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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워녕 Jun 24. 2020

비 오는 날이 좋아졌다. 다행이다.


  하루 종일 비가 온다. 비 오는 오늘이 좋다.




  나는 원래 비 오는 날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비가 오면 울적해진다는데, 나는 비가 오면 괜히 짜증이 났다. 이유를 대라면 열 손가락이 모자랄 만큼 댈 수 있었다.


  우선 하루 종일 온 세상이 흐린 게 싫었다. 내 느낌으로는 온 사방이 흐리멍덩해지는 기분이었다. 습한 공기가 몸에 다가오는 게 싫었고, 숨을 쉴 때 코 속으로 들어오는 것도 싫었다. 비 특유의 그 비릿한 냄새도 싫었다. 

  비 오는 날은 평상시보다 조금 더 추워지는 것도 나는 싫었다. 안 그래도 차가운 내 손과 발은 비 오는 날만 되면 조금 더 차가워졌다. 

 

  우산을 쓰고 밖에 돌아다니는 것도 싫었다. 우산을 쓰는 자체가 번거로웠다. 우산을 쓰고 길을 걸어가면 길이 좁아져서 마주오는 사람을 마주치는 것도 싫었고, 두 세 사람이 우산을 쓰고 걸어오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비 오는 날 내가 다른 사람과 함께 길을 걷는 것도 싫었다. 우산 하나로 같이 쓰든, 각자 우산을 쓰든 그냥 걷는 것도 불편한데 거기다 대화까지 해야 하니 불편함에 불편함이 더해졌다. 

  실내에 들어갈 때는 우산을 접어서 들어야 하는 것도 싫었다. 특히 우산에서 빗물이 줄줄 떨어지면 바닥이 물 바닥이 되는데 그러면 미끄러워질뿐더러 지저분해지는 데, 정말 싫었다.


  비 오는 날은 항상 옷이 축축해졌다. 비가 많이 오든 적게 오든, 우산을 쓰든 안 쓰든 아무튼 옷은 축축해졌다. 심지어 비바람이 부는 날은, 그러니까 온몸으로 비를 다 맞아야 하는 그런 날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바닥에 고인 물을 피해 다녀야 하는 것도 스트레스였고, 그러는 와중에 물 웅덩이를 잘못 밟아 신발과 옷 젖으면 울고 싶어 졌다. 가끔 어떤 차는 도로를 질주하며 물웅덩이를 철썩 내리찍고 지나갈 때가 있는데, 그럴 때 옆에서 물폭탄을 맞으면... 


  심지어는 비가 '주룩주룩' 온다는 표현도 마음에 안 들었다. '부슬부슬'도 별로였고, '후드득후드득'도 별로였다. 아무튼 다 싫었다. 대체 왜 비는 '소복소복' 오지 않는지. 


  그래서 나는 웬만해서는 비 오는 날 정해진 스케줄 이외에 다른 스케줄은 일체 잡지 않았다. 개인적인 약속이 있으면 취소했다. 다른 급한 일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면서까지.

  비 오는 날은 정해진 스케줄이 끝나면 곧장 집에 왔다. 집에 와서 밥을 먹고 그냥 TV를 보다 일찍 잤다. 비 오는 날은 배달음식도 시키지 않았다. 창밖을 보며 비 오는 걸 구경하지도 않았다. 그 흐리멍덩한 뿌연 색을 보고 있으면 내가 다 흐리멍덩해지는 것 같았다. 비 오는 날은 밤도 괜히 흐리멍덩했다. 밤하늘도 까만 밤하늘이 아니라 흐리멍덩한 밤하늘이었다.

 

  나에게는 빗소리도 시끄러운 소리였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이면 그 소리가 그렇게 귀에 거슬릴 수가 없었다. 음악이라도 들으려고 하면 빗소리가 귀에 거슬려 이어폰을 꽂고 볼륨을 높여 음악을 들을 정도였다. 새벽에 천둥 번개가 치면 집에 있는 강아지들이 놀라 거실로 뛰어나왔는데, 그러면 졸린 눈으로 어정어정 기어 나와 강아지들을 진정시켜야 하는 내 신세를 한탄하기도 했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비가 오는 날이면 빗소리를 들으려고 하루 종일 베란다 문을 열어놓는다.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고 (혹은 아무 음악도 틀지 않고 적막하게) 비 오는 걸 구경하고 앉아있기도 하고, 괜히 우산 쓰고 바깥에 나가 비 오는 거리를 걸어보기도 한다. 옷과 신발에 빗물이 튀더라도 크게 상관하지 않게 되었다. 습한 공기도, 축축해지는 기분도 그렇게 나쁘지 않아 졌다.  


