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대만 여행기
여행을 다니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는데 이상하게 집으로 돌아와서 적어볼라 치면 표현이 뜨뜻미지근해지거나 기억해내질 못해버리고 만다. 그래서 놓쳐버리게 되는 생생한 감흥이 아쉬워 이번 여행에서는 실시간으로 매일밤 기록해보려고 한다-고 당당하게 썼지만,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고. 일단 써보기로 한다. 면세로 구입한 무선 키보드빨로 오늘은 꼭 다 적고 잘 수 있기를!
떠나고 싶어서 지른 여행임에도 딱히 신나지가 않았다. 출국 전부터 피부가 다시 한껏 예민해져서 세수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얼굴이 엉망이니 꼬까옷을 입어도 신나지가 않고. 이렇게 큰 영향을 받는 걸 보면 나는 생각보다 훨씬 더 외면에 신경쓰고 살았나보다. 아무튼 그런 얼굴로 이거저거 준비하고 처리하다 보니 출국날이 다가왔고, 표를 샀으니 일단 떠나자!는 마음 뿐이었다.
2시간 일찍 도착한 공항에서는 출국심사부터 비행기 탑승까지 단 1분도 허투루 쓰지 않고(사실 2분 초과했음) 딱딱딱 맞춰서 쉴 틈 없이 이루어졌다. 마침내 비행기가 이륙하고 반쯤 기운 지평선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
드디어 혼자다!
가만, 내가 혼자 있기를 바랬었나? 외롭다고 야단이던 요즘이었거늘. 생각해 보니 홀로 여행을 떠난지 어느덧 1년 하고도 2개월이 지나 있었다.
공항에는 나의 유일한 대만 친구가 마중을 나왔다. 친구는 환전을 하고, 심카드를 사는 걸 도와줬으며, 캐리어를 대신 끌어주고, 심지어 커피까지 사줬다.면세점에서 급하게 산 라인 쿠키세트의 값을 벌써(사실 출국하기 전부터) 다 치러버렸다. 대만에 체류하는 동안 앞으로도 계속 도움을 받게 될 예정인데, 이 호의를 어떻게 갚으면 좋을지 벌써부터 막막하다.
공항에서 차를 타고 바로 지우펀(九分)으로 향했다. 밤에 아름답다는 지우펀을 나는 어중떠중한 시간에 볼 수밖에 없었다. 한국 공항패션(이랄 것도 없지만) 그대로 언덕을 오르던 나는 등줄기로 땀이 주르르 흘러내리는 걸 느낌과 동시에 모든 의욕을 잃어버렸다. 정체 모를 냄새에 식욕 역시 잃었으나, "여기까지 왔으니...!"의 심정으로 이름 모를 떡 같은 것과, 친구가 사다달라고 부탁했던 누가크래커를 샀다. 상점 골목을 보는 둥 마는 둥 지나가면서 까막눈인 내가 홀로 이곳에 왔다면, 도심에서 환승을 해가며 이곳가지 찾아왔다면 과연 얼마나 힘들었을까(얼마나 빨리 포기했을까)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바로 풍등을 날릴 수 있다는 핑시로 이동, 하다가 핑시역에서 한 정거장 덜 간 스펀(十分)역으로 향했다. 날이 어슴푸레 어두워지고 저 멀리 다른 사람들이 날린 풍등이 보이자 신이 나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팥이 든 그 떡 같은 걸 먹어서 그런 걸지도. '나는 무슨 소원을 빌지?' 생각하다가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소원을 빈다는 행위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느낌, 그 느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떤 바람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저릴 만큼 간절했던 것 같다.
소원에는 "아홉수 안녕-", 그리고 건강과 앞으로의 포부를 담은 글귀를 적었다. 날아오르는 풍등은 너무나 낭만적인데, 그 풍등을 만드는 과정은 하나도 안-낭만적이었다. 불을 붙이니 생각보다 뜨겁고 빨리 떠올라서 놀랐다. 손을 놓자 역시 생각보다 빨리 훨훨 날아가버렸다. 경건하게 손이라도 마주잡고 지켜볼 걸 그랬나.
뚜벅이었다면 이틀 정도의 일정을 잡아먹었을 관광을 끝내버리고(?!) 타이베이 시내로 왔다. 시먼(西门)역 근처로 숙소를 잡았는데, 이곳은 마치 명동의 큰 버전 같다. 접근성과 가격을 고려하여 고른 곳인데, 역시나 아쉽다. 이런 걸 보러 외국까지 온 게 아니라구. 뭘 먹을까 하다가 매우 즉흥적으로 커리 집에 들어갔고, 더 어이없게도 나는 시키고 보니 커리가 아닌 메뉴를 골랐다. 하지만 맛있었다. 그리고 샐러드에 오이 같이 생긴 게 있어서 먹었는데 맛이 특이했다. 친구에게 물어보니 과일이라며 이름을 알려주는데, 완전 생소한 단어였다. 번역해 보니 구아바라고. 대만에서 구아바를 처음 먹어본다!
친구는 부모님과 가까이에 사는데, 퇴근하고 집에 가면 시간이 너무 늦어서 부모님 댁에 가서 저녁을 먹는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께서는 저녁 양을 넉넉하게 하여 그 다음날 점심으로 싸주신다고. 저녁-점심을 한 메뉴로 통일할 수 있는 친구의 무던함에 1차로 놀랐고, 30대가 되어서도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갖고 다닌다는 데에 2차로 놀랐다. 하루에 고작(?) 세 끼 먹는데 난 먹고싶은 거 먹고싶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얘기했더니 친구는 다소 정색하며, 절약하는 삶의 중요성에 대해 얘기했다. 이에 나는 요즘 한국에 부는 욜로 바람과 그럴 수밖에 없는 배경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진지하게 미래를 계획하고 준비하는 친구가 멋져 보였다.
이 친구를 알게 된 건 무려 5년 전인데, 그 사이 친구는 외국대학 학위를 땄고, 타이완국립대에서 얼마전 MBA 프로그램도 수료했다. 스펙도 스펙이지만, 진지하게 앞날을 고민하고, 발전하려 애쓰는 모습을 볼 때마다 멋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무슨 에피소드가 있었지? 이제는 진짜 자야할 것 같다. 내일은 수영장을 갈 건데, 아직 어떻게 가는지, 이용시간이나 규칙을 몰라서 검색을 좀 해봐야 한다. 빨리 하고 자야겠다. 약 때문에 졸음이 쏟아져서 약간 몽롱한 상태로 의식의 흐름에 따라 썼는데, 너무 일기를 공개적으로 쓴 느낌인가? 모르겠다.다시 읽어 볼 기운조차 남지 않았다. 이렇게 배설하듯이 글을 올리는 것도 싫지만. 날 것 그대로를 올려보는 시도를 해본다는 데에 의미를 두고...!
무선키보드 열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