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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워녕 Jan 21. 2021

차분하게. 그리고 과감하게.


  라떼를 만들 때 '안정화'라는 작업이 있다.


  에스프레소를 부은 잔에 스티밍한 우유를 부어 잘 섞이도록 하는 작업이다. 한 손으로 잔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스팀 피쳐를 잡고 에스프레소와 우유가 잘 섞이도록 위아래로 돌려가며 부어야 한다. 이때 중요한 건 낙차와 속도조절이다. 에스프레소가 담긴 잔 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서 우유 줄기가 일정하게 나올 수 있도록 부어야 하는데, 조금 빠른듯하게, 그러나 생각보다 과감하게 부어야 한다. 너무 천천히 부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갑자기 들이부어서도 안된다.


  처음 우유를 붓는 초보자들은 이 안정화 작업을 많이들 두려워한다. 우선 생각보다 빠른 속도감에 놀라고, 우유가 쏟아질까 봐, 혹은 넘칠까 봐 제대로 과감하게 붓지 못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조심조심하기만 해서는 안정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안정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에스프레소가 밑에 그냥 뭉친 채로 머물고, 더 나아가 라떼아트로 이어지는 작업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우유 거품으로 하트를 만들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작업이 바로 이 안정화다. 하트를 만들 도화지를 만드는 작업이 바로 안정화이기 때문이다. 손님들이 보게 되는 건 하트 뿐이지만, 사실 하트를 만드는 것보다 신경 써야 하는 것이 안정화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화지가 지저분하면 하트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2021년 겨울, 나의 상황은 많이 변했고, 그 속에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해야 할 고민은 많았지만, 그 비해 시간은 없었다. 깊이 고민해야 할 여러 문제들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오래 고민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었다.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지. 더 알아봐야 하나. 더 알아보지 않고 결정해도 괜찮나. 조금만 더 시간을 갖고 생각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이 '어떡하지'의 문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따라다녔다. 큰 결정, 작은 결정을 구분 지을 수 없다. 모든 결정은 다 중대한 결정이었다. 돈을 더 쓴 결정은 있지만.


  카페 일에 뛰어들어보니, 이건 커피와 디저트의 전쟁이라기보다는 박스와 포장과의 전쟁이었다. 뭐 하나 팔려고 해도 온갖 포장 용기가 필요했다. 컵은 어떤 사이즈의 컵으로 할 건지, 디자인은 기성 제품을 쓸 건지, 내가 직접 제작을 할 건지, 아이스컵은 또 따로 해야 하고, 컵홀더도 필요하고, 컵 뚜껑은 하얀색으로 할 건지 검은색으로 할 건지를 다 결정해서 빨리 주문해야 했다. 해놓고 보니 캐리어도 필요해서, 이건 또 비닐 캐리어로 할 건지 종이 캐리어로 할 건지를 정해야 했고, 빨대 종류는 또 뭐가 이렇게 다양한지. 케익을 팔려고 하다 보니 케익 포장 비닐과 상자도 또 필요했다.

 (사실 난 지난 2년간 가능한 일회용품을 안 쓰고 살려고 여러모로 노력하며 살았었는데, 최근 두 달 동안 지난 2년간 안 쓴 일회용품을 다 쓴 것 같다. 어쩔 수 없지 싶으면서도 뭔가 씁쓸한 이 기분...)


  문제는 뭐 하나 주문하면 다 박스 단위로 온다는 것. 종이컵 같은 경우는 이왕이면 좀 좋은 컵을 직접 제작해서 사용하려다 보니 최소 주문 수량이 10,000개(!)였는데 그것도 3주나 걸려 받은 종이컵 박스는 무려 20박스였다. 우리 카페 뒤 창고에 다 넣고도 8박스는 도저히 넣을 수가 없어서 옆집 부동산 사장님한테 부탁드려서 거기 지하창고에 잠시 보관해두기로 했다. 그 외에도, 아이스컵 박스, 컵 뚜껑 박스, 빨대 박스, 캐리어 박스 등 박스 더미들 속에서 나는 내가 박스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메뉴 하나를 더 추가하는 일은 또 새로운 박스들과의 전쟁이었다. 샐러드를 하려고 하니 샐러드 용기가 필요해서 구입하니 또 박스, 소스 용기가 필요해서 구입하니 또 박스, 파니니를 하려고 하니 샐러드 용기 말고 다른 용기가 또 필요해서 구입하니 또 박스, 일회용 물티슈와 포크도 필요해서 구입하면 또 박스, 들고 갈 수 있도록 비닐백이 필요해서 구입하면 또 박스...


  이 와중에 좀 더 좋은 데서, 좀 더 괜찮은 걸로 찾고자 한참을 알아보고 최종적으로 2~3개 중에 결정해서 구입하면 그 결과는 박스 더미들로 나에게 찾아왔다.


