻한 베란다에 컴퓨터와 펌프 기계를 가져다 놓아 게임방이라고 불렀다. 거기서 하는 게임이라고는 아빠가 하던 스타크래프트와 언니가 하도 쿵쾅대며 밟아서 밑에 층에서 여러 번 찾으러 오게 만든 펌프 기계뿐이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게임방이라고 불렀다. 나도 그곳에서 담요를 두르고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보던 것이 생각난다. 아파트의 가장 외부에 위치해 있는 베란다의 특성상 햇빛이 가장 강렬히 내리쬐는 곳은 모니터 위였다. 담요는 나를 둘러 주기보다는 나의 머리와 모니터 위를 한꺼번에 덮어 작은 공간을 만드는 용이었다. 모니터에 담요를 덮으면 작고 하얀 자막을 읽을 수 있었다. 영어를 잘하던 사촌 언니는 엄마에게 고용되어 나에게 영어 과외를 해 주러 몇 번 들렸었는데, 해리포터를 들고 와서 함께 담요 안에 들어가 보기도 했다. 나는 게임방에 걸맞은 방을 만들기 위해 빨랫대야 만한 분홍색 플라스틱 가방에 가득 든 레고를 가져다 놓았다. 펌프를 하는 도중 작은 레고 조각이 발에 밟히기고 했고 스타를 하는데 뒤에서 차르륵차르륵 소리를 내며 놀아서 그런지 레고는 다시 내 방으로 돌려보내 졌다. 펌프 또한 아랫집의 지속적인 민원으로 창고로 돌려보내 졌다. 결국 게임방은 아빠의 스타크래프트 방이 된 것이다.
 거실과 따뜻한 베란다는 통 유리로 된 미닫이 문으로 나뉘어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 오시던 파출부 아주머니가 유리를 워낙 집착적으로 닦았던 터라 온 가족이 돌아가며 유리문에 박치기를 하기도 했다. 엄마는 어느 날 빨간색 색종이로 하트를 오려 딱풀을 발라 유리에 붙였다. 그 이후 박치기를 하는 사람은 없어졌다. 유리를 집착해서 닦고 김치를 기가 막히게 담그던 아주머니는 해가 갈수록 세면대 밑을 제대로 닦지 못한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엄마는 그 후로 가끔 김치 레시피를 알아내지 못한 채 그 아주머니를 해고한 것을 후회하곤 했다. 아주머니가 세면대의 밑 부분을 유리창과 거울만큼 깨끗이 닦았으면 김치 레시피를 알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컴퓨터가 놓여 저 있던 책상에는 세 개의 가족사진이 얹어져 있었다. 달마시안 강아지 인형을 안고 있는 나를 안고 있는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언니의 사진, 베트남의 어느 강에서 찍힌 작은 조각배 위에서 구명조끼를 입고 볼록한 배를 내밀고 있는 언니의 사진. 그리고 과천의 이름 모를 대회에서 바보들의 왕으로 뽑힌 아빠의 사진이다. 아빠는 그 속에서 우스꽝스러운 분장과 함께 방울이 달린 광대모자를 왕관처럼 쓰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그 사진이 무서웠다. 광대를 무서워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엄마와 아빠가 여행을 다닐 때마다 사 오는 장식품들 중 광대 가면이 있었는데, 그 가면은 무섭지 않았다. 광대를 무서워하는 아이는 언니 었다. 언니는 거실에 걸려 있는 광대가면 때문에 거실에서 잠을 자지 못했었다 한다. 나에게는 그 사진이 그랬다. 아빠 얼굴에 그려져 있는 빨갛고 검은 동그란 점들이 그렇게 호러스럽게 다가왔다. 야후 꾸러기에서 플래시 게임을 하다가 사진과 눈을 마주 치면 슬며시 사진을 뒤집어 놓곤 했다. 엄마는 그걸 눈치채셨는지, 정말 마음에 드는 가족사진이 생기면 쓰자고 아껴 두었던 액자를 꺼냈다. 신문지에 고이고이 싸 두었던 액자를 꺼낼 때 나는 살짝 패닉 했었는데, 돌고래가 떠다디는 파란 액체가 들어 있던 액자였다. 나의 최애 액자였다. 파란 액체 속에는 수많은 작거 하얀 폼폼이들이 파도처럼 떠 있었고, 파란 액체 안에는 바닷속 기포처럼 기름 뭉치가 뭉툭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도대체 왜 그 사진을 내가 좋아하는 액자에 넣느냐 물어보니, 바보들의 왕이니까 이런 귀여운 액자에 아울린다 하셨다. 엄마에게는 마냥 사랑스러운 남편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그때는 그 사진이 마냥 무서운 바보처럼만 다가왔다. 내가 아는 아빠의 모습은 전능했다. 무엇이든 만들어내고 무엇이든 가져다주었다.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발레리나가 춤을 추는 유리 오르골과 책 속의 묘사와 똑같은 거대한 삐삐 인형이 그 이유였다.(나는 아직도 삐삐의 짝짝이 양말을 벗겼을 때 나온 더러운 플라스틱 발을 기억 한다.) 어떠한 것도 먼저 원하지도 않는 어린아이에게 재밌고 요상한 것을 안겨 주는 전지전능한 아빠는 어쩔 때는 무서운 폭군이었다. 식탁의 유리를 젓가락으로 깨고 다섯 살 열 살 먹은 딸을 골프채와 야구방망이로 때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빠는 가족들에게 의자를 집어던지고 그릇을 깨부수는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나에게 종이로 정교하게 만든 로보트 인형을 만들어 주고 인터넷이 열악했던 시절, 밤을 새워 연습해 피자 도우를 던지는 묘기도 보여주던 사람이었다. 따라서 바보 분장을 하고 있는 것은 매치하기 힘들었다. 나에게 있어서 아빠는 바보들의 왕이 아니라 그냥 왕이었다. 사진 속의 아빠는 실제의 아빠와는 다른 인격 같았다. 하지만 모든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아. 나의 그 슈퍼맨 같던 아버지가 얼마나 나약하고 작아졌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끝이 난다. 내 아버지의 이야기도 똑같다.
 아빠의 잘 나가던 사업이 망했다는 소식은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나와 언니에게도 알려졌다. 나는 사실 아직도 베란다가 세 개가 있는 집에서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다. 애초에 몇 달 전에 입시미술을 위한 재료비로 40만 원 정도를 썼던 것이 기억났다. 처음 보는 아빠의 우는 모습에 그다지 마음이 아프지도 않았다. 아빠는 후에 아직 성인도 아닌 내가 침착하게 듣는 모습이 대견했다고 한다. 실상 나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말이다. 집이 서울에서 구리로 이사하고, 그 이사한 집에도 베란다와 화장실은 각각 두 개 있었고 나는 여전히 그다지 달라진 점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집 앞에 큰 산책로와 호수가 생긴 것에 대해 기뻐했고, 자전거 부대와 맥주 까는 대학생들이 가득한 한강보다 개와 어린이가 많은 호수가 좋았다. 개포동에 있는 미술학원에서 구리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 짧지만 먼 거리를 아빠와 함께 트럭을 타고 달리 가가 기름을 채우기 위해 주유소에 들렸을 때, 내게서 오만 원을 빌려 갔을 때 그때 느꼈다. 아빠가 오만 원도 없구나. 주유소 직원이 건네주는 생수를 나에게 주며 다음 주에 돌려준다고 하던 아빠의 말에 내가 어떤 생각을 했더라.
 한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던 그는 이제 내가 다섯 살에 생긴 손가락의 흉터에 대해 물어본다. 그는 전부터 왕이 아니었다. 바보들의 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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