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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워녕 Jul 30. 2020

아, 이래서 내가 그랬구나!

타고난다는 것 


  나는 아빠를 닮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엄마의 표현에 의하면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빠만 닮았다'. 눈, 코, 입, 얼굴형, 손가락, 발가락... '사실 넌 주워온 애야'라고 말할 때는 아빠도 말하면서 큭큭거렸고, 듣는 나도 어이가 없어 큭큭거렸다. 

  엄마의 외모는 하나도 닮지 않았다. 쌍꺼풀이 짙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엄마를 닮았더라면 '참 예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을 텐데, 나는 아빠만 닮아서 '귀엽다'는 말을 들을 뿐이었다. 50%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엄마를 닮은 구석이 있어야 맞는 게 아니냐며 엄마가 안타까워할 만큼 나는 아빠만 닮았다. 


  성격도 아빠 쪽에 가까웠다. 아빠와는 참 잘 맞았다. 아빠와 있으면 편하고 재밌어서, 어렸을 때부터 나는 엄마보다는 아빠가 놀아주는 걸 더 좋아했다. 엄마와 노는 건 왜인지 재미가 없었다. 아니, 불편할 때도 있었다. 내가 꽤 자라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엄마랑은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았다. 

  엄마와는 쇼핑을 할 때조차 별로 말하지 않았다. 그냥 필요한 것을 샀고, 밥 먹고, 얼른 집에 오는 게 전부였다. 집에 단 둘이 있을 때면 그냥 각자 방에 들어가 있거나 TV를 보았다. 그러다가 아빠가 집에 오면 나는 말을 쏟아냈다. 세상의 온갖 말들. 


  나는 아빠와 놀 때 가장 재밌었다. 아빠와 내가 대화하는 걸 볼 때면 엄마는 늘 '똑같이 생긴 둘이 똑같이 앉아서 똑같은 표정으로 얘기한다'고 했다. 둘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며. 안 그래도 똑같은데 그렇게 계속 붙어있으면 지겹지도 않냐며. 생긴 것도 똑같은데 둘이 말하고 생각하는 것도 어쩜 그렇게 똑같냐며. 너는 분명 내가 낳은 게 맞는데 나를 닮은 구석은 정말 하나도 없는 것 같다며.


  내가 엄마에게 대하는 것과 아빠에게 대하는 것이 얼마나 달랐는지는, 내가 혼자 외국생활을 하면서 아주 극명하게 드러났다. 한 번씩 집에 전화할 때가 있었는데, 엄마와는 통화시간이 2분을 넘지 않았다. 잘 있냐, 잘 있다, 밥은 뭘 먹었냐, 빵을 먹었다, 밥을 먹지 그러냐, 빵을 먹는 게 더 편하고 맛있다, 그래도 밥을 먹는 게 좋은데 반찬을 좀 보내주랴, 필요 없다 어차피 밥 잘 안 먹는다, 잠은 잘 자냐, 필요한 건 없냐... 뭐 이런 대화였다. 어제 전화하고 오늘 또 전화해도 이런 질문과 대답만 했으니 전화통화가 재밌을 리가 없었다. 


  아빠와의 전화는 달랐다. 최소 30분은 기본이었다. 아빠와 통화할 때는 어떤 사람을 만났는지, 그 사람은 오늘 무슨 옷을 입고 왔는지, 요 며칠 계속 비가 오는데 레인부츠를 살지 말지와 같은 아주 세세한 것들을 말했다.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누굴 만났는지, 책을 보다가 어떤 인상 깊은 문장을 보았는지, 어제 본 드라마는 무슨 내용이었는지와 같은 것들을 나에게 이야기했다. 


