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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워녕 Feb 29. 2024

아빠의 축복, 나의 축복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길.


 초등학교 때(아마 2~3학년쯤 되었을 때였던 것 같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가훈이 무엇인지 알아오라는 숙제를 내주셨다. 나는 집에 와서 아빠에게 우리 집 가훈이 무엇인지 물었고, 아빠는 잠깐 생각하시더니, 숙제를 언제까지 해가야 하는 건지를 묻더니 방으로 들어가셨다. 한참 후 아빠는 깨끗한 a4용지에 한 자 한 자 정성껏 쓴 우리 집 가훈을 들고 나오셨다.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자.'


 나는 실망했다. 이런 원초적인 문장이라니. 차라리 조금 뻔하더라도 '정직하게 살자', '겸손하고 성실하자'와 같은 교훈적인 가훈이 낫다고 생각했다. 입이 툭 튀어나와 "이게 뭐야, 이게 무슨 가훈이야!"라고 투정 부리는 나에게 아빠는 나지막이 말했다. "딸, 이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야.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데."


 아빠의 설명에 조금이나마 이해는 했지만, 그래도 나는 어렸다. 9살, 10살 밖에 되지 않은 나는 학교에서 우리 집 가훈에 대해 발표하면서 (안 그런 척했지만) 창피해했다.


 그런 나와 달리, 아빠는 그날 이후 우리 집 곳곳에 가훈을 적어 코팅해서 벽에 붙여놓았다. 집 안의 어느 곳에 앉아있든 가훈이 보였다.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자.'


 이후 내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성인이 되고 서른이 넘고 그리고 지금에 이르는 이 순간, 나는 우리 집 가훈을 온전히 이해한다. 삶의 태도가 긍정적일 때 잘 웃을 수 있고, 주어지는 모든 것들에 감사할 때 잘 먹을 수 있고, 어떤 상황에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때 잘 잘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이건, 그러니까, 나를 향한 아빠의 마음이었고, 축복이었다.






 나는 이제 만삭 of 만삭 임산부가 되었다. 예정일까지 일주일 남았다. 이래도 괜찮은 건가 싶은 하루하루를 39주 동안 지내왔고, 이제 정말 출산을 앞두고 있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이렇다 할 이벤트 없이, 아기는 너무나도 건강하게, 날짜에 맞게 무럭무럭 자라났다.


 배 속에 아기를 가진 엄마가 되고 보니,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이 열렸다. 세상에는 정말이지 수많은 위대한 엄마들이 있었다. 몰랐던 것이 아닌데, 이제야 뼈가 저릿하도록 체감한다. 아기를 갖는 과정 자체도 너무 힘들고, 임신기간 동안의 몸고생 마음고생, 죽을 뻔했다는 출산의 고통, 그리고 그 이후 이어지는 아기와의 고된 생활... 이루 말할 수 없는 그 모든 어마어마한 힘듦을 세상의 엄마들은 웃으며 담담히 이야기했다. (특히 유산. 나는 잠깐 상상만 해도 마음이 무너지고 눈물부터 나는 이 '유산'이라는 단어가 이렇게나 흔한 단어인지 이제야 알았다. 첫 번째 유산, 두 번째 유산, 세 번째 유산에 대해 담담히 이야기하는 그분들에 비하면 사실 나는 아주 분에 넘치는 임신생활을 하는 편이었다. 이 아픔을 끌어안고 사는 엄마들의 마음을 감히 헤아릴 수나 있을까.)


 이토록 위대한 엄마들은 자기들도 너무나 힘들었을 거면서, 자기가 한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오히려 나를 걱정했다. 나를 깊이 이해해 주었고 걱정해 주었다. 한 명 한 명의 엄마들이 정말 진심으로 나를 공감해 주었고 힘을 주고, 또 뭐라도 주려고 했다. "아이고, 힘들어서 어떡해." "조심해요.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해요."