  대체 내가 왜,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이렇게 달라졌는지는 모르겠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달라졌다. 나는 나의 이 갑작스러운, 그러나 아주 자연스러웠던 이 변화를 감지한다. 나는 비 오는 날마다 나의 이 변화에 감동하고 있다. 

 

  가장 놀라운 변화는 이 흐린 날이 '흐리멍덩'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뭐랄까, 분위기 있고 차분한 느낌이면서 동시에 신선한 느낌이 든다. 이 '신선한 느낌'이란, 내가 본격적으로 화분을 키우면서 알게 된 느낌이다.

 

  나는 꽃도 좋아하지만 그보다는 풀과 잎들을 더 좋아하는데, 그래서 화분을 키울 때도 잎사귀 위주의 식물들을 골라 키우는 편이다. 식물들의 초록초록함을 보고 있자면 이들의 색깔은 '초록색'이 아닌 '초록빛'이다.  


  이들은 햇빛이 찬란할 때도 초록빛으로 빛나지만, 흐리고 비 오는 날에도 초록빛으로 생생하게 빛난다. 물감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 생생함. 온 세상이 회색빛으로 뒤덮인 그런 비 오는 날, 풀들은 초록빛을 내뿜는다. 일반적으로 그림 속의 회색은 모든 색을 잡아먹는 색이지만, 풀들의 초록빛은 엄청난 에너지로 이 세상의 회색을 뚫고 나온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면 나뭇가지가 꺾일 것 같은 위태함 속에서도, 온 이파리가 세찬 바람에 휘둘리면서도, 초록빛은 오히려 생생해진다. 그 초록빛은 한밤중에도 빛을 발하는데, 온 세상이 캄캄해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초록빛은 두드러진다.


  이 초록빛의 생생함은 공기를 움직인다. 초록빛의 공기는 깨끗하고 선선하다. 부슬부슬 비가 오는 날이면 비 특유의 비릿한 냄새와 땅에서 올라오는 흙냄새가 온 세상을 가득 채운다. 그러면 초록빛은 비 냄새와 흙냄새가 나는 공간에 자신들의 에너지를 뿜어내는데, 그러면 습하고 무거웠던 공기가 담백해지고 선명해진다.


  나는 이 냄새와 이 공기가 좋아서, 비 오는 날 창문을 열어놓고 한껏 숨을 쉰다. 숨을 쉬면서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초록빛이 살아있고, 땅이 살아있고, 세상이 살아있으며, 그리고 내가 이렇게나 살아있다.


  비 오는 날을 그렇게나 싫어했던 나였는데, 이제 비 오는 날을 받아들일 만큼, 아니, 충분히 즐길 수 있을 만큼 나는 성숙해졌다.




 

 어른의 세계에 들어와 살다 보니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게 되는 어른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많은 경우, 그런 분들은 얼굴과 눈빛에서부터 그런 성품이 드러나곤 했는데, 초록빛의 생생함과는 다른 그런 모습을 마주하면 나는 손끝, 발끝에서부터 거부감이 들곤 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는커녕 자기 기분만 우선시하고, 본인의 기준만을 고집하고 강요하며, 온갖 편견과 선입견들로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그런 어른들. 젠틀한 척 하지만 완고하고, 연륜 있는 척 하지만 알고 보면 온갖 술수와 잔머리로만 세상을 살아온 그런 어른들.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막상 본인은 전혀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예의를 요구하지만 정작 본인은 주위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그런 어른들. 


  요즘은 그들을 한 단어로 간단하게(너무 간단해서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간단하게) 표현한다. '꼰대'라고. 왜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꼰대가 되는 걸까. 모든 사람은 점점 꼰대가 될 수밖에 없는 걸까.


  어리고 젊은 사람과 이미 어른이 된 사람, 즉 꼰대와 꼰대가 아닌 사람의 차이는 '자세'에 있다고 본다. 내가 모르는 것들을 배우려고 하는 '자세', 나의 생각과 다른 것들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자세',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최소한 알아보려고는 하는 '자세'. 


