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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워녕 Oct 24. 2020

심심한데 운동이나 할까


  우리 엄마는 결혼 전, 피아노 선생님이었다.  


  엄마는 당연히 나에게도 피아노를 가르쳤는데, 나는 엄마가 혼을 담아 가르친 마지막 제자다. 그런데 그건 엄마의 입장이고, 내 입장은 달랐다. 


  난 태권도를 배우고 싶었다. 도복을 입어보고 싶었다. 하얗고 빳빳한 도복. 그걸 입고 동네를 돌아다니는 또래 친구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5~6학년 때는 벌써 태권도 경력이 10년 가까이 되어 사범이 되겠다고 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나는 그게 너무나 좋아 보여서 그 친구와 친하게 지내고 싶을 정도였다. 


엄마는 저렇게나 나를 예쁘게 입혀놓고 피아노를 치게 했다. "자 어서 쳐봐!"라고 하고, 카메라 셔터를 눌렀겠지. 엄마의 로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나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피아노 배우는 시간은 가장 싫은 시간이었다. 엄마는 말도 똑바로 못 하는 어린 나를 피아노 앞에 앉혀놓고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치게 했다. 아마 3살~4살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이렇게 일찍 피아노를 시작했으면 모차르트처럼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해야 하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재능도 없었고, 흥미도 없었다. 나는 피아노 시간만 되면 도망 다녔고, 엄마는 나를 잡아 억지로 피아노 앞에 앉혔다. 

  피아노 수업이 시작되면 엄마는 옆에 놓인 메트로놈을 켰고 나는 마지못해 피아노를 뚱땅거렸는데, 두 마디를 제대로 못 넘기고 틀렸다. 그러면 엄마는 나를 혼내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당연히 진도를 뺄 수가 없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도 나는 가장 기본인 바이엘만 쳤다. 다른 친구들은 1년~2년 만에 체르니 30번, 40번을 친다고 했지만 나는 못했다. 사실, 그 친구들이 별로 부럽지도 않았다. 내가 부러웠던 건 끝나고 곧바로 태권도장에 가야 한다며 하얀 도복을 입고 학교에 온 친구들이었다. 


  내가 바이엘의 마지막 악보를 틀리지 않고 칠 수 있게 되었을 때 엄마는 드디어 나를 놓아줬다. 초등학교 6학년 가을이었다. 엄마는 피아노 선생으로서 할 만큼 했다며 이제 앞으로 내가 피아노를 치든 안 치든 터치하지 않겠다고 했다. 엄마는 나에게 '해방'을 선언했고(이 '해방'은 나에게뿐 아니라 엄마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후련한 마음으로 돈가스를 먹으러 갔다. 

 

  피아노에 대한 나의 어릴 적 기억은 이토록 지긋지긋한 것이었다. 남들은 몇 달만에 끝내는 바이엘을 나는 10년을 붙들고 있었으니. 

 

  그런데 신기한 건, '해방' 이후에도 나는 피아노를 쳤다는 것이다. 피아노 치는 걸 그토록 싫어했었던 나인데, 그랬으면 해방 이후에는 피아노를 거들떠도 보지 않아야 했을 것 같은데, 나는 스스로 악보를 찾아 혼자 피아노를 쳤다. 틀린 부분을 반복해서 연습했고, 따로 책을 사서 보면서 코드를 보고 피아노 치는 것도 터득했다.


  나는 심심할 때면 '피아노나 칠까'하는 생각을 했다. 피아노는 내게 그런 것이었다. 어떤 곡을 완벽히 치고 말겠다는 목표도 없었고, 대회에 나가겠다는 욕심도 없었다. 엄마는 선언했던 대로 전혀 터치하지 않았다. 피아노 치는 소리가 온 집안에 울려 퍼져도 엄마는 어떤 조언도, 어떤 평가도 하지 않았다. 피아노는 그냥 심심할 때 아무렇게나 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스무 살 무렵, 나는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맡았다.




  2018년 가을, 집을 이사하면서 피아노를 팔았다. 그 피아노는 엄마의 20대를 함께 했던 피아노였고, 우리 가족이 이사 가는 모든 집에 함께 갔던 피아노였고, 엄마와 나의 해방의 역사가 담겨있는 피아노였다. 그 피아노를 보내기로 한 날, 마지막으로 1시간 동안 피아노를 쳤는데, 온갖 오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피아노를 실어 보낼 때는 "아니에요,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죄송해요, 그냥 안 팔래요. 가져가지 마세요."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열다섯 번 정도 참은 것 같다. 


