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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워녕 Jan 29. 2021

네, 제가 주인입니다.


  "주인이세요?"


  이번엔 카페 싱크대에 달아놓은 전기온수기가 고장 났다. as기사님은 땀을 뻘뻘 흘리며 1시간이 넘도록 온수기를 수리하셨다. 할 수 있는 모든 조치가 다 끝나고, 그래도 안되면 센터에 들고 가서 조각조각 분해해야 한다면서, 우선 20분 정도 기다려보자고 했다. 혹시나 물이 데워질 수도 있으니. 물이 데워질지도 모르는 20분 동안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야기의 시작은 바로 이 질문이었다. "주인이세요?"


  나를 처음으로 '사장님'이라고 부른 사람이 있었고, 처음으로 '대표님'이라고 부른 사람이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사장님', '대표님'이라고 불렸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어색하고, 간질간질하고, 이렇게 불려도 되나 싶고, 그런데 또 그게 맞긴 맞아서, 너무 당황하거나 으쓱한 티를 최대한 내지 않으려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표정을 관리하던 바로 그 순간. 그랬던 내가 '사장님', '대표님'이라는 호칭에 익숙해져서 지금은 길을 걷다가 누군가 "사장님!"하고 부르면 내가 괜히 뒤를 돌아볼 정도로 이 호칭에 적응되었다. 


  하지만 '주인'이라고 불려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주인이세요?" 


  "네, 제가 주인이에요."라고 대답하면서 나는 왠지 벅찼다. 

  문득 가슴 한켠이 울렸다. 

  아, 내가 주인이구나. 

  그렇네. 내가 여기 주인이네.

 



  나는 주인이라서 아침에 일찍 나와 가게 앞을 빗자루질한다. 밤에 눈이 많이 오면 아침에 가게 앞 눈을 쓸 생각에 아침에 조금 더 서둘러 집을 나선다. 나는 주인이라서 테이블을 계속 닦고, 의자를 줄 맞춰 정리한다. 나는 주인이라서 냉장고에 뭐가 들어있는지, 재고가 얼마나 쌓여있는지, 유통기한이 지났는지 안 지났는지를 확인한다. 나는 주인이라서 어디 불이 나간 전구는 없는지, 현재 온도는 쾌적한지, 음악 볼륨이 너무 크거나 작지는 않은지 예의 주시한다. 나는 주인이라서 하루에도 몇 번씩 가게 앞에 떨어져 있는 쓰레기는 없는지 나와서 보고 줍고, 밖에서 가게 앞을 괜히 한 번 지나가 본다. 


  나는 주인이라서 화분에 물을 주고 말을 건다. "자, 오늘도 힘내 보는 거야." 나는 주인이라서 잘못 내려진 커피가 손님에게 나가는 것보다 그 커피를 그냥 가차 없이 버리는 편을 택한다. 나는 주인이라서 가게에 오는 모든 손님들의 얼굴을 익히려고 한다. 두세 번 온 손님을 알아보고 아는척할 때 매우 즐거운, 나는 이곳의 주인이다.  


  내 주위의 몇몇 사람들은 내가 너무 힘든 게 아니냐면서 걱정해주고 있다. 아침부터 밤까지 있으려면 너무 피곤하겠다면서. 역시 돈 버는 게 쉬운 게 아니라면서. 그럼 하루에 열두 시간이 넘도록 가게에 있는 거냐면서. 손님은 좀 있냐면서. 나는 괜찮다고 하면, 아직 장사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럴 수 있다면서, 코로나 때문에 손님이 별로 없어서 그런 거 아니냐면서 그들은 나의 '괜찮음'을 평가절하했다. 아닌데. 난 정말 괜찮은데. 하나도 안 피곤한데. 


  나는 주인이라서 내 가게가 편하다. 손님이 있든 없든, 이곳은 나의 공간이다.


  하루 온종일 일하는 느낌이 아니라, 하루 온종일 나의 공간에서 놀고먹고 있는 느낌이다. 나는 나의 공간에서 먹고 싶은 것들을 먹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한다. 집에 있으면 수면바지에 뿔테 안경을 쓰고 했을 일들을 내가 좋아하는 니트 옷을 입고 카페에 나와 하고 있다. 아침에 집을 나와 또 다른 나의 집으로 자리를 옮기는 느낌이다. 밤이 되면 나는 이 집을 떠나 또 나의 집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뿐이다. 나의 공간에서 나는 평안하다.


  손님들은 나의 하루하루를 특별하게 해주는 선물 같은 존재들이다. 손님이 오면 커피를 내려주고, 음료를 만들어준다. 디저트를 내어주고, 브런치를 만들어준다. 한꺼번에 여러 손님이 몰려와 이것저것 주문하면 잠깐 정신이 없긴 하지만, 그건 그 나름대로 그날을 기억할만한 특징적인 에피소드가 된다. 