  한 번은 아빠가 저녁에 프라이드치킨과 양념치킨을 먹고 싶다면서, 내가 집에 같이 있으면 둘 다 시키면 되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으니 한 마리만 시켜야 하는데, 그러면 둘 중 뭘 시켜야 할지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나는 반반 치킨으로 시키는 게 좋겠다는 현명한 조언을 했고, 아빠는 세상에 그런 것도 있냐며 역시 우리 딸이 훌륭하다고 감탄하였다. 나는 아빠 때문에 치킨을 먹고 싶어 졌으니 어쩜 좋으냐고 했는데, 그러면 아빠는 치킨을 먹으라고 했다. 여긴 반반 치킨 같은 건 없다고 하자 아빠는 프라이드랑 양념 둘 다 먹으라고 했다. 내가 혼자 먹기 너무 많다고 하자, 그러면 친구들을 여러 명 불러내서 나보고 괜히 한 턱 쏘라고 했다. 내가 치킨 한 번 먹겠다고 그렇게까지 하는 건 빠듯한 살림에 불필요한 지출인 것 같다고 하자, 아빠는 잠깐 고민하다가 얼마면 되겠냐며 돈을 계좌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딸 친구들한테 아빠가 치킨 사주는 게 아깝겠냐면서. 

  그러고 나서도 '얼마면 되겠어?'라는 대사가 어느 드라마에 나왔던 대사였는지, 치킨은 BBQ에서 시킬지 멕시카나에서 시킬지, 양념치킨 말고 간장치킨을 시키는 건 어떨지, 뼈 있는 치킨을 시킬지 뼈 없는 치킨을 시킬지와 같은 이야기가 이어졌고 필리핀에서는 치킨을 시키면 밥을 함께 준다는 이야기까지... '치킨'이라는 주제 하나로도 우리는 한참을(정말 한참을!) 통화했다. 그러다가 엄마가 옆에 있다고 전화를 바꿔주면, 순식간에 다시 또 재미없는 통화가 되었다. 밥은 먹었냐, 잠은 잘 자냐, 필요한 건 없냐...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나는 안다. 엄마는 나를 굉장히 사랑했다. 아마 엄마 인생에서 나보다 더 사랑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엄마도 나와 30분씩 통화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엄마를 충분히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엄마는 나와는 맞지 않는다고 여겼다. 우리는 너무도 다르다고.






 

  30대를 살다 보니 주변에 아기를 키우는 집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가까운 친구들이 아기를 낳아 키우며 엄마가 되는 모습들을 지켜보고 있다.  


  모든 아기는 각자 다르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날 수는 있지만 그 누구도 비슷하지 않다. 아들이라고 해서 다 같은 아들이 아니고, 딸이라고 해서 다 같은 딸이 아니다.

  타고난 성향에 따라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 아기가 있고, 하루 종일 꼼짝도 안 하는 아기가 있다. 모든 의사표현을 서럽게 우는 걸로 표현하는 아기가 있는가 하면, 기저귀가 더러워져도 맹숭맹숭 있는 아기가 있다. 각자 취향도 어찌나 분명한지, 어떤 아기는 빨간색 쪽쪽이를 좋아하고 어떤 아기는 2L짜리 생수통을 좋아한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일부러 가르쳐주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아기들. 이 아기들은 타고난 본연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어떻게 감정을 표출하는지, 어디에 흥미를 두는지, 관심 있는 대상에는 어떻게 다가가는지, 아기의 태도는 저마다 분명하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아무런 계산도 하지 않고 타고난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간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아기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생김새는 물론, 아기의 모든 행동과 감정에서 아기의 부모가 보인다. 아기들은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채 그저 타고난 대로 숨 쉬고 느낄 뿐인데, 자기 부모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자기 부모처럼 움직인다.  


  '선천적으로 타고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새삼 깨닫는 요즘이다. 한 사람이 타고나는 것들이 사람에게 얼마나 대단한 것들인지. 물론 이후의 교육이나 사회화 과정에 따라 조금씩 바뀔 수도 있겠지만, 타고난 성향 자체가 아주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갑자기 우연히 생겨난 게 아니라, '부모'라는 근거가 그 '타고남'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지어 논리적이다.  


  어찌 보면, 타고난 것이 한 사람의 존재 전체를 이루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 또한 이런저런 교육을 받고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다듬어지고 만들어진 줄 알았지만, 지금의 나를 보면, 타고난 모습 그대로의 내가 보인다. 어릴 적 사진을 보아도 나는 타고난 모습 그대로이고, 그 모습 그대로 자라 지금의 내가 되었다. 나이가 들면서는 나도 알지 못했던 또 다른 타고난 모습이 드러나기도 했다. 