  어린 사람들은 책을 보고 공부를 하면서도 배우지만, 다른 사람들을 보고 따르면서도 배운다. 그러면서 새로운 것들을 쉽게 받아들이고 배운다. 이들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배울 것들이다. 새로운 노래, 새로운 기술, 새로운 사람들에 어떤 고정관념도 가지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미 어른이 된 사람들은 새로운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데 많이 주저한다. 새로운 노래도, 새로운 기술도, 새로운 사람들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보다 이게 더 좋은 거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본인은 그냥 원래 있던걸 쓰는 게 편하다며 새로움을 거부한다.

 본인이 익숙한 것들 이외에 다른 것들은 굳이 배우려 하지 않는다. 이렇게 이미 고착화된 본인만의 세계에서 그들은 그들과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밀려드는 새로움이 넘쳐나 감당할 수 없게 되면 고작 이렇게 대처한다. "요즘 애들은 틀려먹었어.", "나 때는 말이야."


  내가 가장 경계하고 조심하는 부분이 바로 이런 부분이다. '받아들임'을 불편해하지 말 것.

  지금 우리의 세상은 시간마다 새로운 정보가 쏟아지고, 기술은 나날이 발전해서 시대를 이끌어가고, 마냥 어린애 같았던 사람들이 어느새 다 커서 자기 의견을 똑부러지게 말하는 세상이 되었다. 단순히 '귀찮다'는 이유만으로 그 모든 것들을 배척하고 멀리한다면, 아마 나 또한 순식간에 나 혼자만의 세계에 갇힐 것이다.


  '혼자만의 세계'에 갇힌다는 것은 그 세계가 아닌 다른 것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혼자만의 세계에 갇히면 내 생각만 옳다고 여기고, 따라서 다른 사람의 생각은 다 틀린 생각이 된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을 존중할 수도, 배려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렇게 혼자만의 세계에 갇힌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꼬일 수밖에 없다. 세상의 많은 것들이 거북해지고, 사람들은 전부 다 '글러먹은' 것처럼 여겨지고, 그러면 온갖 것들이 다 못마땅해진다.


  못마땅해하는 태도로 세상을 살고 싶지 않다.


  사실 나는 문제를 잘 파악, 분석하고 비판을 잘하는 성향을 타고났는데, 이게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할 때는 장점이 되기도 하지만, 내 인격 형성의 측면에서는 별로 썩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면, 주위 모든 것들에 대해 평가하고 판단하는 습관은 선함이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래도 배워온 예절이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며 친절하게 싱긋싱긋 웃으며 말할 수는 있었어도, 실제의 나는 매우 부정적인 사람이었다. 주위를 둘러볼 때 부족한 것들이 먼저 눈에 띄었고, 그래서 늘 속마음 한 구석에서는 못마땅함을 간직한 채 살았다.

 

  20대에서 30대로 넘어오는 시간은 나 스스로 '그러지 말아야지', '비판하지 말아야지'라고 계속해서 되뇌며 '좋은 것들을 먼저 보는 연습'을 죽어라 하는 시간이었다. 나쁜 점들만 계속 눈에 들어오는 와중에 어떻게든 좋은 면을 찾아내려 했고,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나쁜 사람을 만나도 '이유가 있었겠지'라고 이해하려 했고, 안 좋은 상황이 찾아와도 '이걸로 또 배우는 게 있겠지'라고 믿으려 했다. 


  나의 이 부단한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은 현재의  일상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나의 세계'가 꽤나 구축되었는데도 '나만의 세계'에 갇히지 않았고, 그래서 '받아들임'에 있어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새로운 것들과 다른 세상의 것들이 궁금하고, 알고 싶다. 무엇보다, 나는 그러한 지금의 내가 매우 마음에 든다.

  더 나아가, 내가 그렇게도 '못마땅해하던 세계'는 어느덧 '꽤 괜찮은 세계'가 되었다. 그렇게도 비를 싫어했었는데, (사실 지금쯤이면 비를 더욱더 싫어했어야 하는 건데) 나는 오히려 비 오는 날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충분히 어른이 된 지금의 내가 초록빛을 느낄 수 있고, 그 생생함을 느낄 줄 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나이 들수록 마음이 좁아지고, 좁아진 마음에 고집과 아집만 남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세상에서, 나이 들수록 많은 것들을 여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축복이다.


  비 오는 날이 좋아진 30대라 다행이다.






  오늘 하루 종일 비가 온다.

  초록빛은 오늘도 살아있어서 공기 중에 에너지를 내뿜는다.

  이 선명한 공기에 신선함을 느끼며 나는 깊게 숨을 쉰다.

  아주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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