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커피 공부에는 센서리(Sensory)의 영역이 있다. 커피의 맛을 보고 표현하는 법에 대해 배우는 공부다. 고소하면 어떻게 고소한지, 견과류의 고소함인지 초콜릿의 고소함인지. 향긋한 향이 난다면 어떤 향인지, 베리류의 달콤한 과일향인지 장미 같은 꽃향인지. 산미가 있다면 어떤 산미인지, 사과 정도의 신맛인지 레몬 정도의 신맛인지.
센서리 공부를 하자는 건 아니지만, 한 번씩 새로운 종류의 커피를 주문해서 핸드드립으로 내려먹어 볼 때가 있다. 판매 목적이 아니고 내 기분전환이 목적이다. 보통, 손님들과 한바탕 우당탕탕 한 후 마음을 가라앉혀야 할 때 천천히 핸드드립을 한다. 그렇게 내린 커피를 알바생과 함께 먹어본다. '이 커피는 이렇군'이라고 생각하면서 알바생에게 지금 먹은 커피에 대한 의견을 물어본다. "커피가 어때요?"
알바생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눈동자를 굴린다. 한참을 고민하다 쥐어짜 나온 말들은 주로 '쓰다', '고소하다', '신맛이 난다'이다. "단맛은 안 나?"하고 물어보면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더 물고 우물우물하다가 "오! 단맛이 나네요!"라고 한다. 그쯤 되면 나는 알바생에게 강요하기 시작한다. "좋아! 자, 이제 네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표현을 다 쥐어짜서 커피의 맛을 표현해줘!" 알바생을 피곤하게 하는 카페 사장이다. 이제 알바생은 온몸을 비틀며 표현을 쥐어짜내는데, 이렇게 해서 나온 표현은 '쌉쌀하다', '먹을만하다', '연하다', '부드럽다' 정도다. 나는 한숨이 난다.
가끔, 커피에 대해 말해주시는 손님들이 있다. '센서리'라는 단어를 들어보지도 못한 분들일 텐데, 기가 막히게 표현을 해주신다. "커피가 목구멍에 꿀떡꿀떡 넘어가요!" "비가 오니까 커피 향이 더 진해 지네요. 커피를 먹으니까 몸속에 커피 향이 채워지는 것 같아요." "커피가 진한데 쓰지 않아요. 신맛이 나는데 톡 쏘지는 않고요. 삼키고 나면 입 안이 달아져요. 그래서 빨리 다음 모금을 먹어야 해요."
아, 이런 작가님들. 글을 쓰든 안 쓰든, 이런 분들은 작가님들이다. 어떻게든 표현하려고 속으로 이렇게 저렇게 말을 만들어보았을 것이다. 어떻게든 심경을 잘 전달하고 느낌 있게 드러내기 위해 머리를 굴리며 고민했을 것이다. 표현에의 의지와 노력. 작가님이다.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다. 사실 '글을 쓴다'기보다는 그냥 끄적거리고 있다. 여기서 '작가님'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딱히 이렇다 할 호칭이 없어서 그렇게 불린다고 생각하고 있다. 언젠간 교보문고 한 귀퉁이에 내가 쓴 책이 진열되길 감히 바라지만, 그건 당장의 목표는 아니다. 평생의 목표라고 해두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능한 일주일에 (최소) 한번 글을 쓰고 브런치에 '발행'한다. 이걸 하기 위해 나는 수시로 떠오른 생각과 마음에 꽂힌 문장들을 '작가의 서랍'에 메모해놓고, 일부러 한가한 시간을 만들어 두세 시간(길게는 서너 시간 이상) 가감 없이 글을 써 내려가고, 그렇게 써놓은 글을 다음날 다시 보며 지울 건 지우고 추가할 건 추가하면서 퇴고(아니, 수정)한다. 다음날이 되면 한번 더 퇴고(아니, 수정)하면서 맞춤법 검사를 하고 사진을 집어넣고 제목 칸에 커다랗게(정말 커다랗게) 제목을 써넣고, 그렇게 완성된 글을 다음날 아침 맑은 정신에 한번 더 쓱 읽어보고 발행한다. 취미라기엔 지나치고, 일이라기엔 돈벌이가 안되지만, 아무튼 나는 여기에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꽤 많이 쓰고 있다.
