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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워녕 Nov 20. 2020

오늘도 꾸역꾸역 글을 씁니다

브런치 작가가 된지 1년이 되었습니다. 


  낯선 단어들이 있다. 

  ①원래는 친숙했었지만 이제는 나를 떠난 단어. 그리고 ②애당초 내 삶에 들여놓지 않은 단어. 


  카페에서 브런치에 올릴 글을 쓰고 있었는데, 사장님이 다가와서 "무슨 공부해요, 학생?" 하며 말을 걸어주셨다. 나는 흠칫 놀랐다. 학생이라니. 잠깐 머뭇거리다가 나는 대답했다. "... 글 쓰고 있어요." 그러자 사장님은 "작가님이시군요!"라고 하셨다. 작가라니. 

  그날 이후 사장님은 "작가님 오셨네요! 뭘로 드릴까요, 작가님?" 하신다. 나는 너무나 부끄러워서 그 카페에 가는 횟수를 줄였지만, 아주 끊지는 않고 한 번씩 간다. 내심 좋은 모양이다. 




  ①

  나는 꽤 오랜 기간 학생이었지만, '학생'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나와는 관계없는 단어였다. 가끔 세미나나 원데이 클래스로 수업을 들을 때도 있지만, 거기서 나는 '수강생'이다. '학생'은 나를 떠난 단어였다. 


  "학생!"이라는 호칭을 들으니, 새삼 내가 짊어진 삶의 무게가 느껴졌다. 


  '학생'이라는 단어가 주는 안온한 느낌이 있다. 학생이었던 나는 굳이 애써 삶을 헤쳐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건강하게 잘 먹고 걱정 없이 잘 자는 것만으로도 나는 내가 해야 할 몫을 다 하는 것이었다. 서툴러도 귀여웠고, 했던 실수를 또 해도 괜찮았다. 게을러도, 지저분해도 괜찮았다.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집안 형편이 좋든 나쁘든, 성격이 순하든 사납든, 학생은 그저 학생이었다. 선생님들은 "너희들 그거 아직 모르지? 학생 때가 제일 좋을 때야."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말도 꼭 함께 하셨다. "너희들 그것도 아직 모르지? 너네, 지금 정말 너무 예뻐. 부탁이니까 제발 꾸미지 말아 줘."


  그 안전한 세계는 더 이상 나에게 해당되는 세계가 아니었다. 이제는 멍 때리고 있으면 한심한 사람이 되고, 게으르면 마치 죄를 짓는 기분이다. 능숙하지 못하면 온갖 것들을 빼앗기고, 손익을 계산하지 않으면 '세상 살 줄 모르네'하는 걱정스러운 눈초리가 따라온다. '학생'이라는 말 한마디에 새삼, 내가 이렇게 팍팍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참 낯선 말이 되었다. '학생'.   


  ②.

  글 쓰는 일은 나의 막연한 꿈이었다. 이루어야겠다는 결연한 의지도, 도전할만한 목표도 없었고 전업작가를 바랐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늘 끄적거렸다. 메모장이든 싸이월드든, 나는 뭔가를 늘 적어놓았다. 적어 놓은 글들로 뭘 어떻게 해보려는 것도 아니었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이 그냥 흘러 지나가는 게 아까웠던 것 같다.  


  글 쓰는 게 재미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선생님들은 항상 나를 글짓기 대회에 내보내며 '상을 타오라'고 했는데, 나는 상이고 뭐고를 떠나 거기서 글을 쓰는 게 재미있었다. (아무튼 늘 상을 받기는 했다.) 심지어는 대학 입시를 위해 하던 논술도 재미있었다. 대학생활에서는 본격적으로 글을 쓸 일이 많았는데, 일주일에 일곱 개의 레포트를 쓰면서 내 몰골은 초췌해졌지만 그래도 재미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글을 끄적거리는 건 내 일상 속에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루 온종일 레포트를 쓰고 A4용지와 이면지 더미 속에서 초췌해졌어도 나는 집에 와서 또 나의 글을 끄적거리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보고 들은 것, 마음속에 있는 온갖 것들을 끄적거리며 울었고 웃었다.  


  딱 한 번, 기자나 카피라이터가 되어볼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이내 접었다. 나는 그저 내가 쓰고 싶은 글을 내가 쓰고 싶을 때 끄적거리는 것으로 충분했다. 생계를 위해 쓰고 싶지 않은 글을 억지로 쓰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나의 '끄적거림'에 대한 모욕처럼 느껴졌다. 


  그런 내가 브런치 '작가'가 되고, 첫 글을 '발행'한 지 1년이 되었다.



