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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워녕 Oct 19. 2020

아니, 내가 내 꽃을 피우겠다는데

내 나이가 어때서. 네 나이는 또 어때서.


  얼마 전 한 초등학생에게 '꼰대란 무엇인가'하는 인터뷰를 하는 것을 보았다. 아이는 "나이가 들면 꼰대가 되는 거 아닌가요?"라고 대답했다. 꼰대 같은 모습만 보여준 기존의 어른들도 문제가 있었겠지만, 나이 드는 걸 부정적으로만 여기는 것 같은 그 아이의 대답에 많이 놀랐다. 나는 빨리 나이 들어 할머니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 그런지, 이 인터뷰는 여러모로 계속 곱씹어 생각하게 되는 인터뷰였다.


  나는 우리 부모님과 단 한 번도 '나이' 때문에 대화가 단절된 적이 없었다. 아마 내가 본격적으로 기억하는 건 부모님이 이미 40대의 나이로 살아가고 있었을 때인데도, 그 흔한 세대차이도 딱히 느껴본 적이 없다.

  나의 부모님은 단 한 번도 '내 나이가 지금 몇 살인데'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40대, 50대, 60대를 맞이하고 겪으면서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에 대해 분명 무언가 달라지는 게 있었을 텐데, 우리 부모님은 '내가 지금 몇 살이라서...'라는 핑계를 대지 않았다. 노안이 와서 눈이 잘 안 보인다고 안경을 새로 맞출 때도 그전에 새 안경을 맞추러 갔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별 일 아니었다.


  나에게 단 한 번도 '너는 아직 어리니까'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몇 살이든 부모님은 내가 듣는 음악을 함께 들었고, 나는 부모님이 보는 책을 함께 봤다. 같은 활동을 했고, 같은 TV 프로그램을 봤고, 같은 음식을 먹었다. 나는 요즘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것들을 부모님에게 알려주며 함께 놀았고, 부모님도 '쎄시봉', '이선희'같은 좋은 가수들을 나에게 알려주며 함께 즐겼다.

  다른 사람들은 흔히 '친구 같은 부모님'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나의 경우에는 '부모님 같은 친구'였다. (참고 :  <아빠 같은 친구, 딸 같은 친구>) 나는 단 한 번도 부모님의 나이를 생각하며 짜증내지 않았고, 내 나이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심지어 기대되는 일이었다.


  그랬던 내가 스무 살이 되고 대학생활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고등학교 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나는 여전히 '학생'인데, 'semi-사회생활'이 시작되었다. 주위의 모든 친구들과 어른들(주로 교수님들)은 내가 스무 살이라는 사실을 하루에도 몇 번씩 상기시켰다. 스무 살이니까 술도 (많이) (잘) 먹어야 하고, 스무 살이니까 밤새 놀아야 하고, 또... 못했던 것들을 실컷 하면서 스무 살의 낭만을 즐겨야 한다고 했다. 어떤 교수님은 허름한 막걸릿집에 데려가 텁텁한 막걸리와 삭히고 삭힌 홍어를 사주면서 "이제 스무 살이 되었으니 이런 걸 먹을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냥 열아홉 살을 지나 스무 살이 되었을 뿐인데, 다들 '스무 살'에 너무 많은 의미부여를 하고 있었다.


  스무 살의 자유를 마음껏 누려야 한다고 했지만, 사실 나는 그동안 그런 것들을 못해서 안 했던 건 아니었다. 우리 부모님은 하고 싶은 건 늘 그냥 하라고 하셨다. 무단결석이든 음주가무든 외박이든. 대신 미리 말만 해달라고 했다.

  아마 부모님은 나를 키우면서 벌써 나의 성향을 알고 믿었던 것 같다. 나는 롯데월드에 가서도 로티와 로리가 다가와 친한 척하면 그 자리에서 울어버리는 그런 아이였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낯선 것을 무서워했고, 무작정 모험하지 않았고, 안전이 보장된 곳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 내가 밤새 놀고 오면 그 이야기를 듣는 걸 부모님은 또 재밌어하셨다. 그리고 나는 한 번 해보면 그걸로 충분했다. 피곤하기도 하고.