이렇게 꼬박꼬박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끄적거린 지 2년을 향해가고 있다. 나는 차마 '글을 쓴다'고도 말하지 못하는, 그저 '끄적거린다'고 표현하는 사람이 되었다. '글을 쓴다'라는 말이 주는 무게감 때문이다. '퇴고'라는 단어가 너무 무거워, 나는 그저 '수정'한다고 표현한다. '발행한다'는 말도 나에게는 너무 버거워 그냥 '글을 올린다' 정도로 표현한다.
각 단어들이 가진 무게들이 있다. 나는 이 무게감 앞에 숙연해진다. 그래서 글 앞에서 자꾸만 멈칫거린다. 막힘없이 문장들을 이어나가다가 급정지한다. 아, 잠깐만, 이 단어 말고.
버겁지 않고, 그렇다고 경박하지 않은 최선의 단어를 찾아 허공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머릿속을 헤집는다. 사전을 뒤지고 예문을 찾아본다. 나의 이 심경을 가장 적절하게 드러내 줄 수 있는 단어를 찾아 헤매고 헤맨다.
그러는 중간중간 다른 작가님들의 브런치를 읽는다. 유려하게 글을 잘 써 내려가시는 훌륭한 작가님들이 많으시지만, 내 마음을 사로잡는 건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들을 진정 고스란히 담아 쓴 작가님들이다. 그분들이 쓴 단어와 문장들에는 글쓴이의 마음이 꾹꾹 눌러 담겨있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으면서, 딱 그 진함이 느껴진다. 연필로 썼다면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썼을 것 같은, 진정성이다.
흔하디 흔한 단어 하나에도 작가님들은 진정성을 담는다. 이 진정성은 아름다움이 된다. 별것 아닌 단어 하나가 작가님들의 손을 거치면 아름답고 절절하게 표현된다. 다른 브런치 작가님들의 글들을 읽으며, '아, 이렇게나 아름답게 표현하시는 분!' 하고 날이면 날마다 감동한다. 사무친다.
결국, '표현'이라는 건, 얼마나 고스란히 잘 전달하느냐의 문제일뿐더러, 얼마나 아름답게 표현하느냐의 문제인 것 같다.
헤르타 뮐러가 쓴 <숨그네>라는 소설이 있다. 이 책은 무려 2009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인데, 이게 꼭 그런 엄청난 책이라서가 아니라, 나는 정말이지 이 책을 보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글이! 이토록 비참한 상황이! 표현의 아름다움에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다보면 눈 앞에 그려지는 상황의 끔찍함에 또 눈물이 났다. 분명 아름다운데, 가슴이 아릴 만큼 아름다운데, 상황은 하나도 아름답지 않았다.
책의 중반부 즈음부터는 이 아름다움에 탄복하고 있는 나 스스로를 자책하게 되었다. 지금 아름다움에 감탄할 때가 아니잖아. 하지만 그럼에도 작가는, 참으로 잔인하게도, 끝없는 아름다움으로 그 참담한 상황을 표현해 내려갔다. 시멘트, 시체, 배고픔, 전쟁, 벼룩, 죽음, 구덩이, 수용소와 같은 단어들이 작가의 손을 거치며 사무치는 아름다움이 되었다.
"가장 마지막에 오는 행복은 한방울넘치는행복이다. 그 행복은 죽을 때 온다. 이르마 파이퍼가 회반죽 구덩이에서 죽어가던 때를 아직도 기억한다. 트루디 펠리칸이 혀를 차며 마치 한 단어인 듯 말했다. 한방울넘치는행복. 그녀가 옳다고 생각했다. 시체를 치울 때면 얼굴에서 안도감을 보았으니까. 머릿속의 뻣뻣한 새둥지, 숨결 속의 어지러운 그네, 박동에 사로잡힌 가슴속의 펌프, 배 속의 텅 빈 대기실에 드디어 휴식이 찾아오는 순간. (...) 수용소를 나온 지 육십 년이 지나도 음식을 먹을 때면 너무나 흥분된다. 나는 온몸의 구멍을 모두 열어젖히고 먹는다. (...) 먹을 때 내 머릿속에는 여기 앉아있는 우리처럼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찾아올 한방울넘치는행복이 스쳐간다. 머릿속의 새둥지, 숨결 속의 그네, 가슴속의 펌프, 배 속의 대기실을 내주어야 할 그 순간. (...) 나는 배고픔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자부심이 아니라 겸허 때문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숨그네, 276~277p)
이 책을 쓴 후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상황은 처참했다. 문자는 아름다웠다. 나는 비극은 시의 옷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처참함을 고발하기 위해서는 그래도 비극은 시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내 문학의 명예였다."