 한 번은 버스를 탔는데 앉을자리가 많이 있는 버스였다. 가장 앞쪽 자리에는 아기를 안고 있는 아기 엄마가 앉아있었는데 아기는 돌이 채 되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아기 엄마는 나를 보고 내 불룩한 배를 한번 보더니 벌떡 일어나 자기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그분을 진정시켜 다시 자리에 앉히고 나는 뒤에 가서 자리에 앉았다. 아기를 끌어안고 있는 그분의 뒷모습을 보면서 고마움보다 짠함이 앞섰다. 아기를 안고 있는 그분이 나보다 더 힘들어 보였는데. 어쩌면 그분은 어젯밤도 깊은 잠에 들지 못했을 텐데.




 고양이가 "야옹!" 하며 나를 부르는 소리가 언젠가부터 "엄마!"로 들린다. "그래, 엄마야."라고 말하며 눈을 마주친다. 앞으로 만날 아기에게 "엄마야."라고 처음 말하는 순간을 꿈꾼다. 눈물이 난다.




 뉴스에서, 드라마에서 많은 남자 사람들을 본다. 잘생긴 배우, 언변이 뛰어난 방송인, 귀엽고 장난기 많은 연예인, 노래 잘하는 가수, 아나운서, 뉴스 속의 수많은 직장인과 정치인, 피해자와 피의자, 스쳐 지나는 사람, 단역배우... 언제부턴가 그들의 어머니를 떠올린다. '저 사람의 엄마는 어떤 마음일까'


 잘생긴 배우를 봐도 그전에는 "우와 정말 멋있다!" 하고만 생각했는데, 요즘은 "참 반듯하게 잘생긴 친구군! 우리 아들이 저랬으면 좋겠군!" 하는 생각이 든다. 피해자 혹은 피의자의 모습을 보면 내 마음이 다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 '어머니가 얼마나 속상하실까.'




 임신 17주 차였던가. 산후조리원을 예약하면서 '순산을 기원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세상에. '순산을 기원합니다'라니. 드라마에서나 한 번씩 나올 것 같던 이 낯선 문장에 나는 어떤 감정으로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지.


 지금, 카페에 오는 많은 손님들이 나에게 "순산하세요!"라고 해주신다. 나는 매우 민망하지만, "감사합니다"라고 해야 한다는 걸 인식했다.


 '순산(産)'.


 아이가 자연스럽게 나왔으면 한다. 아이가 세상에 나오는 데는 엄마만 죽을 둥 살 둥 힘을 주는 게 아니라 아기도 세상에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한다고 한다. 지금까지 무탈히 10달을 잘 지내온 나의 아기가, 초음파로 봤을 때 뼈도 튼튼해 보이고 건강히 잘 큰 것 같아서, 그래서 아기도 세상에 나올 때 자기 의지로 힘을 한번 써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무섭지만, 자연분만을 목표로 용기 내보기로 했다. 나는 아기가 세상에 잘 나올 수 있게 돕고, 그리고 아기도 있는 힘껏 나를 도울 것이다. (절대 고집하는 건 아니다. 상황에 따라 병원에서 수술을 권한다면 나는 기꺼이 제왕절개를 할 것이다. 안전하고 건강한 게 우선이니까.)



 나의 아기가 건강하게 세상에 태어나길 기도한다. 세상에 처음 나와 숨을 터뜨리며 '응애'하고 우는 소리를 상상하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시뻘건 아기를 내 눈으로 드디어 보는 상상을 한다. 나는 운다. 상상만으로도 이렇게 우는데, 실제로 아기를 만나면 얼마나 울지 가늠할 수 없다.




 세상에 나온 나의 아기가 자기 나이에 해야 할 일을 하나씩 해 나가며 차근차근 주도적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우선은, 신생아니까,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길.


 그리고 나의 아기가 밝고 아름답고 선하게 자라나길 기도한다. 내면의 즐거움이 있고, 그걸 지혜롭게 드러낼 줄 알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길. 밝게 잘 웃고, 감사하며 잘 먹고, 선한 마음으로 잘 자길.


 나의 아빠가 나에게 바랐듯, 그렇게.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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