  그런데 대학생활의 세계에서는 그런 것들을 해야만 자유로운 거라고 했다. 과방, 동방에서는 매일 술판이 벌어졌다. 날이면 날마다 클럽에서 밤새고 찌든 모습으로 아침 수업을 듣는 학생이 수두룩했다. '하지 않을 자유'는 없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대체 자유가 뭐길래. 무엇보다, 그동안 모두 이런 걸 참고 살아왔다는 게 놀라웠다. 중고등학생 시절을 스무 살이 되기만 기다리며 금욕생활하듯 지냈다니! 배울만큼 배웠다는 사람들이 이렇다니, 이런 사람들이 곧 우리나라를 이끌어간다니, 나는 나날이 실망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나이'라는 틀에 서서히 갇혔다. 스무 살은 이래야 하고, 스물한 살은 이래야 하고... 여자의 나이는 '크리스마스 케익'이라는 말도 그때 처음 들었다. 스물다섯 살이 지나면 끝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며 즐거워하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언짢았다. '계란 한 판'이 서른을 의미한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아니, 서른이면 서른이지, 무슨. 계란 한 판 같은 소리 하네.


  따지고 보면, 그 모든 것은 '결혼'이라는 결론을 향한 것이었다. 어느 순간 인생의 목적이 '결혼'이 되는 것 같았다. 주위 친구들과 선후배들은 스물일곱, 스물여덟 살에 결혼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아무리 늦어도 스물아홉에는 결혼해야 한다는 인식이 당연했다. 아무도 '좋은 사람을 만나면'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나의 부모님은 나를 그런 세계에서 최대한 동떨어져서 자라도록 했던 것 같다. 나는 부모님과의 대화에서 결혼에 대한 결론을 이미 낸 바 있는데, '좋은 사람이 있으면 그게 언제든'이 그것이었다. 스물이든 서른이든 마흔이든. 부모님의 조건은 하나였다. '내가 좋고, 나한테 좋은 사람'.

  (그래서 우리 엄마는 늘 최악의 시나리오를 예상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곤 했다. 만약 내가 스무 살 봄에 너무 멋있는 남자를 만났다며 결혼을 하겠다고 한 남자를 집에 데려왔는데 50살이 넘었고, 두세 번 이혼한 경력이 있고, 중고등학생 자녀가 있고, 빚이 있고, 술과 담배를 너무나 좋아하고, 대머리인데 두 세 가닥 남은 머리카락을 목숨처럼 여기고, 배가 불룩 나왔고, 시골에는 팔순이 넘은 부모님이 계시고, 매달 제사를 지내는 집안이고, 심지어 누나와 여동생이 위아래로 대여섯 명씩 있고, 누나들의 자녀가 결혼해서 낳은 아이들이 나에게 할머니라고 부르고 있다면?)


  꼴랑 딸 하나를 키우는 부모님이 이런 마음의 준비를 하기까지 얼마나 고심하셨을지. 하지만 부모님의 이러한 필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이 유치한 사회분위기에 점점 적응했고, 그리고 '나이'라는 틀에 갇혀버렸다.

  나는 스물다섯 살에 대학을 졸업했는데, 본격적으로 사회에 나오면서 나이가 한 살 한 살 들어가는 것에 강박(과 같은 어떤 이상한 느낌)을 가졌다. 큰일이었다. 벌써 스물다섯 살이라니. 내년이면 스물여섯이고, 스물일곱, 스물여덟, 스물아홉, 그러고 나면 무려 서른!


  그때 누군가 "네 나이가 어때서."라고 말해줬더라면.


  스물일곱 살 때 드디어 나는 내가 나이의 틀에 갇혔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나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어제보다 오늘 하루 더 산 것뿐이다', '나는 성숙해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주문을 외듯 계속 되뇌었다. 하지만 자꾸 문득문득 압박감이 몰려왔다. 아이고 벌써 스물일곱이네! 큰일 났네 벌써 스물여덟이네! 어떡하지 내년이면 서른이잖아! 제발 안 그러려고 고개를 휘젓고 다른 생각을 하다가도, 갑자기 조급해졌고 불안해졌다. 그렇게 스물아홉 살까지 나의 사투는 계속되었다.


