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녕워녕 Jan 15. 2021

신경 쓴 집


  집에 물이 나오지 않았다. 


  요즘 계속된 영하 20도의 추위에 수도관이 언 것이다. 나는 매일같이 아침 8시 출근, 밤 10시 퇴근을 하느라 집에 오면 그냥 바로 뻗어버렸는데, 그러느라 집을 돌아볼 여력이 없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퇴근 후 밤 10시가 넘은 시간, 부랴부랴 관리실에 전화를 했더니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물 안 나오죠? 번호 알려줄 테니까 여기로 전화하세요."라면서 전화번호 3개를 알려주었다. 한두 군데가 그런 게 아닌 모양이었다. 우리 집만 이런 게 아니라는 게 잠깐 위안이 되었다. 아무튼, 나는 또 부랴부랴 낯선 전화번호 3개를 차례차례 눌렀고, 통화가 된 기사님에게 최대한 내일 아침 일찍 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분은 빨라야 9시라고 했고, 나는 8시에 출근을 해야 한다며 징징댔다.

  다음날 아침 8시, 그분이 오셨다. 더 일찍 못 와서 미안하다면서. 나는 이렇게 빨리 와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 조금 늦게 출근해야 하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수도는 보일러실부터 수도계량기까지 꽁꽁 얼어있었다. 어쩐지, 온수만 아니라 냉수도 안 나오는 게 이상하다 싶었다. 


  기사님은 충청도 말투가 진한 분이셨다. 상황을 보시고는 나에게 느긋느긋한 말투로, 그러나 꽤 오랫동안 잔소리를 시작하셨다. 어디 여행다녀왔슈? 집을 오래 비워뒀던 거유? 아니, 보통은 이렇게 양쪽이 다 얼지는 않는데 이건 이 정도면 보통 큰일이 아닌데 말여. 지금 바깥이 영하 20도인 줄은 알고 계신 거유? 알면 물을 조금이라도 좀 틀어놓고 나가야지유. 한참을 혼나던 나는 "제가 아침에 급히 나가느라 신경을 못 썼어요."라고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기사님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작업을 시작하셨다. 


  40분 만에 물이 나왔다. 냉수도, 온수도. 콸콸콸. 장비들을 챙기는 기사님에게 나는 물어보았다. 수도가 언 집이 우리 집 말고도 많이 있나요? 많지유. 주로 어떤 집들이예요? 동네나 아파트 층수에 따라서도 그런 게 차이가 있나요? 이 질문에 기사님은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대답하셨다. 신경 못 쓴 집이쥬. 


  나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제가 신경을 못 썼어요."라고 했을 때 기사님이 더 이상 아무 말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날 밤 퇴근 후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면서 '그래, 돈은 이런데 쓰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보일러실과 수도계량기 양쪽에서 수도를 녹인 비용은 20만 원이었다. 나는 아침 댓바람부터 에누리 없이 20만 원을, 현금으로 지불했다. 아침에는 이 돈을 쓰면서 조금 속이 쓰렸는데, 밤에 뜨거운 물을 펑펑 틀어 샤워를 하면서 마음의 무거움이 다 녹아 없어졌다. 





  카페에서 간단한 브런치 메뉴를 시작했다. 아직 거창한 브런치 메뉴를 내놓지는 못했다. 지금은 샐러드와 파니니 중심이다. 저녁에 혼자, 혹은 둘이 책 보면서 홀짝거리며 맥주도 한잔씩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서 맥주 메뉴도 시작했다. 아무튼 브런치와 맥주 덕분에 토요일에는 몇몇 손님들이 카페에 앉으실 수 있었다. 


  저녁에 맥주를 주문하신 한 손님은 과일 샐러드를 함께 드셨는데, 다 드시고 나가려다 말고 다시 돌아와 나에게 말을 거셨다. (이 분은 그동안 낮에도 커피를 사러 몇 번 오셨던 분이시다.) "샐러드 값을 더 받아요. 조금 더 받지 말고 훨씬 더 많이 받아요. 아주 훠얼씬 더 많이 받아도 돼요. 정성도 그렇고, 이렇게나 신경 쓴 과일 샐러드라면, 나 같은 사람은 얼마든지 먹을 거예요. 돈은 이런데 쓰는 거죠."