  쌓인 박스들을 보고 있자니, 내가 이렇게나 많은 결정들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결정들을 위해 나는 여러 군데 발품을 팔았고 심사숙고했지만, '그래, 이걸로 하자'는 결정은 한순간에 이루어졌다. '아니야, 아무래도 이건 하지 말자'는 결정 또한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나는 그렇게 꼭 선택해야 할 것과,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 단호해야 했다.


  이 결정들은 아주 일부분일 뿐이다. 나는 이것 말고도 하루에도 몇 번씩 정말 숱한 결정을 해냈다. 이 결정들 속에서 나는 라떼 안정화 작업을 떠올렸다. 신중하게, 그러나 너무 느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그러나 과감하게.





  우유를 스팀할 때는 차분해야 한다. 아무리 한꺼번에 주문이 들어왔어도, 스팀할 때 차분하지 못하면 거품이 거칠어진다. 같은 우유를 같은 기계에서 같은 시간 동안 스팀하는데, 스팀하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서 거품의 질은 천차만별이다. 한번 거칠어진 우유 거품은 어떻게 노력해도 되살리기 어렵다.


  라떼를 만드는 모든 순간은 차분해야 한다. 차분함이 기본이다. 아무리 바쁘고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도 나는 차분해야 한다.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하든 잠깐 눈을 감았다 뜨든 두 주먹을 한 번 쥐었다 펴든,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차분해야 한다. 차분하지 않으면 우유는 망한다. 망한 우유로는 하트를 만들 수 없다.

  차분하게 우유를 스팀했다면 이제 과감하게 우유를 들이부어야 한다. 조심스럽기만 해서는 안된다. 과감하게. 그러면서도 일정한 우유 줄기를 내보내려면 역시나 또 차분해야 한다. 그러니까, 차분하고 과감해야 하는 것이다.


  




  아빠는 늘 말했다. 차분하게 해. 집에서 청소를 할 때도, 걸레질을 할 때도, 강아지 목욕을 시킬 때도, 쓰레기 정리를 할 때도 아빠는 말했다. 차분하게 해. 바쁜 거 알겠고, 급한 거 알겠는데, 차분하게. 넌 어차피 일머리가 있고 손이 빠른 편이라, 차분하게 해도 충분해. 하나씩 하나씩 하는 거야. 급할 거 없어.


  차분하게 한다는 것은 그저 천천히 하는 것과는 다르다. 일의 순서에 맞게, 하나씩 하나씩 해나가는 것이 차분하게 하는 것이다. 급한 마음에 여기저기 손대서 어질러놓으면 순서가 뒤틀린다. 에스프레소가 담긴 잔에 차분하게 우유를 돌려 부어야 우유 줄기가 일정하게 쏟아진다.


  그리고 결정의 순간에는 과감해야 한다. 과감해야 하는 순간은 분명 찾아온다. 그 순간을 놓치면 안정화도 망하고 하트도 망한다. '지금인가?'를 생각하다가 순간을 놓칠 때가 있다. "지금!"이라는 판단이 든 바로 그 순간 왼손에 들었던 에스프레소 잔에 스팀 피쳐를 가까이 붙여 하트의 입과 꼬리를 만들어야 한다. 이때 단호하지 못하면 라떼는 그냥 커피 우유가 된다.


  (냉장고 정리와 같은 일을 할 때는 과감함과 단호함이 특히 요구되는 것 같다. 이때 버리지 못하는 것들은 계절이 몇 번 바뀌어도 버리지 못한다. 냉장고 정리할 때 나는 과감하게 끄집어내어 버리는데, 이때 아빠는 내가 조금 무섭다고 했다. 가끔 나는 너무 과감할 때가 있다면서. 나는 말했다. 아빠, 지금은 과감해야 할 때야. 아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감한 것은 성급한 것과는 다르다. 결정했다면 바로바로 진행하는 것. "지금!"을 놓치지 않는 것. 이미 심사숙고의 과정을 거쳐 결정이 내려졌다면, 또 심사숙고할 이유는 없다. 그냥 밀고 나가면 된다. 지금의 타이밍이 최적의 타이밍이다.   

 





 카페를 오픈한 지 1달이 된 카페사장입니다. 

 '내 카페에서 글 쓰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저는 카페 사장이 되었지요.  

 스탠리 쿠니츠라는 시인은 이렇게 말했답니다.

 "무엇이 삶을 움직이는가? 첫째도 열망, 둘째도 열망, 셋째도 열망이다."


 저는 오늘도 라떼를 만듭니다.

 저는 글 쓰고 싶은 열망에 카페를 시작했지만

 이 라떼는 제 카페의 열망이 되었어요.


 저는 오늘도 또 에스프레소에 우유를 들이붓습니다.

 차분하게, 그리고 과감하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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