  외국으로 입양되어 훌륭한 부모님 밑에서 풍족하게 자란 사람이 친부모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접할 때가 종종 있다. 한국말도 전혀 못하는 사람이 처음으로 한국이라는 나라에 와서 고생 고생하며 수소문하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자기를 길러주고 보살펴준 부모가 진짜 부모지, 친부모는 그저 낳기만 했을 뿐 자기들의 인생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는데 왜 친부모를 찾고 싶은 걸까. 대체 왜. 


  이제는 그 이유를 조금씩 알 것도 같다. 단순히 궁금해서, 한 번쯤 얼굴이나 보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에 대해 알고 싶었을 것이라고 감히 짐작해본다. 아무리 그곳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았어도, 알 수 없는 곳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기분이었을 것이다.

  외모야 어쩔 수 없다 치고(물론 외모도 중요한 부분이었겠지만), 분명 그들이 타고난 성격과 성향이 있는데, 이게 어디서부터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좋아하는 것들을 왜 좋아하는지, 싫어하는 것들은 왜 싫어하는지. 어떤 상황이 일어났을 때 본능적으로 대처하는 모습, 순간적으로 차오르는 감정, 분명 그 모든 것들이 본인의 모습인데 이유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이었겠지. 그래서, 그러니까 아마 이 맥락에서, 그들의 모든 인터뷰에는 '존재'라는 단어가 필연적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친부모를 찾고, 그들의 얼굴을 보고, 손짓 발짓으로 그들과 대화하고, 밥을 먹으며 잠깐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찾는다. 아, 이래서 내가 그랬구나. 






  얼마 전에 우리 엄마를 아는 어떤 분이 나를 보고 엄마를 많이 닮았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분이 나를 놀린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엄마를 닮았다'는 말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언제부턴가, 정말 내 얼굴에서 엄마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울을 보면 항상 아빠의 모습만 보였었는데, 이제 엄마의 모습도 조금씩 보인다. 눈, 코, 입이 달라졌다는 말이 아니다. 엄마의 표정, 엄마의 분위기가 내 얼굴에서 보인다. 특히 다른 사람이 찍어준 사진으로 내 얼굴을 보면 엄마의 얼굴이 많이 보인다. 이럴 수가, 내가 엄마를 닮다니.  


  엄마가 도맡아 하던 일들을 내가 하고 있다. 햇수로 10년째다. 친구들은 나의 생활을 '독립생활', '자취 생활', '싱글라이프'라고 하지만, 실상은 '주부 생활'에 가깝다. 나는 '나 혼자 산다'와 같은 자유와 낭만을 실현했던 것이 아니었다. 내 의지는 없었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던 것부터 시작이었으니까. 갑자기 집안의 모든 살림을 책임지고 꾸려나가는 생활. 용돈과 아르바이트비 정도 규모의 경제활동만 하던 내가 '가계'를 이끌게 된 것이다.

  이십 대 중반이었던 나는 갑자기 나에게 떠맡겨진 일들에 부담을 가지면서도 하나씩 차근차근 할 수 밖에 없었다.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검색도 해보고 몇 군데 맘카페에도 가입했다. 은행이란 은행은 다 들어가서 상담했다. 법률사무소와 부동산에 무작정 찾아가서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10년을 보내고 지금이 되었다. 그 결과 지금 나는 혼자 살고 있지만, 매우 안정적으로, 꽤나 능숙하게 '주부 생활'을 하고 있다. 


  주부 생활을 하며, 꽤 큰 규모의 돈이 왔다 갔다 하는 현장에도 직접 개입해보면서 우리 엄마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체감할 수 있었다. 엄마는 이런 수많은 일을 하고 있었구나. 그러면서 동시에 깨달은 것이 있는데, 엄마의 주부 생활과 나의 주부 생활은 무척 닮아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정식으로 살림을 배우지 않았는데도, 지금의 내 살림살이는 엄마의 살림살이를 빼닮았다. 


  단적인 예로, 나는 손이 크다. 내가 이걸 알게 된 것은 본격적으로 '요리'라는 것을 시작하면서부터다. 라면이나 끓이고 계란프라이나 하던 내가 따끈한 국물에 냄비밥을 하려다보니 재료손질과 보관, 이런저런 레시피들과 요리꿀팁을 찾아보기 시작했는데, 이것저것 시도하다 정신을 차려보면 내가 너무 많이 만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요리가 서툴러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1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나에게 제일 어려운 것은 딱 1인분만 하는 것이다. 

