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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워녕 Nov 15. 2019

세상은 해주지 않는,
그러나 꼭 해야할 이야기

아빠와의 밤 대화 

 나의 청소년 시절, 누구나 그렇듯, 나도 집에 있는 시간보다 밖에서 친구들과 노는 시간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놀다 보니 저녁이 되어 친구네 집에서 밥을 먹는 일이 허다했다. 저녁만 먹고 오면 다행인데, 그러고서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아빠는 항상 밤에 자기 전에 내 옆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나 난센스 퀴즈 같은 유머라도 꼭 하나씩 해준 후에 손을 잡고 기도해주었는데, 내가 친구들이랑 노느라 너무 늦게 들어가니 우리의 밤 대화가 짧아진다며 서운해하였다. 나도 비록 그게 아쉽기는 했지만, 그런데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친구들과 함께 놀았다. 친구들과 논다고 해도 뭐 엄청나게 논 것은 또 아니었다. 당시 수학을 잘 못하는 친구에게 수학 문제를 가르쳐주기도 했고, 얼음땡, 카드놀이, 공기놀이, 부루마불 등을 했다. 달고나를 해 먹는다며 친구 집에 있는 숟가락과 국자를 온통 태워먹기도 했지만.


 어느 날은 방과 후에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아빠는 드디어 딸과 밤 대화를 제대로 나눌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하였다. 아빠는 오늘은 학교 끝나고 친구들과 왜 놀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같이 놀던 친구가 원래 나보다 공부를 못했는데, 이번에 나보다 시험을 잘 봐서 별로 같이 놀고 싶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빠는 그 친구가 시험을 잘 봤는데 왜 내 기분이 안 좋으냐고 물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무래도 내가 그 친구보다 공부를 잘할 때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빠는 내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너는 너야. 너는 그 누구도 아닌 ‘너’야. 넌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어. 비교해서 우울해하지 말고, 그렇다고 절대 우쭐하지 말고. 친구가 시험을 잘 봤으면 그 친구는 얼마나 기분이 좋겠어? 그럼 너도 같이 좋아해 줄 수 있어야지. 그리고 그것과 상관없이 너 스스로 돌아봤을 때 네가 최선을 다했는지가 중요해. 네가 최선을 다했다면 결과가 어떻든 아빠는 훌륭하다고 생각해. 최선을 다했지만 시험을 못 볼 수도 있지.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야. 다음에는 잘할 수 있는 거야. 걔는 걔고, 너는 너야. 너의 기준을 절대 다른 사람에 맞추지 마.


 그리고 이제 마무리하고 자자고 하면서 오늘의 문제를 냈다.

 “바나나가 웃으면?”

 한참을 기다리던 아빠는 씨익 웃으며 답을 알려주었다.

 “바나나킥.”




 주위에 아이를 낳아 키우는 친구들, 동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덕분에 아이를 위해 준비하는 수많은 것들과 애정 가득한 정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많아졌다. 어느 집이나 출산과 육아는 전쟁이었지만, 하나같이 하는 말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들도 자신들의 아이가 이렇게까지 사랑스러울지는 몰랐다면서. 너무 힘들다가도 아이의 눈동자를 보면 아무렇지 않아 진다면서. 부모의 마음이란 이런 것이구나하고 새삼 느끼게 되었다. 나의 부모님이 나에게 수만 번은 말했던 그 부모의 마음. 나의 부모님이 나를 얼마나 정성껏 키웠는지, 나에게 좋은 것을 주기 위해 얼마나 고심하고 노력했는지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는 요즘이다. 


 대표적으로, 아빠와의 밤 대화를 떠올려보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십여 년을(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랬으니!)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새로운 유머와 농담을 가져와 딸의 잠자리를 봐주고, 시답지 않은 어린이의 끝없는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 아빠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외부활동과 저녁식사 자리를 포기했던 걸까. 

 나는 잠들기 전 이 시간을 통해 아빠와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때로는 서로 깔깔대며 웃기도 했고, 때로는 같이 부둥켜안고 울기도 하며 서로의 즐거움과 고민을 나누었다. 그러면서 사람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라든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에 대한 것 같은, 학교에서 알려주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도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가 그런 주제로 흐를 때면 아빠가 입버릇처럼 한 말이 있다. "남자든 여자든 말이야." 남자라고 해서 무언가를 더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여자라고 해서 무언가를 못하는 것도 아니라는 이 말. 그저 한 사람의 사람일 뿐. 

 '사람'이기에 존중해야 하고, 또 '사람'이기에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아빠는 늘 전제로 깔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 대화는 내가 '나 자체'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덕분에 나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사람은 각자 고유의 특별함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고, 그 무엇과도 비교되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사회는 이 특별함은 무시한 채 점수를 매기고 줄을 세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런 세상에 살아가야 한다면, 적어도 이 사실을 잊지는 않도록 자꾸만 되새겨야 한다. 사람은 누구도 같지 않으므로, 같은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을. 다만 최선은 다해야 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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