  참 낯선 말이었다. '작가', '발행'.


  나의 글쓰기를 가장 적극적으로 응원해주는 친구와 공모전에도 응모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너 브런치에 써놓은 거 많잖아. 그중에 몇 개 골라서 그냥 투고해봐!"라는 말에 나는 정말 '투고'까지 했다. 그 친구와 대화를 할 때는 '수정'이라는 단어 대신 '퇴고'라는 단어를 쓴다. 그 외에도 '작품', '게재', '등단'과 같은 단어들이 대화 속에 오고 가는데, 그때마다 나는 매우 낯선 기분을 느낀다. 하지만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나는 그 친구와 '글 쓰는 일'에 대해 꽤 자주 이야기하니까. 마치 "작가님!"이라고 불리면 아주 민망해하면서도, 그래도 그 카페에 발길을 끊지 않고 한 번씩 가는 것처럼.  


  이것은 마치 연애 같다. 손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고, 입꼬리 눈꼬리도 제멋대로 움찔움찔하면서, 마음 깊은 곳이 간질간질하고 숨 쉬는 것조차 어색해지는 아주 불편한 느낌이지만, 그 거북함을 감수하더라도 꾸역꾸역 하는 연애처럼. 나는 자꾸 몸이 배배 꼬이고 표정관리도 안되지만 꾸역꾸역 그 낯선 단어들을 마주한다. 


 




  작년 11월 중순부터 브런치를 시작했고, 이제 1년이 되었다. 그동안 나는 일주일에 1~2개 정도의 글을 발행할 생각으로 브런치를 했는데, 지금까지 발행한 글이 55개인 걸 보니 이만하면 나름대로 성과도 낸 셈이다.  


  늘 끄적거리기만 하던 내가 1년 동안 브런치를 했다는 건 나의 글쓰기 세계가 조금 확장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저 조그만 초록색 '발행' 버튼이 주는 무게감 때문이다. '확인'도 아니고 '공유'도 아니고 무려 '발행'이라니. 나는 이 '발행'에 부끄럽지 않도록 짜임새 있게 글을 써보려고 노력도 해보고, 기승전결에도 한번 신경 써 보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하는 아주 사적인 글에 이렇게 저렇게 의미부여도 해보면서 1년 동안 글을 끄적거렸다. 

 

  그러면서 깨달은 게 있는데, 글을 쓰기 위해서는 꾸며내려고 해서는 안되고 숨기려고 해서는 더더욱 안된다는 것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무조건 솔직해야 했다. 안 그런 척, 예쁜 척해서는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쓰긴 쓰지만 그건 좋은 글이 아니다'가 아니라, 그냥 아예 '쓸 수가 없었다'. 한 문장도, 아니 한 단어도 이어내려 갈 수 없었다. 키보드 위 나의 손가락은 길을 잃고 허공을 꼼지락거렸다. 


  나는 원래 나를 잘 안 드러내는 편이다. 개인적인 취향이 드러나는 게 싫어서 핸드폰 배경화면도 기본 배경화면, 벨소리도 기본 벨소리이다. 지하철에서 읽을 책은 겉표지가 휘황찬란하지 않고 제목이 눈에 확 띄지 않는 아주 무난한 책으로 골라 가지고 나간다. 가끔 나에 대해 이것저것 꼬치꼬치 물어보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단답식으로 한 두 마디 대답하다가 불편함에 쓴웃음을 짓고 얼른 자리를 피하곤 한다.


  그런데 글을 쓰기 위해서는 나를 드러내야 했다. 브런치를 하는 시간은 나를 드러내지 않고서는 도저히 글을 쓸 수 없다는 걸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한 주에 1편(많으면 2편)의 글을 써서 '발행'을 눌렀는데, 7월 한 달 동안은 아무 글도 쓰지 못했다. 바빠서 그런 건 아니었다. 글을 쓸 수 없었다. 한두 문장 끄적거리고 그저 멍하니 있었다. 한 주가 그냥 지나가고, 열흘이 지나가고, 보름이 지나면서는 괜히 마음이 급해졌다. 정해진 마감시간 따위는 없었고, 아무도 나를 재촉하지 않았지만 나는 어떻게든 빨리 글을 써서 정리하고 마무리지어 올리고 싶어 계속 브런치 앞에 앉았다. 무의미한, 아무 진전 없는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영감이 떠오르면 그때 쓰지 뭐' 하는 생각에 브런치에서 손을 떼었다. 포기였다. 브런치에 대한 생각은 하나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내보기로 했다.

