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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워녕 Oct 09. 2020

소중한 것을 더욱 소중히

 

  어떤 드라마에서 18년 전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왔다. 별생각 없이 보고 있다가 문득, '18년 전이면 언제지?' 하는 생각이 들어 따져보았다. 지금이 2020년이니까 계산은 어렵지 않았다. 2002년. 18년 전이면 사진도 흑백사진일 아주 오래된 옛날일 것 같은데, 고작 2002년이었다.


  2002년이 생생하다. 다들 그렇겠지만. 열광하고 열광하면서 상암동, 시청 앞, 치킨집으로 달려가 소리소리 질렀던 그때. 관심도 없었던 외국 축구 선수 이름들을 줄줄 읊어대던 때. 어떤 손해를 입어도, 어떤 피해를 당해도 다 괜찮던 그런 때.


  그 2002년이 18년 전이라니! 8년 전쯤 되는 것 같은데, 18년 전이라니.


  기억의 세계는 10살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것 같다. 10살이 되기 전의 기억은 아주 인상적인 사건들을 중심으로 한 단편적인 기억이다. 그래서 18살, 19살만 해도 10년 전 기억을 잘 떠올리지 못한다. 10년 전 기억을 생생히 떠올릴 수 있는 건 스무 살이 넘으면서부터인 것 같다.


  난 친하게 지내는 초등학교 친구들이 있다. 스물세 살쯤 되었을 때, 그 친구들과 "우리가 10년 친구라니!" 하면서 소름 돋아했었는데, 이제 그 친구들이 20년 친구들이 되었다. 10년 전 기억이 생생하다는 사실에 놀라워했었는데, 이젠 20년 전 기억도 생생한 '어른'이 되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일제 시대 때 이야기를 10년 전 이야기처럼 하곤 하셨는데, 이제야 좀 이해가 간다. 할아버지는 그때가 생생하셨던 거다. 나에게 2002년이 생생한 것처럼.  


  2002년의 나는 2020년의 나를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내가 어떤 신념을 가지고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기대감으로 가득했지만, 한편으로는 막막한 마음으로 나는 나를 궁금해했다.




  18년 전, 2002년,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체육 점수를 받기 위해 날이면 날마다 밤 12시까지 집 앞에서 줄넘기 쌩쌩이를 연습했는데, 그러느라 줄넘기에 맞은 자국으로 종아리와 팔이 온통 새빨갛게 되었다. 엄마는 무슨 줄넘기를 이렇게까지 하냐며, 그깟 체육 점수 좀 덜 나오면 어떠냐고 했지만 나는 그런 소리를 들은 날에도 달밤에 나가 줄넘기를 했다. 아빠는 어떻게 하면 쌩쌩이를 계속 연속으로 할 수 있을지 내 옆에서 함께 고민하면서 같이 줄넘기를 했는데, 그러느라 아빠의 팔다리에도 빨간 줄넘기 자국이 생겼다. 쌩쌩이 소리가 시끄러워 옆집 아주머니는 잠옷바람으로 뛰쳐나와 '도대체 잘 수가 없다'면서, '제발 쉬엄쉬엄 하라'고 타일렀다. 체육점수가 나오자 나는 옆집 아주머니에게 제일 먼저 알려드렸는데, 아주머니는 아이고 잘했다며, 이제 밤마다 그놈의  줄넘기 소리 안 들어도 되는 거냐며 좋아하셨다.


  그뿐인가. 밤 10시까지 학교에서 야자하고 학원으로 뛰어가 새벽 2시까지 공부하고도 집에 돌아와 또 복습하던 나의 시간. 밤새워 팀플 하고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채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던 나의 시간. 늘 어디서든 잘 준비가 된 짐가방을 차 트렁크에 싣고 지방으로 출장 다니던 나의 시간. 불끈 쥔 주먹이 덜덜 떨리는 자리에서 끝끝내 울음을 터뜨리지 않고 집에 돌아오던 나의 시간.


  정말 열심히 살았구나, 나.


  지난 18년을 돌아보니 많은 일이 있었다. 나는 늘 열심이었고, 그 열심의 힘이 내 삶을 지탱해주었다. 그 모든 시간은 나의 시간이었다. 일이 끝나고 나면 '잘했다', '수고했다'고 할 때도 있었지만, 열심히 한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아니,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일 자체가 허무하게 무산된 적도 있었다. 너무 허탈해서 허허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런 시간까지도 나의 시간이었다. 아름다웠다.


