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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워녕 Nov 14. 2020

당황하지 않고 배려하기

My pleasure!


  당근마켓 거래를 하다가 초등학생을 만났다. 


  아침 8시 20분에 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초등학생을 기다리는데 실실 웃음이 나왔다. 초등학생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시간 약속을 잡는 중에 저녁 7시 이후도 괜찮냐는 나의 질문에, 상대방은 자기가 초등학생이라서 너무 늦은 시간은 곤란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래, 초등학생도 당근마켓을 할 수 있지'라고 쉽게 생각했다. 


  나는 니트성애자라, 니트만 보면 환장해서 집에 니트가 넘쳐나 이미 여러 니트를 중고마켓에 내놓아 판매했음에도, 또 니트가 눈에 보이면 또 정신 못 차리고 니트를 사들이는데, 이번에는 당근마켓에 올라온 니트에 꽂혔고, 판매자는 초등학생이었던 것이었다. 어쩐지, 딱 봐도 꽤 값나가겠다 싶은 질 좋은 니트를 너무 싸게 판다 싶긴 했다. 단돈 5천 원. 심지어 이 판매자는 빠른 판매를 위해 쿨거래시 500원을 깎아주겠다고 했다. 


  아침 등교시간이었다. 

  나는 약속시간보다 3분 일찍 도착했고, 판매자는 3분 늦게 도착했다. 덕분에 나는 북적북적한 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5분이 넘도록 애매하게 서 있었다. 검정 모자를 눌러쓰고 검정 바람막이와 레깅스를 입은 전형적인 운동복 차림으로. 뉴스에서는 초등학생 수가 많이 줄었다고들 하던데, 내가 서있던 그곳에는 끊임없이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학교 앞 횡단보도에는 몇몇 학부모님들께서 깃발을 들고 안전지도를 하고 있었다. 시꺼먼 옷차림으로 맹숭맹숭 서있는 나를 자꾸 흘끔흘끔 쳐다보셨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선생님인 척이라도 할 수 있도록 청바지라도 입고 나올걸. 이 가을의 아침 8시 20분은 너무 밝은 대낮이었다. 


  잠시 후, 노오란 염색머리가 인상적인 볼살이 통통한 여자아이가 "안녕하세요"하고 다가왔다. 4~5학년쯤 되어 보였다. 옆에는 친구가 함께 있었는데, 그 친구가 늦게 나와서 기다리느라 자기도 늦었다고 죄송하다고 했다.

  초등학생들이 바글바글한 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초등학생 판매자는 나에게 니트가 든 빳빳한 쇼핑백을 건넸고, (그의 통통한 손목에 한번 더 당황했지만, 최대한 티 내지 않고) 나는 주머니에서 5천 원을 꺼내 주었다. 초등학생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거스름돈 500원이 없다고 했다. 나는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괜찮아요. 어서 학교 가야지. 오늘 좋은 하루 보내요. 일순간 등학생의 얼굴이 환해졌다. 내가 초등학생에게 무슨 악착을 떨겠다고 500원을 거슬러 받을까.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 초등학생에게 500원은 꽤 중요했을 수도 있겠다 싶다. 아마 나는 그 초등학생에게 꽤 호사롭게 보였을 것이다. 


  학부모님들이 안전지도해주시는 횡단보도를 안전하게 건너 집으로 돌아오는데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중고나라와 당근마켓을 매우 유용하게 쓰고 있어서 거래경험(판매+구매)이 꽤 많은 편이다. 그러면서 별별 사람들을 다 만났었는데 상대방이 초등학생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동안 왜 초등학생이랑 거래한다는 생각은 못했을까. 중고물품 파는데 나이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꼭 다 큰 어른이랑만 거래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이것 또한 편견이고 선입견이 아닌가. 'no 편견'을 삶의 모토로 삼았었는데, 아주 편견 덩어리였구나. 'no 편견'은 무슨, 그냥 편견 없는 '척'하고 살았던 것이 아닌가. 아직도 멀었네. 




  내가 'no 편견'하겠다고 다짐했던 것은 배려하며 살고 싶어서였다. 


  배려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다. 배려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배려를 통해 사람은 사람다워진다. 'Manner makes man'이라는 말처럼. 


  배려는 개인 맞춤 시스템이다. 상대방에 맞춰주어야 한다.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준다든지, 함께 걷는 사람과 보폭을 맞춰준다든지 하는 매너 규칙이 있긴 하지만 이걸 천편일률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방법으로 배려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혈기왕성한 학생들에게 배려하는 것처럼 휠체어를 탄 노인에게 똑같이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배려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내가 배려할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이때 억지로 배려하는 듯한 인상을 주어서는 당연히 안 되겠지만, 배려하면서 당황함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배려하는 사람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면 배려받는 입장에서는 아주 불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받는 사람이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건 배려라고 할 수 없다.