  그러는 중 내 브런치를 구독하고 있는 한 친구가 "왜 요즘 브런치 안 올려?"라고 물어봐서 나는 깜짝 놀랐다. 내 브런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니. 미안하고 송구하고 황송한데, 그 와중에 글을 쓸 수 없는 나는 서러웠고 안타까웠고 성질이 났다. 


  나는 왜 글을 쓸 수 없는 것일까. 왜 문장과 문장을 연결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다음 문단은 대체 어떤 내용을 채워야 하는 걸까. 다른 작가들은 대체 무슨 글을 쓰는 걸까. 책 한 권을 쓰는 사람은 대체 어떤 내용의 글을 어떻게 전개하고 마무리하는 걸까. 


  나는 다른 사람들의 브런치는 물론, 이 책 저 책 닥치는 대로 잡아 읽었다. 동시에 계속해서 나의 글을 썼다 지우고 또 썼다 지웠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나'를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는 것을. 나는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나는 자꾸 회피했고, 중요한 순간에 내뺐다. 나를 숨긴 채 글을 쓰려고 했다.  


  나는 다시 브런치 앞에 앉았다. 그래, 본격적으로 나를 한 번 드러내 보자. 


  한 달이 넘도록 쥐어짜도 안 나오던 단어와 문장들이 줄줄이 막힘없이 이어져 내렸다. 관련 에피소드가 넘쳐났고, 각 에피소드마다의 연결도 매끄러웠다. 첫 문장을 시작하고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고, 정리 한 번 하고, 오타 확인 한 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수정하고 '발행'까지 걸린 시간은 단 이틀. 그때 발행한 글이 <아, 이래서 내가 그랬구나!>이다. 이 글은 아주 그냥 나를 홀랑 다 드러낸 글로, 한 달 하고도 일주일 만에 마침내 발행한 브런치였다. 


  민망스럽게도, 이 글은 정말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았다. 최고 조회수를 기록했고, 최고 하트수도 기록했다. 



 그런데 사실 놀랐던 부분은 따로 있었다. 나는 그 글을 쓰면서 재미있었다. 나는 '굳이' 나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인데, 그런 내가 나를 '굳이' 드러내면서 재미를 느꼈다니. 다음 단계로 레벨업한 느낌 정도가 아니라, 몇 단계를 건너뛰어 아예 다른 세계에 진입한 것 같았다. 스스로를 드러내는 걸 불편해하고 꺼리던 내가 '안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즐기는 수준'에 이른 것이다. 덕분에 이 글은 나에게 아주 중요한 글이 되었다. 내 인생 그래프에서 빨간 점을 딱 찍어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 


  이후로 나는 나를 드러내는 글을 더욱 서슴없이 쓰게 되었다. (그 전에도 다 내가 드러났던 글들이지만, 그 이후로는 '더욱 서슴없이' 쓰고 있다.) 


  하지만 막힘없이 즐겁게 글을 쓰다가도, '발행'을 누르기 전에는 잠깐 멈칫한다. 누가 봐도 내가 쓴 글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우연히 이 글을 발견하고 "이 브런치 네가 쓴 거지?"라고 물어보면 어쩌지 싶을 만큼 아주 그냥 나를 홀랑 드러낸 글. 

  '발행되었습니다'라는 화면이 뜨면 그 하루 동안은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에 휘감긴다. 나를 드러내는 것이 여전히 불편해서라기보다는, 이토록 적나라하게, 그리고 뻔뻔히 나를 드러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까닭이다. 낯부끄럽고 쑥스러워 몸이 배배 꼬인다.




  낯설었던 것들이 내 주위를 맴돌고 있다. '작가', '발행', '퇴고', 그리고 '나를 드러내는 일'까지. 차마 '친숙하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나는 아직도 부끄럽다. 그러나 나는 꾸역꾸역 이 낯선 것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사랑을 받는다. 


  내심 좋은 모양이다. 


 




  가을이라 그런지, 

  보고 싶은 책이 자꾸 생겨서 하루가 멀다 하고 구입하다 보니 책상 한 켠에는 점점 높은 책 탑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가을이라 그런지, 

  쓰고 싶은 글도 자꾸 생겨서 하루가 멀다 하고 기록해놓다 보니 '작가의 서랍'에는 완성을 기다리는 글이 점점 늘어나고 있네요. 


   '작가의 서랍'.

   저는 오늘도 이 낯선 서랍 속에 또 하나의 글을 끄적여 집어넣고 있답니다.


   1년 동안 지켜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평생 잊지 못할 1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울고 웃으며 다시 또 꾸역꾸역 저를 드러내 보겠습니다. 

  저의 끄적거림이 또 다른 새로운 세계를 만나길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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