  나는 카페 일을 하면서 내가 친화력이 굉장히 좋은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아주 놀라고 있는데, 어떤 손님들과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한다. 어떤 손님은 커피 한잔을 다 마실 때까지 나랑 이야기하고 있기도 한데, 도대체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오랫동안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신기하게도, 내가 친화력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손님들도 친화력이 좋아진다. 보통은 카페 주인인 내가 먼저 다가가 "주말은 잘 보내셨어요?", "아침은 드시고 나오시는 거예요?", "커피맛 어떠세요? 괜찮으시죠!"라고 말을 거는 편인데, 요즘 손님들이 먼저 다가와 "사장님! 오늘은 비가 오니까 산뜻한 커피를 먹어야겠어요", "지난번 커피 정말 너무 맛있어서 오늘 또 먹으러 왔어요", "사장님! 여기 있는 책 다 사장님 거예요? 빌려가도 돼요?"라고 말을 거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오늘 오전에는 샐러드와 바닐라라떼를 드시던 한 손님이 갑자기 전화 한 통을 받으시더니 "다 못 먹고 가서 죄송해요, 다음에 다시 와서 천천히 먹을게요"라며 급하게 나가시길래, 나도 같이 뛰어나가 쿠키 한 봉지를 손에 쥐어주면서 "이거라도 드시면서 가세요! 배고프잖아요!" 했더니 그 손님은 "사장님 이렇게 고마워서 어떡해요. 시간 여유 가지고 다시 올게요!" 하며 쿠키를 손에 들고 뛰었다. 주인과 손님의 미친 친화력이 콜라보레이션을 이룬 케이스였다.  


  어떤 분들은 한 달에 한 번 동호회 모임을 하시는지, 여러 지역에서 네다섯 분 정도가 모여 이 동네에서 식사를 하시는데, 식사 후 우리 카페에 와서 커피를 드신다. 어제 두 번째로 오셨는데 내가 아는 척을 하자, 너무나 좋아하시면서, 집 앞 카페 쿠폰은 안 받아도 여기 쿠폰은 챙겨놓았다면서 쿠폰을 내미셨다. 연세 지긋하신 아저씨 손님들이셨는데, 커피 드시는 자리에 찾아가서 커피맛 어떤 거 같으냐고 물어보니 너무 좋다면서, 나한테 혹시 카페에 아르바이트생 필요하면 자기를 알바로 써달라는 귀여운 투정까지 부리셨고, 나는 "너무 좋죠!"라고 했지만, 정작 뒤에서 설거지하던 진짜 우리 알바생은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이 아르바이트생은 아주 싹싹하고 손님 응대도 친절하게 잘하는데, 한 번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장님, 아무래도 알바생의 친절과 사장님의 친절은 뭔가 다르네요. 저는 제가 되게 친절하게 한다고 하는 건데, 사장님이 하는 건 도저히 못 따라 하겠어요."  


  이 말을 듣고 나는 나를 돌아보았다. 혹시 내가 그동안의 사회생활에서 숙련된 스킬을 사용하는 건가. 친절하게 한다면서 닳고 닳은 사람의 면모를 한껏 내보이는 건 아닌가. 혹시 어떤 손님들에게는 내가 징그러워 보이진 않았을까.

 

  며칠 동안 이 고민을 했다. 이게 나의 친절인 건지, 사회적 스킬인 건지. 결론은 이렇게 내렸다. 아니지만, 조심하자. 나는 친절한 게 맞았다. 똑같은 친절한 말을 이 손님, 저 손님에게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손님'에게만 할 수 있는 말을 했고, '그 손님'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는 느낌으로 유대감을 쌓았다. (하지만 조심할 필요는 있었다. 내 안에 잠자코 있는 단순 영업 멘트와 제스처가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올지 나도 모르는 일이니.)


  각 사람에게 맞는 특별한 대접을 하면서 생색도 조금 낸다. "손님한테만 제가 특별히 해드릴게요." 그렇게 손님들은 한 사람 두 사람 자기의 이름을 나에게 알려주고, 한 번씩 더 올 때마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 손님들은 다른 사람을 데리고 와서 "우리 엄마예요!", "우리 회사에서 제가 가장 아끼는 후배예요"라며 소개를 시켜주기도 한다. 나는 "어머나 반갑습니다! 더 정성껏 커피 내려드려야겠어요!"라며 호들갑을 떠는데, 그러면서 우리의 관계는 조금씩 더 깊어진다. 


  이렇게 개인적인 친분을 쌓는 일은 내가 주인이라서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여기서 일을 하는 게 아니므로. 나는 나의 공간에서 놀고 먹다가 나를 찾아온 사람을 반갑게 맞이하고 즐겁게 대접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내 집에 온 손님을 기억하는 게 당연했고, 그래서 두 번 만나면 아는 척하는 게 당연했고, 그 사람과 나눈 이야기를 기억하는 게 당연했다. 


  나는 주인이므로. 


  저녁에는 한 손님이 선물을 주셨다. 원두를 구매할 수 있냐고 물어보신 분인데, 내가 직접 핸드드립으로 시연도 하고 맛도 보게 해 드렸더니 가방에서 주섬주섬 카스타드 하나를 꺼내 주셨다. 나는 카스타드를 두 손에 고이 받아 들었다. 아, 나의 손님. 손님을 떠나보내고 나는 한참을 카스타드만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다른 손님들을 혼자 맞이하느라 우리 알바생이 잠시 분주했지만, 나는 이 카스타드와의 시간이 너무나도 중요했다. 손님에게 받은 첫 선물이었다. 아니, 그 손님이 선물이었다. 아, 나의 손님. 







  네, 제가 이 카페 주인입니다. 

  저희 집에 놀러 오세요. 극진히 대접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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