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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워녕 Dec 01. 2020

노래가 들이부어질 때

운명처럼

 

  노래는 신비한 힘이 있다.


  추억의 노래는 그 시절로 나를 들어다 놓아준다. 난 김동률의 음악을 들으면 스무 살로 돌아간다. 하루 온종일 김동률의 노래만 듣던 그런 때가 있었다. 추억 돋는다.

  또 어떤 노래는 사람을 떠오르게 한다. 잊고 있었던 사람인데, 길거리에서 우연히 들은 노래로 그 사람이 생각나는 것이다. 사람 돋는다.




  2002년, 나는 중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2002년은 월드컵의 임팩트가 워낙 강한 해였다. 그러나 그 해에 월드컵 말고 다른 일도 많이 있었다. 부활 밴드에 가수 이승철이 다시 합류해서 노래 Never Ending Story가 나온 일 같은.  


  난 Never Ending Story를 들으면 중3 때 내 짝꿍이 생각난다.

  그 친구는 중학생 특유의 겉멋이 가득한 남자 친구였는데, 학교에서 내 옆에서 계속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우리는 노래방에도 꽤 많이 다녔는데, 그 친구는 노래방에서도 이 노래만 불렀다. 질리지도 않냐고, 다른 좋아하는 노래는 없는 거냐고 내가 뭐라고 하면, 그 친구는 오히려 나에게 노래를 들을 줄 모른다고 했다. 이런 명곡을 몰라보다니, 너는 아직도 멀었다고. 나는 이승철이 부른 Never Ending Story보다 그 친구가 부른 Never Ending Story를 더 많이 들었다. 세상에, 어쩜 제목도 Never Ending Story 였다.


  최근 우연히 이 노래를 들었다. 그리워하면 언젠간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져 가기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듣다가, 나도 모르게 입으로 중얼중얼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갑자기 온갖 기억들이 물밀듯 밀려왔다.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아, 이 노래! 아, 그 친구!


  매우 반가우면서 아주 그리운 감정이 동시에 밀려왔다. 노래를 부르는 이승철의 목소리는 매우 익숙했지만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그 친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손가락 세 개로 마이크를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게 잡고 억지 바이브레이션을 넣던 그 소리가 아니었다. 이승철의 목소리는 매끄러웠지만, 정작 내 귓가에 쟁쟁한 건 그 친구의 그 터질듯한 목소리였다. 힘겨워한 날에 너를 지킬 수 없었던~♬ 아름다운 시절 속에 머문 그대이기에~

 


  노래는 논리 정연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노래도 있고, 살금살금 내 삶에 스며드는 노래가 있다. 이유는 모른다. 옛날에 어디선가 들었던 노래를 왜 지금 와서야 불현듯 떠올리는 건지, 그때는 아무 느낌 없던 노래가 왜 이제 와서 나를 줄줄 울게 하는 건지.


  글은 눈으로 보고 말은 귀로 듣는데, 노래는 그 어떤 신체기관도 거치지 않고 마음에 다이렉트로 들이부어지는 느낌이다. 모든 것을 칼같이 계산하는 이 사회에서, 노래만큼은 그 어떤 것도 따지지 않고 나의 감정을 돌아보게 한다.


  그렇게 들이부어지는 노래는 나와 아주 사적인 관계가 된다. 이 관계는 다른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유일무이한 관계다. 그 노래는 오로지 나에게 특별하게 다가오고, 나는 오로지 그 노래를 특별하게 마음에 새긴다. 노래와 나와의 비밀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과의 관계가 그런 것 같다. (이해관계로 엮인 사이 말고) 무언가를 함께 즐기고 함께 아파하는 관계에서 다른 누구도 알 수 없는 둘만의 감정과 기억들이 삶에 새겨진다. 아무리 여러 사람이 함께 어울렸어도, 결국은 딱 둘 만의 관계가 남는다.

  이렇게 남은 딱 둘에게 어떤 한 노래가 들이부어질 때, 관계는 더욱 깊어지고 은밀해진다.


  나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을 때가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흥얼거리는 그런 때. 흥얼거리고 있는지 자각도 못하고 그냥 그렇게 흥얼흥얼 하고 있다가 갑자기 현타가 와서, 지금 이 노래가 무슨 노래였더라, 하고 생각하다가, 무슨 노래인지를 떠올리기 전에 갑자기 어떤 사람이 떠오를 때면 나는 소름이 돋는다. 아련해지는 건 아닌 것 같다. 사무치게 보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사람의 모습 하나하나가 구체적으로 선명하게 떠오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 선명해지고, 더 많은 것들이 떠오른다.


  마치 시골에서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처럼. 몇 개 없는 것 같았던 별이었는데, 하늘을 계속 올려다보고 있으면 점점 늘어나는 별처럼. 평상시에는 있는지 없는지 신경도 안 쓰고 살다가, 그 날 그 시간에 유난히 점점 크게 나에게 다가오는 별들처럼.