  그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된 건 서른이 되었을 때였다. 그제야 자유함을 느꼈다. 드디어 그 어떤 조급함과 압박감 없이 나의 온전한 인생을 살 수 있게 된 느낌이었다. 서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아이고 벌써 서른 한살이네, 큰일 났네 서른두 살이네,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단순히 '서른'이 되어서가 아니라, 사투의 시간을 가진 결과라고 나름 생각하고 있다. 내 친구들 중에는 서른이 넘어서도 한 살 한 살 먹어가는 것에 불안해하는 친구가 여전히 많다.)




  시간이 주는 느낌은 정말 신비롭다. 똑같은 시간이어도 앞으로의 시간과 지나간 시간을 대할 때의 느낌은 전혀 다르다. 그 느낌을 가장 쉽게 대할 수 있을 때는 다이어트할 때인 것 같다. '앞으로 2달!'이라고 하면 끝없는 시간 속에 있는 느낌인데, '지난 2달!'이라고 하면 별거 없이 2주 정도 슥 지나간 느낌이다. 똑같은 2달인데.


  같은 맥락에서 '앞으로 10년!'이라고 할 때와 '지난 10년!'이라고 할 때의 느낌은 굉장히 다르다.


  내가 대학을 졸업했을 때는 겨우 스물다섯 살이었다. (나는 스물다섯 살이나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5년 만에 간신히 졸업했다고 생각했지만, 겨우 5년이었다. 그때 이후로도 10년이나 지난 것 같지만, 아마 10년 후에 지금을 돌이켜 생각해본다면, 겨우 10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껏 살아온 것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을 살아가야 한다. (별 탈이 없다면)


  내 한 친구는 스물일곱 살 때 가장 우울했다고 했다. 그때처럼 자기 인생을 한탄했던 때가 없다고 했다. 다른 친구들은 이미 회사에서 자리를 잡아 경력도 쌓고 돈도 꽤 모으고 있는데 자기만 뒤떨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더 나이가 들기 전에 결혼도 빨리 해야 할 것 같은데 누굴 만날 자신도, 돈도 없었다고 했다. 나이는 많이 먹은 것 같은데 해 놓은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고. '벌써 스물일곱 살이고 내년이면 스물여덟 살이고, 곧 서른이네'라는 생각에 다른 걸 시도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고. 그 친구는 길고 길었던 자기 이야기를 이렇게 끝마쳤다. "근데 있잖아. 나 그때 겨우 스물일곱 살이었어."

  그 이후로 7년이 지났다. 지금, 그 친구는 안정적인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고 (그건 또 그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지만), 좋은 배우자를 만나 재작년에 결혼을 했고 아이도 낳았다(그건 또 그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지만). 이 모든 일이 7년 동안 일어났다. 17년 아니고, 불과 7년.






 (...) 저는 '나이가 한 살 더 든다는 건, 봄을 한 번 더 본다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사는 게 사실 뭐 대단한 게 없어요. 나이 먹는 것도 특별한 게 없고요. 삼십이 되면 달라질 것이다, 오십에는 어떤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없어요. 똑같아요. 살아보니 나이를 먹는다는 건 봄을 한 번 더 보는 것일 뿐이에요. 곽재구 시인의 표현대로 '햇살을 등에 얹고 흙냄새를 맡으며' 내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거예요. 김화영 선생의 표현으로라면 '살아 있다는 놀라움, 존재한다는 황홀함'이겠고요.
  - 박웅현, <다시, 책은 도끼다>


  정작 '나이'라는 틀에 스스로를 가두는 건 나이가 어린 사람들인 것 같다는 생각을 요즘 하고 있다. 괜히 나이 탓을 하며 조급해하고 침울해하는 모습을 보면 '아직 어리구나'는 생각이 들면서 안타깝다. 초보 운전자가 코앞밖에 보지 못하는 것처럼, 아직 시야가 좁아서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다.

  어르신들은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라며 여기저기 도전하면서 열정을 끓어 올리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자유롭게 살아가시는데, 오히려 젊은 사람들이 도태되는 느낌이다. 실수도 실패도 아름다운 도전으로 기억되어야 하는데, 도전도 하기 전에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기회를 버린다. 어르신들 열정의 반도 없으면서,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보면 그저 안쓰러워하거나 때로는 비웃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아쉬운 느낌이 든다.


