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녕워녕 Nov 19. 2019

달이 나를 따라와요

둥글고 환한 달이. 

 둥근달이 뜬 밤이면 나는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십 대 중반, 뉴욕에서 1년간 인턴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앞으로의 나의 삶의 방향을 잡아야 하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그 당시 나는 내 앞날에만 초점을 맞추어 배우고, 경험을 쌓고, 사람을 만났다. 보란 듯이 살고 싶었다. 굳이 뽐내지는 않더라도, 어디 가서 주눅 들지 않는 삶. 인턴생활을 마지막 한 달 남겨놓고는, 이제 정말 제대로 뉴욕에서 직장을 잡아 자리를 잡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한국에서 한 통의 연락을 받았다. 아빠였다. 원래도 종종 전화도 하고 이메일도 주고받으며 지내왔어서 별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는데, 아빠는 나에게 인턴 기간이 끝나면 한국에 들어오는 게 어떠냐고 넌지시 말했다. 그동안 나는 당연히 뉴욕에 계속 있을 거고, 여기서 잘 해내 보겠다고 말해왔었고, 아빠는 늘 잘해보라는 말만 했었는데, 한국에 들어오라니. 

 아빠가 얼마나 힘들게 그 말을 꺼냈는지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아마 온 힘을 다해 그 말을 했을 것이다. 아빠가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했는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며칠 후 아빠가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엄마가 아팠다. 암이었다. 이미 아픈지 10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수없는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이미 받은 상태였다. 암 치료에 가장 뛰어난 병원에서 내로라하는 의사를 찾아다니며 10개월을 보낸 부모님을 생각하니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아빠가 나에게 한국에 들어오는 게 좋겠다고 한 시점은 더 이상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을 들은 때였다. (그런데도 엄마는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앞 길 창창한 애한테 방해되기 싫다면서.)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은 끝이 없었다. 온몸이 눈물이 되어 부서져내리는 것 같았다. 아빠가 첨부파일로 보낸 투병일지를 보며 노트북 앞에 앉아 몇 시간을 그렇게 울었는지 모르겠다. 손이 덜덜 떨렸다. 날짜를 계산해보니 내가 한국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엄마는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신나게 뉴욕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고 생각하니 비통하기까지 했다. 나는 너무 내 생각만 했고, 엄마 또한 너무 내 생각만 했다. 

 울다가 지쳐 잠이 들 때쯤 또 눈물이 터지기를 밤새도록 하고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던 아침이 되었다. 얼굴이 퉁퉁 부은 채로 회사에 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그 주까지만 출근하기로 했다. 한 달 후면 인턴십이 끝나지만, 그때의 한 달은 너무나도 긴 시간이었으니까. 집에 돌아와서 당장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짐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1년을 살았고, 앞으로도 계속 살 생각이었으니 살림살이가 꽤 많았다. 급히 중고사이트에 팔만한 물건들을 내놓았고, 룸메이트에게 줄 것과 버릴 것들을 구분했다. 


  며칠 후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1년 만에 본 아빠는 나를 보고 울었다. 울지 않기로 비행기 안에서 다짐하고 또 다짐했는데, 결국 끌어안고 나도 같이 울었다. 

 차를 타기 위해 공항 주차장으로 나오니 캄캄한 밤이었다. 유난히 환하고 둥근달이 눈에 들어왔다. 


 '저 달은 내가 뉴욕에서도 봤던 달인데.'


 달빛 아래에서 짐을 싣고 차에 탔다. 아빠는 운전하면서 이런저런 말을 걸었다. 엄마는 아빠에게 그런 말을 뭐하러 해서 이 난리를 피냐며 화를 내긴 했지만 그래도 나를 많이 보고 싶어 했다고 한다. 그렇게 말하는 아빠 옆에서 나는 창 밖의 달을 바라보았다. 달이 따라오고 있었다. 계속 따라왔다. 자동차의 속도가 빠르면 빠르게 따라왔고, 느리면 느리게 따라왔다. 내가 뉴욕에서 오는 14시간 동안 이 달도 계속 나를 따라왔다고 생각하니 가슴 깊은 곳에서 어떤 응어리가 올라와 나는 또 울음이 터졌다.


 병원에 도착하자 나는 매우 낯선 기분을 느꼈다. 아빠는 그 낯선 곳을 거침없이 걸어갔고 나는 뒤따라갔다. 낯선 간호사와 낯선 의사들에게 아빠는 반갑게 인사하며(우리 딸이 미국에서 지금 막 왔다고 인사시키며)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어느 병동으로 들어갔다. 


 엄마의 모습은 많이 변해있었다. 내가 알던 엄마의 모습이 아니었다. 스무 번이 넘는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견뎌낸 엄마는 온 얼굴과 몸이 퉁퉁 부어있었고, 머리카락은 다 빠져 두건 같은 걸 쓰고 있었다. 한쪽 눈이 돌아가 초점 안 맞는 사람처럼 쳐다봤고, 목소리도 변해서 내가 아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엄마가 처음으로 낯설다고 느꼈다.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낯선 입술을 움직여 낯선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중간에 그냥 오면 어떡해. 다 끝내고 와야지." 엄마는 그 순간에도 내 생각만 했고, 그런 엄마를 아빠가 옆에서 툭 쳤다. 그러자 엄마가 다시 말했다. "보고 싶었어, 딸."


 달이 환한 밤이었다. 

 이 달은 내가 한국에서 사는 동안 계속 그 자리에 있었고, 뉴욕에서 지낼 때도 나의 위에 있었고, 1년 만에 엄마를 만난 그날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 달은 계속 나를 따라다니며 내가 내 생각만 하는 동안 나를 지켜보았고, 아픈 엄마가 내 생각만 하는 동안 엄마를 지켜보았다.


 



 엄마가 하늘나라에 간지 7년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나만 생각하는 철없는 딸이지만, 그래도 가끔 엄마 생각을 한다. 특히 둥근달이 환한 밤이면 엄마 생각이 난다. 내가 어딜 가든, 무얼 하든, 엄마는 여전히 내 생각만 하고 있을 것이다. 달은 왠지 그렇다. 온 세상을 밝히는 느낌은 아니지만, 내가 어딜 가든 그 자리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느낌. 


 둥근달이 뜬 밤이면 나는 가슴이 뭉클해진다. 

 

















 

작가의 이전글 엄마에게 잡채를 해달라고 하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