  배려하면서 당황할 일이 대체 뭐가 있을까 싶지만, 생각보다 이런 일은 꽤 흔하다. 예를 들어,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줬는데 뒤에 오는 사람이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걸어오고 있다면? 그때 많은 사람들은 당황한다. 다리가 아픈 사람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편견이다. 내 뒤에 오는 사람은 모두 아주 건강한 사람일 거라는 편견. 


  그래서 편견은 no배려가 되고, 때로는 무례함이 되기도 한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들이 모여 매너가 되는 것 같다. 배려와 매너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예전에 뉴욕에서 생활하면서 겪었던 이런저런 일들이 기억났다. 


  사실 뉴욕에서의 처음 한 달은 실망의 연속이었다. 지저분하고 복잡했다. 사람들은 불친절했고 시끄러웠고 어딜 가나 이상한 냄새가 났다. 교통체증은 일상이었고 늘 온 사방이 공사 중이었으며 여기저기에서 쥐가 나왔다. 빠릿빠릿하지 못했고 비효율적이었다. 서울이 훨씬 깨끗하고 좋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부심이 대단했다. 세계 최고의 도시 뉴욕이라며. 뉴요커라며. 

  나는 이들의 이 자부심을 이해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의 결론은 이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자부심이 'no 편견'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아니, 물론, 편견이 하나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편견을 가지지 않기 위해(그러니까 결국 차별하지 않기 위해) 사회적 차원에서 다방면으로 어마어마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지금도 서울의 시설과 시스템이 훨씬 쾌적하고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공공기관의 일처리 속도와 병원시스템, 상업시설의 친절함은 황송할 정도다.) 


  뉴욕에서 출퇴근하며 일을 했다. 그곳은 맨해튼에 있는 정부기관이었는데, 우리나라로 따지면 시청 혹은 구청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맨해튼에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런저런 문제점을 파악하고 대응하는 일이 중심이었는데, 특히 내가 있던 부서는 장기적 관점에서 일을 하는 곳이어서, 당장의 솔루션을 결정하고 진행하기보다는 사전조사와 아이디어 회의가 주를 이뤘다. 

  여기에서 일을 배우면서, 나는 뉴욕이라는 사회가 중요시하는 게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 누구도, 어떤 이유로든 홀대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은 사람으로서, 사람이 행사해야 할 권리를 충분히 행사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모든 사람이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했다.


  쉽게 말해 노약자나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사회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니까 버스 출입구가 높아서 못 타는 일 따위는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려면 생각보다 많은 돈과 기술이 필요하고, 여러 다른 사람들은 조금 불편해진다. 휠체어도 버스에 탈 수 있게 하기 위해 뉴욕의 버스는 풍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차축이 통째로 내려앉아 버스의 높이가 도로의 높이에 맞춰진다. 타는 사람은 평지를 걷듯 버스에 탄다. 계단을 오르듯 버스에 '올라' 타지 않는다. 휠체어가 버스에 타면 버스는 다시 풍선 바람 채워지는 소리를 내며 차축이 올라가고 이동을 시작한다. 

  그러는 동안 버스에 탄 사람들은 하염없이 기다린다. 버스가 내려앉아 도로와 같은 높이가 되었다가 다시 올라오려면 시간이 꽤 걸리는데, 이걸 기다려줘야 하는 것이다. 버스 뒤에 기다리는 차들도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이 기다림은 배려였다. 버스 안과 밖에는 수많은 배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아무도 언짢아하지 않고, 무엇보다 당황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이 모든 상황은 당연한 상황인 것이다.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는 순간 자유와 권리는 침해된다.


  눈이 안 보여도 혼자 지하철을 타고 목적지까지 가는데 문제가 없어야 했다. 그러려면 세심한 안내시스템이 있어야 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배려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한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지켜주는 것이니 사회와 개인 모두에게 즐거운 일이다. 배려받은 사람은 고맙다고 한 마디 하고, 그걸 들은 사람은 "My pleasure!" 한다. "이것이 저의 즐거움이랍니다!" 


  매너다. 




  나는 "My pleasure!"라는 말이 참 좋았다. 이 간단한 한마디 말에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에요",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제가 다 기쁘네요", "이것이 저의 즐거움이랍니다", "고마워해 줘서 고마워요", "제가 고맙습니다", "덕분에 저의 하루도 좋은 하루가 되었어요",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라요!"가 다 함축되어 있는 느낌이다.

  이 말 한마디로 인해 배려하는 사람과 배려받는 사람 둘 다 기쁨의 세계에 둘러싸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정말 엄청난 배려를 받아도 배려받는 사람이 주눅 들 필요도, 눈치 볼 필요도 없는 것이다. 