  나는 늘 나의 모든 걸 쏟아부었던 것 같다. 내가 있는 곳에, 내가 해야 할 일들에 나는 몸을 사리지 않고, 아니 몸을 축내가면서 에너지를 쏟았다. 잠자는 시간, 쉬는 시간은 늘 아까웠다. '어차피 죽으면 실컷 잘 테니까'가 나의 지론이었다. 나는 밥을 매우 천천히 먹는 편인데, 누군가와 같이 먹는 건 괜찮아도, 혼자 먹을 때는 먹는 시간이 아까워서 조금이라도 빨리 먹기 위해 그냥 선 채로 후루룩 먹곤 했다. 그래도 보통 다른 사람들이 먹는 시간보다 오래 걸려서, 차라리 그냥 맛있는 걸 맛있게 먹는 시간이었다며 정신승리를 하기도 했다. 아름다웠다.

 

  나는 무언가를 할 때는 뛰어들어서 해야 하고, 손을 댄 이상 대충 하지 못한다. 아마도 완벽주의자적 기질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특히 '마무리'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서 어떻게든 끝을 볼 때까지 일을 해야 하고, 완벽한 마무리를 위해 몸과 마음을 많이 고생시키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무엇이든 열심히 하게 되는 것 같은데, 이 열심은 지난 나의 시간이 아름다웠다고 인정하게 해 준다. 이는 나의 자부심이다.


<미생>에서 몸고생, 맘고생으로 하루를 보내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면서 장그래는 이렇게 말한다. "끝은 봐야죠." 위 장면은 끝을 보고 나오는 모습.


  하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나는 늘 지쳐있었다. 훨씬 더 낭만적으로 보낼 수 있었던 20대, 대학생활, 아니, 그전에, 뭘 해도 꽃이 되는 중고등학교 시절. 그 소중한 시간에 나는 항상 피곤해했다.


  현재의 나의 시간을 그저 '무언가를 위한 과정'으로만 여기던 때는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그 자체로 너무나 아름다운 시간인데 나는 그 시간을 미래를 위해 '포기'해야 하는 시간으로 여겼던 것 같다. 열심히 살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걱정하던 때는 아까움으로 남는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순간임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충분히 느끼지 못하고 노심초사했다.


  좋은 결과를 얻었어도 만족은 없었다. 그저 또 하나의 문을 열었을 뿐. 문이 열리자, 또 다른 세상이 또 나를 몰아붙였다.

 어쩌면 우리는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다가오는 문만 열어가면서 살아가는 게 아닐까.
  <미생> 9화.  


  '아무튼 다 지나간다'는 걸 배우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것도 함께 배웠다. 이건 이 모든 걸 겪어본 선배들과 어른들이 누누이 말했었고, 또 훌륭한 책과 영화에 다 나와있던 사실이었지만, 그래서 '그래, 다 지나가겠지, 지금 과정 속에 있는 거야'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 사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은 결국 내가 다 겪어보고 난 이후였다. 아무튼 깨달았다는 건 고무적이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가장 에너지 넘치고 빛이 되는 시기에 너무 열심히만 살았다.


 




 중요한 건 시간이 지나고 나면 과연 그게 그렇게 중요했었나 싶지만, 소중했던 건 지나고 나면 아프더라고.
  <악의 꽃> 9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좋은 성적,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은 지나고 보니 과연 그게 그렇게 중요했었나 싶다. 하지만 소중했던 것들은 생각하니, 정말, 아프다. 그러나, 아프다고 해서 소중히 여겼던 것들에 대해 후회하진 않는다.

  '소중'이란 그런 것이다. '소중'에는 "괜히 소중히 여겼네"라는 후회가 없다. 다시 그때 그 순간으로 돌아가도, 소중했던 순간, 소중했던 사람들은 똑같이 소중할 것이다. 아플 줄 알지만, 괜찮다. 많이 아파도 괜찮다. 그만큼 사랑했다는 것이니까. 아름다운 아픔이다. (이 아름다운 아픔에 대해 모브닝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은 나를 눈물짓게 할 테니까'하고 노래하고 있다.)


  모든 시간은 같은 무게를 지닌다. 더 가벼운 시간도, 더 무거운 시간도 없다. 사람은 어떤 시간을 더 중요히 여기고, 어떤 시간은 지나쳐 보내기도 하지만, 그건 시간에 대한 개인의 태도의 문제지 시간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어제의 5분은 오늘의 5분만큼 무겁고, 오늘의 5분은 내일의 5분만큼 무겁다.

