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사실관계

같은 기차 같은 칸을 탈 확률?

by 조의민 변호사

변호사에게 ‘확률’이란 곧 ‘입증 책임’의 문제다.


어떤 사실이 발생할 확률이 지극히 낮다면, 그것이 우연임을 증명하는 것은 형사 사건에서 무죄를 입증하는 것만큼이나 고된 작업이 된다. 그런데 오늘 나는, 어떠한 사전 모의나 증거 인멸의 시도 없이도 완벽하게 일치해버린 ‘기적 같은 사실관계’를 목격하고 말았다.


나는 부산대학교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내 삶의 8할을 공유했던 소중한 친구 녀석들이 있다. 원래는 6명이었으나, 한 명은 어느 순간부터 행방이 묘연해져 현재는 5명이 정예 멤버로 남았다. 15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술잔을 기울이며 미래를 걱정하던 철부지들은 어느덧 변호사, 의사, 한의사가 되어 각자의 영역에서 ‘사’자 직업의 무게를 견디고 있다.


오늘은 당일치기 일정으로 고향인 부산에 내려가야 했다.

마침 변호사가 된 친구 녀석 하나도 결혼을 앞두고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부산행 기차에 올랐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일정을 전혀 몰랐다. 사전 서면 교환도, 전화 통화라는 소환 절차도 없었다.


KTX가 부산역에 멈춰 섰을 때다. 짐을 챙겨 내리려고 일어난 순간, 내 시야에 커다란 장벽 하나가 나타났다. 183cm인 나보다 더 큰 익숙한 실루엣의 녀석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서 있었다.


“...어?”


순간 법적 사고가 마비됐다. 서울에 사는 나와 인천에 사는 친구가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열차의 심지어 같은 칸에 탑승해 부산역에서 마주칠 확률. 이건 로또 당첨 번호를 맞추는 것보다 더 정교한 ‘우연의 일치’였다. 우리는 서로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떤 치밀한 변론 전략보다도 강력한 우정이라는 이름의 ‘공통 증거’가 우리 눈앞에 놓인 셈이었다.


요즘 다들 바빠서 자주 만나지도 못했는데, 우리는 대학교 시절 강의실 복도에서 마주친 것 마냥 몇 마디 안부를 나누고는 너무나 쉽고 편하게 서로의 갈 길을 갔다. 15년이라는 세월은 굳이 긴 설명이 없어도 서로의 눈빛만으로 현재의 안위를 확인할 수 있는 ‘의제 자백’의 경지에 이르게 했나 보다.


짧은 찰나였지만, 그 무심한 헤어짐이 오히려 우리가 매일 보는 사이처럼 편안하다는 반증이었다.


오늘은 토요일, 로또 발표일이다. 이 말도 안 되는 확률을 뚫고 친구를 만났으니, 내친김에 로또 한 장을 구매해 보려 한다. 당첨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이미 오늘 나는 현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행운의 증거’를 확보했으니까.



번외. 참고로 부산 지하철 1호선에도 교대역이 있다. 안내 방송이 나오자마자 습관적으로 서초동 법무법인 필로 출근하듯 벌떡 일어날 뻔한 건, 변호사로서의 직업적 본능이 부산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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