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라이팅의 좋은 예

묘하게 설득력 있는 모습에 마음이 쿨링됐달까

by 지와은


당장이라도 이직을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정도로 일하는 사람이면, 반겨줄 곳은 분명 있을 거야.’

근거 없는 자신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동안 원티드나 링크드인, 혹은 이메일로 받았던

제안들을 다시 꺼내 훑어봤다.


그런데 이상했다.
딱히 가고 싶은 회사도, 하고 싶은 일도 떠오르지 않았다.

인사 평가 후 요동치던 마음은,

방향을 잃은 화살처럼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회사에서 워킹맘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체감한 이후,
회사에 불만을 가진 동료들이 괜히 더 들어왔다.


불만이 ‘없는’ 동료는 없었던 것 같다.

경기는 얼어붙었고, 회사 사정도 그에 못지않았다.
연봉과 직결되는 평가에 만족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설령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해도,

나처럼 괜한 한 마디까지 덧붙여 들었다면
그 기분이 좋을 리 없었을 것 같다.




며칠 뒤,

내가 오래 따랐던 조직장님에게 점심 제안이 왔다.

내가 육아휴직을 앞뒀을 때

“언제든 다시 같이 일하고 싶다”고 말해주셨던 분.
그 말 한마디에 큰 위로와 안심을 얻었었다.


나와 같은 워킹맘이자, 나에게 가장 인간적인 상사.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인사 평가의 마지막 결재자였다.
그래서 더 만나고 싶었다.




“요즘 어때?”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는 꾹꾹 눌러 담고 있던 마음을 꺼냈다.


“일은 열심히 하고 있어요. 성과도 좋고요.
근데 육아휴직을 다녀왔다는 이유로

평가에 영향을 받는 걸 체감하니,

그게 자꾸 마음을 흐트러뜨려요.”


조직장님은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뭐가 중요해~ 이렇게 생각해봐.
불리한 조건에서도 결국 좋은 평가를 받아냈잖아.”


그리고 덧붙였다.
“회사는 당연히 묻는 거야.

‘1년을 꽉 채운 사람보다 더 잘했느냐’고.


그 질문에 대해,

나와 너의 팀장이 ‘맞다’고 증명한 거잖아.
그걸로 충분하지 않아?"




너무 단순한 말인데, 그 몇 마디에

달달 끓었던 마음이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같은 말이어도, 하루는 뜨겁고 하루는 차가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날아든 결정타.

“에이미, 내년에도 잘해야 해.
그래야 다음 해에 큰 프로젝트를 맡길 수 있어.”


생각치도 못한 포인트에서 심장이 다시 뛰었다.

누군가 “그 분의 강점은 가스라이팅”이라 했지만,
왠지 지금 이게 그 가스라이팅일 수도 있지만,

이 느낌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저
‘내가 여기서 일해도 되는 사람이다’라는 확신,
조직 내 리더십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틀 뒤에 연봉 계약서가 도착했다.

숫자를 확인하고 나서 처음 든 생각.
“1년은 더 다닐 수 있겠다.”


그동안 들끓던 분노와 배신감은
풍선에 바람 빠지듯 조용히 사라졌고,
‘이렇게 일했을 때 1년 뒤엔 또 어떤 결과가 있을까’
궁금해졌다.


퇴사까지 생각하게 만들던 이 회사는
결국 ‘나’를 증명할 수 있었던 판이었다.

그걸 지켜봐 주고 인정해 주는 상사가 있다는 사실이

내게 여유와 동력을 만들어주었다.


딱 1년만 더 해보자.

그다음엔, 내 마음대로 일해보자.
그게 어디든, 무슨 일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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