  어떤 시간도 미래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를 위해 포기해야 할 시간이란 없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지금을 팽개칠 수는 없다. 목표와 결과만을 위해 존재하는 시간이란 없다. 중요한 것을 위해 열심히 보내고 있는 시간 속에서도 소중한 것을 더욱 소중히 여길 수 있다. 나의 사람들, 나의 노래, 나의 꿈.


  배부른 소리가 아니다. 먹고 살만 해서 이런 소리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는 것은 처지와 상황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주위를 챙기지 못하면 나중에도 주위를 챙기지 못한다. 누릴 줄 아는 사람은 어떤 지독한 환경에서도 누릴 수 있고,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풍족한 환경에서도 누리지 못한다.


  한 친구가 나에 대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을 만큼 나는 꽤 칼 같은 사람이다. 그건 엄마를 닮아서 그런 것 같다. (참고 : <나의 엄마, 나의 치와와>) 나는 매우 철두철미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인데, 그 와중에 감수성에 대한 욕심이 있다. 이건 또 아마 어렸을 때부터 책을 너무 봐서 그런 것 같다. (참고 : <책을 많이 보는 사람은 많이 사랑할 줄 아는 사람>)  작가들은 살짝 내려앉는 햇빛, 살랑이는 바람과 같은 것들을 예찬하니까.

  덕분에 나는 아주 열심히 살면서도, 누릴 줄 아는 사람을 선망한다.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다가도 길거리에서 어떤 음악을 들으면 잠깐 멈춰 듣는 그런 사람.


  열심히 산 나의 시간들에 후회는 없다. 자랑할만한 시간들이었다. 다만 중요한 것을 중요히 여기느라 소중한 것들을 소홀히 여긴 순간은 아쉽다. 내 딴에는 소중히 여긴다고 소중히 여겼지만, 열심히 산다고 더 소중히 여기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더 느끼지 못하고 더 누리지 못했던 시간들. 함께 더 보내지 못했던 시간들, 그리고 더 사랑하지 못했던 시간들. 소중했던 것들을 떠올려보니 마음 한 구석이 아린다.


  '아무튼 다 지나간다'는 것을 배웠으니, 나를 옥죄는 일은 더 이상 없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으니 어떤 경우에도 나는 나를 채찍질하지 않기로 했다. 시간이란 그런 것이다. 늦은 것은 없다. 빠른 것도 없다. 모든 시간은 그저 나의 시간이다. 나의 모든 시간은 묵직하고 찬란하다. 열심히 살았던 나는 아름다웠고, 지금을 사랑할 줄 아는 나는 근사하다.



  며칠 전, 친구가 너무 좋은 카페에 왔다면서 나에게 그곳 사진을 찍어 보내주었다. 내가 좋아할 것 같다면서. 친구가 보내온 몇 장의 사진을 본 나는 망설이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급히 세수하고 옷 걸쳐 입고 1시간 반 거리의 그곳으로 곧장 달려갔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그곳에 있었다. 수많은 책.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온통 책이었다. 심지어 쉽게 구할 수 없는 원서들. 그리고 달. 메뉴판을 보는데 full moon 블렌드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눈 앞에 아무 책을 골라 대충 펼쳤는데 거기엔 운명처럼 달 사진이!


  이보다 우선으로 두어야 할 것이 대체 무언가. 이제는 이 소중한 시간에 다른 중요한 것들을 중요히 여기느라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 다른 중요한 것들을 제쳐두는 한이 있어도 충분히 느끼고 충분히 누린다.



  +)

  지금이 18년 전이 되는 미래의 그날, 이 순간은 또 얼마나 생생할까요. 2020년의 나를 보며 대견해하길 바랍니다. 나의 이 소중한 순간들을 생생히 떠올리며 아름다워하며 아파하길!

  그나저나, 지금부터 18년 후면, 2038년이겠네요. 그럼 저는 50살이 넘었겠군요. 지천명(知天命)이 지나 있겠네요. 세상에 너무 멋지지 않아요? 지천명이라니! 그때가 되면 애쓰지 않아도 하늘의 뜻을 몸소 알게 될까요.  

  그래도 아직 할머니는 못 되었겠네요. 휴, 할머니 되는 일이 이렇게나 힘든 일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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