말도 글도 표현의 수단이다. 말과 글을 통해 자신의 심정을 얼마나 고스란히 진정성 있게 드러내느냐도 관건이지만, 결국은 그 진정성을 아름답게 표현해 내는 것이 말을 하며 사람을 만나고 글을 끄적거리는 나에게 주어진 숙제인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다른 작가님들의 글을 유심히 보며 그분들의 표현을 배운다. '황홀함이 벅차다', '행복이 차오른다', '꽃을 더하다', '솜사탕 같은', '포근하면서도 내구성 있는', '조심스러운 분홍색', '꽃 안의 별', '영혼의 단내', '단아하고 선명한'과 같은 표현들. 이런 표현들을 보고 있자면 보고 있는 나의 눈코입이 벌렁거리면서, 동시에, 표현들이 스스로 꿈틀거리며 다이렉트로 내 마음속에 들이부어진다. 헤르타 뮐러의 표현대로 '시의 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러니까, 노래다.
표현에의 욕구와 의지가 들끓는 사람들이 글을 쓰는 것 같다. 글로 써내리지 않고는,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든 아름답게 표현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작가님들이 아닌가 싶다.
<자전거 여행 1>에서 김훈 작가님이 산수유에 대해 표현한 부분은 매우 충격적이어서(책의 다른 부분도 다 매우 충격적이지만, 나한테는 산수유 부분이 특히 충격적이어서), 나는 거기까지만 읽고 책을 덮어 버렸다.
"선암사 뒷산에는 산수유가 피었다.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자전거여행 1, 16~17p)
그래, 이런 사람이 글을 쓰는 거지. 나는 죽었다 깨도 이렇게는 못 쓸 테지.
다음날 슬며시 책을 다시 열어 그 부분을 읽고 다시 덮었다. 다음날도 또 그다음 날도 나는 그 부분만 다시 읽고 책을 덮기를 반복했다. 그 부분은 사진도 찍어놓고 줄도 긋고 여러 번 노트에 베껴쓰기도 하면서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이런 작가님들이 계시기에 세상이 아름다운 것 같다. 아름답지 않은 세상일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아름답게 보일 수는 있는 것이다.
헤르타 뮐러 작가님이나 김훈 작가님 같은, 꼭 이런 범접할 수 없는 작가님이 아니더라도, 세상 곳곳에는 작가님들이 계신다. 이곳 브런치에도 수많은 훌륭한 작가님들이 계시고, 꼭 글을 쓰는 분이 아니더라도 (커피를 마시며 표현해주시는 손님들처럼) 삶의 곳곳에서 표현에 대해 고민하고 시도하는 수많은 삶의 작가님들이 계신다. 나는 진정성에 아름다움을 더한, '시의 옷'을 입은 그런 표현들을 만나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사무친다.
작가님들의 이러한 노래들이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닌다. 작가님들의 노래가 지하철 출입구 앞에 있고, 고가 밑에 있다. 버스 창가에 고개를 내밀고 지나가고, 전동 킥보드를 타고 달린다. 나뭇잎 끝에 달려있고, 의자 위에 앉아있다. 사람들의 눈썹 위에 내려앉기도 하고,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들어가기도 한다. 발에 차이고, 어깨에 부딪힌다. 숨을 들이쉬면 작가님들의 노래가 공기와 함께 내 속으로 들어오고, 숨을 내쉬면 나의 노래가 공기 중의 다른 노래들과 만난다.
나는 오늘도 글을 끄적거리고 말을 한다. 나는 노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