  가끔 우리 집에 친구들이 놀러 와서 밥을 해먹일 때마다, 나는 늘 너무 많이 먹인다. 한 친구는 나에게 '큰 손'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재료 손질을 하고 볶고 끓이는 단계에서도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장을 볼 때부터 많이 보는 편이었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갈 때도, 마트에 들러 과자나 조금 사가야지 했던 것이 핸드카트 한가득 끌고 가니 친구가 '아니 이게 다 뭐냐''전쟁 났냐'라고 하기도 했으니까. 장을 보거나 요리를 할 때, 나는 늘 "아무래도 부족할 것 같은데..." 하며 조금씩 더 사고 조금씩 더 넣는다. 


  난 나의 '큰 손' 스킬이 나올 때마다 실실 웃으며 엄마를 떠올린다. 나의 '큰 손'은 전적으로 우리 엄마로부터 받은 것이다. 우리 엄마는 달랑 세 식구 먹을 잡채를 김장용 빨간 다라이에 했으니까. '팬트리'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부터 우리 엄마는 항상 창고가 구비되어 있어야 했고, 가장 큰 냉장고가 집에 있어도 냉장고는 늘 비좁았다. 

  시장에서 장을 볼 때면 양 손 가득 들어 올리고도 손이 모자라 나에게 전화해서 시장으로 나와달라고 했는데, 항상 내 양 손까지 모자라도록 장을 봤다. 결국 아빠에게 차 갖고 나오라는 전화를 또 해야 했는데, 이게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이러니까, 이럴 거면 제발 좀 나를 부르지 말고 그냥 처음부터 차를 부르라고 툴툴대면 엄마는 '오늘은 조금만 살 생각이었어'라고 말했다. 결국 차를 가지고 나온 아빠가 아니, 대체, 세 식구 먹는데 뭐가 이렇게 많이 필요한 거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부족할 수도 있으니까."


얼마전 산책하다 만난 똑닮은 토끼 두 마리


  이 뿐만이 아니다. 돈을 쓰는 분야, 즉 돈을 펑펑 써도 아깝지 않은 곳과 한 푼도 쓰고 싶지 않은 곳을 가르는 나만의 기준이 있는데, 생각해보니 이것도 엄마를 닮았다. 아빠가 부대찌개와 만둣국을 좋아해서 전문음식점에 들어가서 먹자고 하면 엄마는 대체 그런 걸 왜 돈 주고 사 먹느냐고 했었는데, 지금의 내가 그렇다. 이상하게, 김치찌개와 찐만두는 사 먹겠는데, 부대찌개와 만둣국은 사 먹기 아깝다. 


  돈을 쓰는 모습에 있어서도 나는 엄마를 닮았다. 엄마가 그랬듯, 나는 절대 충동구매를 하지 않는다. 5천 원짜리 티셔츠 하나를 사더라도 온갖 군데에서 품질 비교, 가격비교를 해 본 후 구입한다. 불필요한 지출은 하지 않고, 불확실한 미래에는 조금도 의지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차피 쓰는 것이라면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더라도 구비해놓는다. 언제든 정말 필요해졌을 때 없어서 못 쓰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게 나의 철칙이므로. 그러고 보니 이것 또한 엄마의 철칙이었다. 

 

  이제 보니 나는 엄마를 많이 닮았다. 나는 아빠만 닮은 줄 알았는데. 엄마를 닮은 구석은 하나도 없는 줄 알았는데. 잠자코 웅크리고 있던 내 안의 엄마의 모습이 어느새 내 삶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나의 모습은 나의 부모님에게서 똑같이 발견할 수 있다.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여기에 이렇게 존재하고, 나의 부모님 또한 이렇게 여기에 존재한다. 




  1년에 딱 한 번만 엄마에게 전화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1년에 딱 한 번만. 엄마와 말하고 싶다. 이제는 엄마와 대화를 잘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밥 먹었냐, 잠은 잘 잤냐, 뭐 이런 말 말고. 엄마에게 말하고 싶다. 

  "엄마! 내가 엄마를 닮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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