  나는 우리 집 수도 얼어가는 건 신경 쓰지 못했지만, 샐러드는 신경 써서 만들었다. 나는 신경을 쓰지 않아 20만 원을 훅 써버렸고, 신경을 쓴 덕분에 돈을 더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단순히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간다고 꽁꽁 얼어붙은 수도가 녹지는 않는다고 한다. 가끔 어떤 집은 수도가 얼어붙었는데 그걸 녹이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아깝다며 그냥 지낸다고 한다. 찬물은 나오니 그냥 찬물로 살살 쓰며 살겠다고, 언젠가는 녹지 않겠냐면서. 물론 언젠가는 녹지만, 봄이 되어야 한단다. (이 와중에 봄이라니. 참 낭만적이다.)


  뜨거운 물로 샤워 딱 한 번만 해보면 '진작 돈 쓸걸'하는 생각이 들 텐데. 


  "돈 쓰길 잘했네", "역시 돈은 이런데 쓰는 거지"라는 건, 돈을 쓴 순간, 직감적으로 깨닫게 된다. 이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본능적인 납득이다. 나는 처음 20만 원을 지불할 때 그 비용이 비싸다고 생각했으나,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면서는 그게 30만 원이었어도 써야 하는 돈이었다고 수긍했다. 우리 카페에서 샐러드를 드신 손님은 처음에는 이 돈 주고 국밥을 사 먹지 싶었지만, 서빙된 샐러드를 보자마자, 훨씬 더 비싸게 주고 먹어도 하나도 안 아까웠을 샐러드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셨다. 


  이 각각의 가치들이 결정되는 개인의 순간들은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하고 판단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단숨에 결정된다. 첫 눈길에. 첫 온기에. 첫 숨결에. 이 첫 감각에, 사람은 본능적으로 '신경을 썼는지 안 썼는지', '신경을 썼다면 얼마나 썼는지'를 단숨에 알아차린다. 

  꽤 비싼 음식을 사 먹을 때, 가끔, '이 정도면, 좀 더 비싸도 사 먹었겠다' 싶은 음식이 있다. 단순히 가성비의 문제가 아니다. 신경 쓴 음식이다. 재료 관리, 조리방법, 플레이팅까지 다 하나하나 신경 쓴 음식. 우리는 한눈에, 한 입에 그걸 다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신경 쓴다는 건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다. 안 해도 되는걸 굳이.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걸 굳이. 대충 해도 되는걸 굳이. 누가 알아주나 싶지만, 만든 내가 알고, 먹는 모두가 안다. 굳이 이렇게까지 했구나. 이때 가치가 급상승한다. 브런치 메뉴를 시작한 지 3일 만에 우리 샐러드의 가치가 급상승했다. 





  신경을 쓰지 않은 대가는 참혹하다. 집에 수도가 얼어붙는다. 이번 경우에는 다행히(다행이라고 합시다...) 집이 참혹해졌었지만, 만약 우리 가게에 그런 일이 생겼다면 난 매우 좌절했을 것 같다. 카페는 수도가 얼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수도가 아니라, 카페 메뉴에 신경 쓰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갑작스럽게 몰려든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우왕좌왕하다가 어떤 한 커피가 말도 안 되는 맛으로 내려졌다면. 내가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커피는 이미 손님의 손에 건네어졌고, 그걸 한 입 먹은 손님이 '음, 너무 쓰네'라고 생각한다면. 아, 정말 아찔하다. 매일 아침 직접 커피를 맛보고 맛 조절을 하는 나의 노력들이 다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순간이다. 


  삶의 모든 것들이 그런 것 같다. 신경을 쓰던가, 신경을 안 쓰던가. 신경을 덜 쓴 것은 결국 안 쓴 것과 같다. 집안 청소하는 것도, 건강 관리하는 것도, 사람과의 관계도, 강아지 산책시키는 것도, 옷을 다림질하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쓰레기 정리하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아 죽은 화분들과, 잊힌 사람들과, 방바닥을 굴러다니는 먼지 뭉텅이들과 인바디 검사지와 병원 진단서가 주는 참혹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 뒤탈이 없고 안전하다. 하지만 대충 해놓으면 결국 한번 더 손을 대야 한다. 결국 두 번 일해야 한다. 사실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는 이유는 결국 '귀찮아서' 일 것이다. 그런데 이 '귀찮아서'의 대가는 실로 참혹하다. 그리고 잔혹하다. 신경을 별로 쓰지 않았는데도 아직 괜찮다면,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다. 하지만 언제든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참혹하고 잔혹한 일이. 






  오늘은 집 싱크대에 물을 살짝 틀어놓고 나왔다. 

  오늘 우리 집은 '신경 쓴 집'이다. 


  나는 오늘도 커피와 샐러드를 신경 써서 만든다. 

  오늘 우리 카페도 '신경 쓴 집'이다. 

 






작가의 이전글 노래가 들이부어질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