  배워서 되는 부분은 아닌 것 같다. 스스로가 충분히 겪고 깊이 고민하면서 하나씩 깨달아 나가야 하는 것 같다. 내가 그랬듯.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문득문득 나를 잠식시켰던 그 강박은 어쩔 수 없었던 것처럼. '다 지나갈 거야'라는 쉬운 말로 알게 되는게 아니다. 몸부림도 치면서 고민하며 겪을 만큼 겪어야 한다.


  이것은 마치 초보운전자가 베테랑 운전자가 되는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어떻게 하는지 배워 다 알고는 있지만, 문득문득 불안해지는 것이다. 운전 강습을 오래 받는다고 베테랑 운전자가 되지 않는다. 많이 생각해보고 많이 겪어야 한다. 그러는 동안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 '멀리 볼 것'.

  내가 처음 운전을 시작할 때 아빠는 이렇게 말했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게 해주는 게 베스트 드라이버가 아니야. 함께 탄 사람과 편안하고 즐겁게 갈 수 있는 사람이 베스트 드라이버야. 그러려면 멀리 봐야 해. 코 앞만 봐서는 운전이 초조해질 수밖에 없지."


  베테랑 운전자는 멀리 본다. 절대 조급하게 차선을 바꾸지 않는다. 지금 바꾸는 게 좋으면 지금 바꾸고, 기다렸다가 나중에 바꾸는 게 좋으면 나중에 한다. 지금 좌회전을 못해도 괜찮다. 다음 교차로에서 하면 된다. 샛길로 빠지는 도로를 못 보고 지나쳐 그냥 가도 괜찮다. 목적지에 못 가는 게 아니다. 불안해할 것 없다. 조금 돌아가면 된다. 초보운전자가 "어떡하지?", "큰일 났네!!" 하는 모든 상황에서 베테랑 운전자는 침착하다. 아직 끝난 게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돌고 돌아, 나의 부모님이 바랐던 원래 나의 모습을 되찾았다. 힘들었던 사투의 시간을 지나, 자유롭되 안정적으로, 느긋하되 성실하게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나이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몇 살에는 뭘 해야 하고, 또 몇 살에는 뭘 해야 한다며 구속받지 않는다. 열아홉 살이 지나 스무 살이 되었듯, 서른세 살을 지났고 서른네 살을 살아가고 있다.


  중요한 건 열정이다. 무엇을 할 때 열정이 끓어오르는가. 얼마나 열정을 끓어 올릴 수 있는가.


  중학교 때 우리 학교에는 미친 개나리가 있었다. 보통 개나리는 봄에 일제히 꽃을 피우지만, 이 개나리는 1년 365일 매일 한두 송이씩 노랗게 피었다. 한 여름에 장맛비 속에서도, 한겨울에 눈송이 속에서도 노오란 꽃송이가 한두 개씩 보이면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저 개나리 진짜 미쳤네.  

  최근, 갑자기 그 미친 개나리 생각이 났다. 날짜가 뭔 상관. 계절이 뭔 상관. 피면 안 되는 때가 어디 있고, 반드시 피워야 할 때가 어디 있나. 이른 때는 어디 있고, 늦은 때는 또 어디 있어. 꽃을 피우겠다는데. 내가 내 꽃을 피우겠다는데. 내가 하겠다는데.


  "늦은 나이는 없다. 늦은 마음이 있을 뿐."

  이영희 한복 디자이너가 즐겨하는 말이라고 한다. 마흔 살에 한복 디자이너의 삶을 시작했다는 이 분은 또 이렇게 말한다. "늦는다는 것은 없어요. ‘나 같은 사람이 하겠나’ 이런 생각도 그렇고요."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하지 않을 수도 있죠.  

  하고 싶으면 하면 되고,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하면 됩니다.

  언제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언제든 하지 않아도 괜찮죠.  


  늦은 건 없어요. 너무 이른 것도 없죠.

  적절한 때는 있겠네요. 열정으로 준비하고 시작하는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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