  집을 이사한 지 2년이 되어간다. 피아노를 안 친지 2년이 되어간다는 말이다. 그동안 나는 심심할 때, 가끔, '피아노나 칠까'하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그래서 중고 피아노를 알아보기도 했고 TV 홈쇼핑에서 디지털 피아노를 파는 걸 볼 때면 충동구매욕구에 시달리기도 했다. (실제로, 주문하고 결제까지 했다가 취소한 적도 여러 번 있...)

  

  피아노에 대한 재능도 없고, 짜릿한 흥미도 없는 내가, (심지어 '이 망할 피아노'라고 생각했던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득 '피아노나 칠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렸을 때 해봤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 말고는 다른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어렸을 때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이런 이상한 힘이 있다.




 

  나는 심심할 때 책을 본다. 피아노는 이제 없어서 못 치지만, 다행히 책은 늘 내 주위에 쌓여있다. 특별한 목적이나 결심이 없어도 나는 아무렇지 않게 책을 읽을 수 있다. 쉬는 날, 온갖 집안일을 하고 나서 심심해지면 '책이나 볼까'하는 생각을 한다. 

  다들 이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건 적잖은 충격이었다. 심심할 때 뭐하냐는 질문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책을 본다고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걸 굉장히 대수롭게 받아들일 때마다 나는 정체 모를 이질감을 느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맘먹어야 책을 읽는가 보다. 1년에 두세권 읽는 것도 버거운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나는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이라, 핸드폰을 떨어뜨리는 일도 아주 드물고, 그러면서도 흔적이 남지 않게 하는 것을 중요히 여겨서 거울에 손자국이 나게 하는 법도, 밥 먹던 숟가락을 식탁에 그냥 내려놓는 법도 없는 그런 사람이다. 

  그런 나에게 유일한 예외는 책이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책에 죽죽 밑줄을 긋고, 손으로 탁탁 페이지를 넘긴다. 종이에 음료가 몇 방울 튀더라도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책만큼은 조금 지저분하게 봐도 괜찮다.


  그래서 나는 웬만하면 책을 사서 보는 편인데, 2~3달에 한 번씩 책 쇼핑을 한다. 주문은 온라인으로 하지만, 책 안을 잠깐이라도 직접 본 책이어야 한다. 절대 제목만 보고 홀리듯 책을 사지는 않는다. 그래서 한 번씩 직접 대형서점에 가서 책을 직접 펼쳐보면서 읽고 싶은(갖고 싶은) 책을 리스트에 적는다. 리스트에 적힌 책은 한꺼번에 주문하는데, 보통 20만 원에서 30만 원 사이다. 

  새로 산 책을 읽지 않고 그냥 책장에 꽂아 놓아도 괜찮다. 몇십만 원을 들여 책을 샀지만 아무 부담이 없다. 나에게 새 책은 해치워야 할 미션이 아니다. 그냥 심심할 때 볼 책이 있는 것이다. 어떤 책은 앉은자리에서 끝까지 다 읽어치우기도 하고, 어떤 책은 몇 페이지만 보고 덮기도 한다. 나는 어떤 책에 어떤 부담도 갖지 않는다. 


  생각해보니, 이것 또한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시작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종류를 가리지 않고 책을 읽어치웠는데, 그래서 책을 편하게 대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아마 어렸을 때 전혀 책을 보지 않았다면 이제 와서 책을 읽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다 큰 맘먹고 책을 읽으려고 해도 볼만한 책은 주위에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아무리 심심해도 '책이나 볼까'하는 생각은 하지 못했겠지. (아마 이것이 내가 그동안 다른 사람들에게서 느꼈던 이질감의 정체였던 것 같다.)






  친구의 아기는 팔다리가 길다. 또래 아기들에 비해서도 꽤 큰 편이라고 한다. 아기의 엄마인 내 친구의 키는 155 정도이니, 아기는 아빠를 닮은 게 분명하다. 키만 닮은 게 아니라, 아기는 자기 아빠의 어렸을 때를 꼭 빼닮아서, 한시도 가만있지 못한다. 소리 지르거나 바락바락 울지는 않지만,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아기가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한다. 

  아기의 아빠는 키도 크고 운동 신경도 있는 편이어서, 어렸을 때부터 친구들과 농구하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아기도 조금만 더 크면 당장 운동부터 시켜야겠다고 했다. 이 에너지를 집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면서. 


  나는 무조건 찬성했다. 아기 엄마는 육아에 지쳐서 하는 말이었지만, 나의 찬성은 다른 의미였다. 