  휠체어를 탄 사람이 내 앞에서 나를 위해 문을 잡아준 적이 있다. 내가 그 문에 도달하려면 아직도 한참 남았는데도 그 사람은 문을 잡고 나를 바라보며 인자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발걸음을 빨리 해서 뛰다시피 했는데, 그 사람은 괜찮다고 천천히 오라고 했다. 나는 고맙다고 했고, 그 사람은 "My pleasure!"라고 했다. "이것이 저의 즐거움이랍니다!"

  지하철에서 백발의 할아버지가 lady first라며 나에게 자리를 양보해줄 때, 나는 당황했지만 최대한 안절부절한 티를 내지 않으면서 고맙다고 했고, 그 할아버지는 "My pleasure!" 했다. "이것이 저의 즐거움이랍니다!"


  내가 가장 놀라고 감동한 건 버스에서였다. 만원 버스였고, 뉴욕 맨해튼 한복판이었고, 퇴근시간이었다. 정류장에 버스가 서자 버스의 가장 뒤의 가장 구석에서 커다란 배낭을 메고 양손에도 큼직한 가방을 든 인도계의 중년 여성이 "Excuse me!"를 연발하며 사람들을 비집고 나오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안 그래도 혼잡한 도로에서 버스가 길을 막으니 뒤에도 차가 점점 더 밀렸다. 아직도 그 중년 여성은 버스 출입문 가까이에도 오지 못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계속 "Excuse me!"를 말하는 그 중년 여성에게 버스기사는 말했다. "Take your time." 그러고도 한참 후에야 버스에서 내린 중년 여성은 버스를 향해 고맙다고 말했다. 버스 기사와 버스에 타고 있던 다른 몇몇 사람들은 "My pleasure!" 했다. "이것이 저의 즐거움이랍니다!"





  뉴욕의 노약자들은 위축되지 않는다. 나는 그 이유가 "My pleasure"에 있다고 생각한다. "My pleasure"가 삶의 곳곳에 있기 때문에 누구나 기쁘게, 그리고 당당하게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하고, 자유롭게 활동하며, 또 다른 사람들을 배려한다. 

  가끔 가난한 시각장애인을 지하철에서 만날 때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늘 크고 아름답게 노래했고 다른 사람들을 축복했다. 사람들이 낡은 모자에 돈을 넣든 넣지 않든, 그 사람은 다른 칸으로 가면서 말했다. "Wish you have a great day. God bless you!" 


  우리나라에서 가끔, 몸이 아파 장애인이 아니라 마음이 아파 장애인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참 슬펐다. 왜 그 사람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상처 받아야 했을까. 


  예전에 내가 발목을 크게 다쳐 두 달 동안 깁스를 한 적이 있었는데, 깁스를 풀고 나서도 한동안 걷는 게 힘들어 목발을 짚고 아주 천천히 걸어야 했다. 그때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신호의 길이가 너무 짧았다. 그전에 멀쩡히 걸어 다닐 때는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아직 반도 못 건넜는데 파란불이 깜빡이고 있었다. 횡단보도의 반을 겨우 지나자 빨간불로 바뀌었다.

  나는 마음이 급했다. 아니나 다를까, 멈춰있던 차들이 빵빵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길을 다 건너지 못했는데 성질 급한 차 한 대가 내 바로 뒤를 휙 지나갔다. 그러자 다른 차들도 나를 피해 요리조리 지나갔고,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울고 싶었다.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데 자동차 한 대가 내 앞에서 멈춰주었다. 운전자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손짓하며 어서 건너가라고 했다. 나는 꾸벅 인사하고 엉금엉금 길을 건넜고, 펑펑 울었다. 


  몸이 아픈 사람들이 마음까지 아플 수밖에 없는 사회였다. 나는 두어 달 아팠는데도 그렇게 위축되었는데, 몇 년 동안, 아니 몇십 년 동안 아픈 사람들은 대체 어떤 상처를 얼마나 끌어안고 살아가는 걸까. 




  배려하기 위해서는 온갖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no 편견'이 필요한 순간이다. 그래야 당황하지 않고 배려할 수 있다. 내 뒤에 오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 건강해 보이지만, 사실 남모를 아픔을 갖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 눈에 보이는 아픔이 있는 장애인일 수도 있고 한 눈에 알아차리기 어려운 청각장애인 또는 지체장애인일 수도 있다. 그뿐인가. 거동이 불편한 노인일 수도 있고, 임산부일 수도 있고, 한국말이 서툰 외국인일 수도 있다. 그리고 아주 조그만 어린아이일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은 사람이다. 사람이 아닌 것이 아니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권리를 충분히 가져야 하고, 그걸 자유롭게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걸 지켜주는 일은 아주 즐거운 일이다. 


  그러니까, 초등학생도 당근마켓을 할 수 있다. 






  그날 저녁 그 초등학생 판매자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고맙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제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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