  

  그런 노래가 나를 관통해 지나가는 날에는, 나는 하루 종일 별을 보듯 그 사람을 생각한다. 그래, 그때 그 사람이 입었던 돌청바지는 정말 별로였어. 그래도 우리가 같이 먹었던 초밥은 맛있었는데. 특히 간장새우초밥이 맛있었지. 그 사람은 짜다고 했지만, 모름지기 간장새우는 당연히 짭조름해야 하는 거지. 겨울이었고, 12월이었던 것 같은데, 두꺼운 카키색 잠바를 입고 춥다고 했지.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은 늘 추운 나보다 추위를 더 탔어. 그 사람과의 겨울은 정말 대책이 없었는데. 휴.






  얼마 전 영화 <캐롤>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No other love'라는 노래 때문이었다. 원래 이 곡은 쇼팽의 이별곡이다. Tristesse.


  아빠 없이 2년 반 째 살고 있다. 아빠가 없지만, 지금 나는 아빠가 있는 것처럼 살고 있다. 지금 내가 아무렇지 않게 지내기까지 나는 여러 단계를 거쳤다.


  아빠가 막상 없어진 그 순간부터 한 달 동안은 아빠가 없다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그때 너무 바빠서 그렇기도 했겠지만, 아빠가 없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빠가 없다는 걸 실감하기 시작한 건 두 달쯤 지나서부터였던 것 같다. 아빠가 정말 없었다. 아침에 아빠가 해준 스크램블을 먹고 싶었는데, 아빠가 없었다. 야구 정규리그가 한창이었는데, 함께 야구 보며 흥분할 아빠가 없었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아빠와 또 한참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이야기할 아빠가 없었다. 잠깐 문 열어놓은 사이 벌레 한 마리가 집에 들어왔는데, 벌레 잡아달라고 소리칠 아빠가 없었다.


  아빠가 정말 없었다.


  갑자기 집이 너무 넓게 느껴졌다. 5년을 거기서 사는 동안 한 번도 '너무 넓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갑자기 집이 너무 넓었다. 나는 그 넓은 집에서 치와와를 끌어안고 엉엉 울며 말했다. 아빠, 집이 너무 넓어.


  그때 들었던 곡이 이 Tristesse였다. 쇼팽의 이 이별곡은 나에게 그렇게 들이부어진 노래였다. 2년 전의 나는 그 넓은 집에서 이 노래와 이토록 비밀스러운 관계를 맺었었다.



  <캐롤> 영화를 보다 말고 나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2년 전의 그 감정이 고스란히 나를 덮었다. 그때 그 넓었던 집을 떠나 새로운 집에 왔지만, 노래는 나를 따라왔다. 심지어 가사가 생기고 편곡이 되어 더 아련하고 짙어진 느낌으로.


  보던 영화를 잠시 중단하고, 노래만 반복해서 듣기 시작했다. 쇼팽의 피아노곡과는 또 다른 매력의 노래. Jo Stafford라는 가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진중한 목소리로 이렇게 노래하고 있었다.

  No other love, let no other love know the wonder of your spell. (다른 사랑은 없어요. 다른 어떤 사랑도 당신의 경이로운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아빠가 나를 사랑한 모든 시간들이 생생해졌다. 아빠는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했다. 나는 이보다 더 할 수 없는 큰 사랑을 받았다. 나는 아빠와의 그 시간을 감히 잊고 지낼 수 없다. 아빠 없는 세상은 너무나 넓고 힘겨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빠를 내 삶에서 지울 수는 없었다. 손끝 발끝까지 아빠를 닮은 나는 이미 온몸으로 아빠의 존재와 사랑을 증명하고 있었다. 나의 모든 시간은 사랑받은 시간이었고, 나는 그 사랑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아빠는 지금 여기에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이보다 더 할 수 없는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다.


  나에게 다시 한번 이 노래가 들이부어졌다. 2년 전과는 조금 달랐다. 그때는 Tristesse(슬픔, 비탄)이었지만 지금은 Love(사랑)로 들이부어졌다. 2년 전에 들을 때는 '이별곡'이었는데, 이번에 들으니 '사랑곡'이 되었다. 쇼팽은 나에게 슬퍼할 수 있을 때 충분히 슬퍼하라고 했고, 캐롤은 나에게 내가 이렇게나 사랑받았다고 말해주었다. No other love.




  길을 걷다가 나도 모르게 이 멜로디를 흥얼거린다. 2년 전의 나는 문득 지금 내가 흥얼거린 멜로디가 이 멜로디라는 걸 깨달으면 나는 비탄했다. 아, 내가 또...

  지금의 나는 이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흐뭇해다. 아, 내가 또!




  나는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다고 믿는다.

  우연히 일어났다고 여겨지는 모든 상황은 사실 운명이었을 것이다.


  나는 운명처럼 그때 쇼팽의 이별곡을 들었고, 이번에 또 한 번 운명처럼 No Other Love를 들었다.

  하필 그때, 그리고 하필 지금.


  나는 이 운명 앞에 다시 치와와를 끌어안고 주저앉아 울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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