  운동은 어렸을 때 시작해야 한다. 뭐라도 해야 한다. 농구든 축구든. 태권도도 좋고 춤을 춰도 좋다. 아니, 그냥 나가서 운동장을 몇 바퀴 돌고 와도 좋다. 종목이 무엇이든, 몸을 움직이는 습관은 어렸을 때 들여야 한다. 나이 들어서 건강의 중요성을 몸소 깨닫고, 다급하게 운동을 시작하고 습관을 들이는 건 너무나도 어렵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아기에게 어떤 운동을 시키면 좋을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내가 어렸을 때 엄마에게 조금 더 강하게 어필해서 태권도도 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무슨 대단한 무술을 배워 다른 사람을 쓰러뜨리고 제압하기 위함이 아니다. 구르고 뛰면서 몸을 힘껏 쓰는 걸 어렸을 때 해봤다면. 




  작년부터 '매일 몸을 움직이기'를 하고 있다. 하루에 10분이라도 몸을 일부러 움직이고자 있는 의지, 없는 의지를 끌어모으던 때를 지나, 지금은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운동복을 갈아입고 몸을 움직이게 되었다. 


  몸을 움직이다 보니, 내 몸에 대해 (이제야) 배우고 있다. 있는 줄도 몰랐던 근육의 느낌을 찾아가면서 신기해하고 있다. 작년에 시르사아사나를 할 때는 중심을 잡는 게 우선이라, 배와 코어를 중심으로, 목, 어깨, 팔 힘을 주로 썼는데, 최근 시르사아사나를 다시 해보니, 등이 움찔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등에도 근육이 있으니, 등으로도 힘을 쓰는 게 맞다. 아마 그 전에도 분명 등에 힘이 들어갔을 텐데, 작년에는 그걸 전혀 느끼지 못했었다. 렛풀다운을 내가 열심히 하긴 했나 보다. 


(왼쪽)시르사아사나와 (오른쪽)렛풀다운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1단계로 완화됨에 따라, 지난 주말 집 근처 축구장에는 오랜만에 조기축구회가 열렸다. 

  원래 그곳은 그동안 주말마다 하루 종일 축구를 하던 곳이었다. 일주일 내내 일하느라 지쳤을 텐데, 이 황금 같은 주말에 집에서 널브러져 쉬지 않고 주말에 축구를 하러 나온다는 건 내 입장에서는 신기한 일이었다. 아마 어렸을 때부터 뛰든 싸우든 어떻게든 몸을 썼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 남자 친구들이 점심시간에 허겁지겁 밥 먹고 운동장에 나가 그렇게 축구를 했는데, 아마 이 사람들이 그런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날씨도 좋은데 축구나 할까', 더 나아가 '심심한데 축구나 할까'는 생각에 이 황금 같은 주말에 나와 공을 차고 있는 것이겠지. 


  나는 막상 운동할 때는 '두 개만 더!', '한 세트만 더!' 하며 열심히 하지만, 심심할 때 '운동이나 할까' 하는 수준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 아무리 날씨 좋은 화창한 주말이라도, '날씨가 너무 좋잖아! 이런 날은 운동해야지!' 하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운동하러 나가는 건 (많이 자연스러워지긴 했으나) 아직까지는 의지를 끌어올려야 하는 일이다. 


  심심할 때 피아노 생각이 나는 것처럼, 심심하니까 옆에 있는 책을 그냥 집어 볼 수 있는 것처럼, 운동이 나에게 그렇게 다가오도록 연습하는 중이다. 

  나의 목표는 '심심한데 운동이나 할까'하는 생각이 드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했다면 쉬운 일이었을 텐데, 서른이 넘어 시작했으니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오래 걸리겠지. 계속 의지를 다져야겠지. 


  지금이야 '일시정지'의 기간이라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 그래도 쉽게 운동하러 나갈 수 있지만, 아마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게 되어 거기에 에너지를 쏟아붓게 되면 매일 운동하는 건 아마 꽤 어려워질지도 모르겠다. 그때를 위해 준비하고 있다. 나중에 아무리 스케줄로 바빠져도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뭐가 빠졌지?' 하는 허전한 느낌이 들도록. 지쳐 늘어져 있고만 싶은 주말에 "오늘은 운동할 시간이 충분하네!"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목표를 이루는 그날을 꿈꾸며 나는 오늘도 운동복을 갈아입고 몸을 움직이러 나간다. 

  아무 스케줄 없는 어느 날, 갑자기 '심심한데, 운동이나 할까'하는 생각이 든다면. 그날은 무슨 운동을 할까. 요가도 좋고 웨이트 트레이닝도 좋고, 날씨가 좋다면 그냥 뛰쳐나가 달리는 것도 좋겠다. 운동 is 뭔들. 


  갑자기 무척 설렌다. 이럴 수가, '심심한데 운동이나 할까'하는 생각을 내가 할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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