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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워녕 Jan 26. 2021

좌절하고 싶지 않아서

  

  '정말이지, 세상에 쉬운 일은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 좌절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난다. 나를 좌절하게 하는 건 열리지 않는 반찬 뚜껑이다. 공공기관에 신청한 서류가 안 나온다든지, 기대했던 면접이나 승진에서 떨어진다든지 그런 일들 말고.

  멸치볶음을 먹고 싶어서 반찬통을 꺼내 늘 하던 대로 뚜껑을 손에 잡았는데 아무리 힘을 쓰고 손가락과 손톱을 요령껏 밀어 넣어도 뚜껑이 열리지 않을 때. 온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열지 못한 반찬통을 식탁에 내려놓고 바라볼 때면 딱 이런 생각이 든다. '아, 세상에 쉬운 일이 없구나.'




  카페 사장이 된 지 한 달이 넘었다. 그동안 나는 온 동네 사람들의 관심과 걱정을 한 몸에 받았다. 장사가 안되어서, 손님이 너무 없어서 다들 힘들겠다면서 나를 신경 써 주는 이웃 사장님들. 하필 이런 때 오픈해서 어떡해요. 아직도 카페에 앉아서 못 먹죠? 또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2주 연장되었다네요. 많이 힘들죠? 아니 정말 이걸 어떡하면 좋을까요. 도움 필요하면 얼마든지 이야기해요. 할 수 있는 건 우리 같이 해봐요. 


  미혼의 젊은 여자가 대로변에 큼직한 카페를 열었으니 걱정해주시는 것도 이해가 된다. 보아하니, 다들 오다가다 만나면 다 우리 카페 이야기만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가장 안 좋을 때 시작했으니, 이제 조금씩 좋아질 일만 있겠죠. 사장님도 힘내세요! 라며 늘 웃으며 대답하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내가 금수저라서, 혹은 대단한(악착같은) 능력자라서 그런 것 같다는 소문이 이 동네에 돌고 있는 것 같다. 아닌데. 나는 영끌해서 올인한 건데. 



  지난 한 달여간 카페 일을 하면서 나는 코로나 때문에 좌절하지 않았다. 이미 이럴 줄 알았기 때문이다. 오픈할 때부터 난 마음을 굳게 먹고 있었다. '코로나로 다들 난리다. 다른 카페들은 매출이 80%가 떨어졌다고 하니 나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분명 손님이 없을 것이다. 나는 비록 가게를 오픈하지만 지금 떼돈을 벌 기대를 해서는 안된다.' 알고 있었다. 몰랐던 것이 아니다.


  그러니 나에게 코로나는 좌절할 이유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크게 좌절할만한 별다른 일이 없었다. 지금 이 시국에 자영업자에게 코로나보다 더 큰일이 뭐가 있을까. 


  이런 나를 좌절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반찬 뚜껑이었다. 

  하루 종일 일해야 하니 아침을 든든히 먹는 게 너무나 중요해서, 아침에 10분 일찍 일어나 잘 차려진 아침밥을 먹는데, 전날 고모가 만들어 가져다준 멸치볶음을 꺼내 식탁에 올려놓고 반찬통을 열려고 하니 뚜껑이 열리지 않았다. 팔근육, 어깨 근육, 등근육을 총동원해서 한참을 낑낑댔지만 열지 못했다. 끝내 열지 못한 반찬통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아침밥을 먹는데 무력감과 좌절감이 온몸을 뒤덮었다. 이럴 수가. 


  저녁에 집에 돌아와 보니 아침에 나를 좌절하게 했던 그 반찬통이 그 모습 그대로 식탁에 올려져 있었다. 나는 그 모습만으로 또 한 번 좌절했다. 저걸 열어야 할 텐데. 아무래도 못 열 것 같은데. 내일 아침은 멸치볶음을 먹어야 할 텐데. 잘 먹었다고 고모한테 전화도 해 드려야 할 텐데. 


  아침에 이어, 그날 밤 2차 전쟁이 소리 소문 없이 시작되었다. 나는 또 한 번 손가락을 요령껏 집어넣고 손목과 팔목, 어깨, 등의 힘을 한데 모았다. 어떻게든 열어야 해. 그렇게까지 그 멸치볶음을 먹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고모의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그냥 버릴 수 없어 그런 것도 아니었다. 나는 좌절할 수 없었다. 좌절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응? 내가 말이야, 코로나 때문에도 좌절하지 않았는데. 




  좌절은 한자로 折이다. 꺾일 좌(挫)와 꺾일 절(折)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좌절이란 꺾였는데 또 꺾이는 것이다. 정말이지 속상한 단어다. 잠깐 침울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단어다. 꺾였는데 또 꺾였다니. 다시 일어설 수 없을지도 모른다. 희망을 가질 수도 없는 상태. 그냥 그렇게 주저앉아 있는 상태. 


  아는 언니가 작년, 둘째 아이를 유산했다. 많이 기대했었는데 아이를 잃고 나니 그 상실감이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보지도 못했고 만져보지도 못한 아이인데 이상하게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상실감이 들었다고 했다. 거기에 더불어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져서 한 달 동안 꼼짝없이 누워있어야만 했는데, 화장실 가는 것도 너무 힘들어서 참고 참다가 간신히 기어서 한 번 화장실을 가곤 했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하며 언니는 '좌절'이라는 단어를 썼다. "좌절이 뭔지 그때 알았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첫째 아이를 너무 사랑하지만, 아이를 사랑하는 일도 할 수가 없었어. 못하겠더라고." 언니는 이어서 말했다. "딱 한 달이 지나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 '아, 설거지를 해야겠다.' 몸이 너무 무겁고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다 아픈데, 난 설거지를 하러 주방에 들어갔어. 고무장갑을 끼면서 깨달았지. 내가 이렇게 다시 삶을 시작하는구나. 내 삶의 시작은 이 설거지구나. 그날 이후 지금까지, 난 설거지를 할 때마다 그때가 떠올라. 좌절했던 내가 처음으로 내 의지로 몸을 일으켜 무언가를 한 거잖아." 


  '그깟 설거지'가 아니었다. 언니는 매번 설거지를 하면서 삶의 의지를 다져왔던 것이다. 언니는 다 먹은 밥상을 치우며 '설거지해야지!'라고 생각하며 '아, 설거지를 해야겠다'라고 몸을 일으켰던 그날 그 순간을 기억했던 것이다. 





  반찬 뚜껑과 설거지의 이 상관관계 속에서 나는 '좌절'의 메커니즘을 생각한다. '대체 이게 뭐라고' 싶은 것들로 인해 좌절하고, '대체 이건 또 뭐라고' 싶은 것들로 몸을 일으켜 삶을 다시 시작한다. 재난재해나 사건사고가 아닌 반찬 뚜껑, 그리고 일확천금이나 입신양명이 아닌 설거지. 이 별것 아닌 것들로 사람은 무력해지기도 하고 다시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니, 별것 아닌 것이 아니다. 삶은 반찬 뚜껑과 설거지로 생동생동해진다. 






  그날 밤, 기어코 반찬 뚜껑을 열었다. 

  난 여기서 좌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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