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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워녕 Dec 09. 2019

나의 엄마, 나의 치와와.

 

 우리 집에는 치와와 한 마리가 산다.


 처음부터 이 녀석이 우리 집에서 살았던 것은 아니다. 이 치와와가 우리 집에 처음 온 날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원래 이 치와와는 다른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서 1년 정도를 사는 동안 구박을 많이 받았다. 짖는다고, 똥을 싼다고. 사실 모든 개는 짖고, 똥을 싼다. 개가 밤낮 가리지 않고 짖거나 아무 데나 똥을 싸면 문제가 되지만, 이 치와와는 낯선 사람을 보면 짖고, 정해진 장소에 가서 똥을 싸는, 강아지로써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음에도 그 집 사람들은 그 강아지를 혼냈다. 아마 강아지를 키워본 적이 없는 그 사람들은, 강아지로 인해 자신들의 루틴이 방해받는 것을 많이 싫어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엄마가 그 집에 놀러 갔고, 그 치와와는 신기하게도 생전 처음 보는 우리 엄마에게 꼬리를 치며 달려가 냉큼 안겼다고 한다. 우리 엄마는 '세상에 무슨 이런 치와와가 다 있느냐'며 까맣고 깊은 그의 눈동자에 빠져버렸고, 그 집에서는 얼씨구나 하며 우리 엄마에게 그 녀석을 데리고 가달라고 사정했다. 당시 우리 집에는 이미 3마리의 강아지가 있었음에도, 엄마는 이 치와와를 냉큼 품에 안고 집에 돌아왔다. 


 겨울이었다. 나는 집에서 엄마를 기다리며 귤을 까먹고 있었다. 엄마가 들어오는 소리가 나자 나는 대문으로 달려갔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두꺼운 코트 안에서 조그만 치와와 한 마리를 조심스럽게 꺼내 내려놓았다. 붕어빵이나 한 봉지 꺼낼 줄 알았던 엄마가 치와와를 꺼내놓다니! 나는 당황했다. 

(지금은 통통해진 치와와의) 여전히 까맣고 깊은 눈동자

 같이 귤 까먹고 있던 강아지 3마리가 내 뒤에 서서 요란스럽게 짖기 시작했다. 엄마는 기존의 강아지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아직 좋은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한 상태였다. 

 상황을 해결한 건 이 치와와였다. 이 치와와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꼬리를 치며 처음 보는 내게 와서 안겼다. 나는 얼떨결에 치와와를 안았다. 아주 깡마른 체형의 이 치와와는 다른 강아지들이 짖든 말든 하나도 관심이 없었다. 이 녀석은 품 안에서 오로지 나를 쳐다보았다. 까맣고 깊은 눈동자. 우리는 몇 초간 서로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 녀석과 나와의 첫 교감이었다. 

 

 나는 너의 강아지, 너는 나의 사람. 


 이 교감 이후 놀랍게도 기존의 강아지 3마리가 조금씩 흥분을 가라앉혔다. 엄마가 어떤 대단한 훈육을 하지 않았음에도, 강아지들은 자리에 앉아 치와와를 안은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천천히 치와와를 내려놓자, 강아지들은 조심스럽게 치와와에게 다가왔다. 치와와는 긴장한 모습이 역력해 보였지만, 나를 쳐다보며 눈길을 떼지 않았다. 세 마리의 강아지가 치와와를 둘러싸고 냄새를 킁킁 맡았다. 인정이었다. 


 우리는 이 사람의 강아지, 너도 이 사람의 강아지. 


 그 날 이후 이 치와와는 처음 보는 그 누구에게도 꼬리를 치며 가서 안기지 않는다. 지금도 낯선 사람을 보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목이 터져라 짖는다. 어쩌면 내가 이 치와와를 키우기로 선택했다기보다는, 이 치와와가 나를 선택했지 싶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났다. 

 3마리의 강아지들은 나이가 많아 늙어 죽었고, 엄마도 하늘나라로 가셨다. 

 이제 나와 이 치와와만 남았다. 


 우리 집에는 치와와 한 마리가 산다.






 우리 엄마는 중간이 없는 사람이었다. 무언가에 대해 늘 극단적이었다. 아주 좋거나, 아주 싫거나. 상황이든 사물이든, 아니 사람이라도 얄짤없었다. 싫은 건 싫은 거였고, 좋은 건 좋은 거였다. 엄마의 그러한 성향이 드러날 때마다 아빠와 나는 엄마를 놀리며 웃곤 했다. "아이고, 엄마 또 저러네." 하며. 단 하나의 예외는 '나'였다. 나는 엄마가 싫어하는 행동을 꽤 많이 했지만, 그럼에도 엄마는 나를 참고 용납하며 사랑했다. 


  단적인 예로, 우리 엄마는 청소를 매일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청소기를 돌렸고, 걸레질을 했다. 단 한 번도 부엌 싱크대에 설거지거리를 남겨둔 채 잠을 잔 적도, 출근을 한 적도 없었다. 집에는 항상 강아지가 서너 마리씩 있었는데도 집안에는 강아지 냄새가 나지 않았고, 강아지 털을 옷에 묻히고 다닌 적도 없었다. 

 당시 학생이었던 나는 이불에서 빠져나오면 학교 가기 바쁜 학생이었으니 청소는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엄마는 항상 내 방에만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다고 불평하곤 했다. 그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나는 밖으로 그냥 나가버렸지만, 저녁에 돌아와 보면 방바닥에는 머리카락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 깨끗한 방바닥은 내가 밟는 순간부터 다시 머리카락이 굴러다녔고, 다음날 내가 나가면 엄마는 그 방바닥을 또 쓸고 닦았다. 


 그런 나였지만, 그럼에도 엄마는 나를 사랑했다. 


 내가 스무 살이 되었을 무렵부터는, 엄마는 나의 애정을 보다 적극적으로 갈구하기 시작했다. 나의 애정을 얻기 위해 엄마는 끊임없이 나를 유혹했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려 레시피를 연구했고, 뜬금없이 치킨과 피자를 먹자며 집에 일찍 들어오기를 종용하기도 했다. 엄청 맛있는 맛집을 찾아냈다며 같이 가자고도 했고, 가장 비싼 핸드폰을 사주겠다며 주말에 시간 비워놓으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밖에 있는 게 더 즐거웠다. 만나야 할 사람도 많았고, 해야 할 일도 많았다. 엄마가 맛있는 음식과 비싼 핸드폰으로 나를 꼬셔서 어쩌다 같이 갈 때면, 나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데만 집중했고 비싼 핸드폰에만 눈길을 주었다. 엄마는 나와 같이 있는 '시간'을 원했지만, 나는 그걸 귀찮아하며 엄마가 던지는 '미끼'에만 잠깐 관심을 보였을 뿐이었다. 

 나의 그 하찮은 애정(애정이라 할 수도 없는 보잘것없는 애정)에도 엄마는 절절맸다. 미끼만 홀랑 빼먹고 내빼는 걸 알면서도 엄마는 끊임없이 현란한 미끼를 던지며 나를 끌어당기려 했다. 그러면 나는 못 이기는 척 엄마에게 나의 시간을 조금씩 주었고, 엄마는 그 시간에 엄마의 모든 것을 갈아 넣어 나를 사랑했다. 




 우리 집 치와와는 유독 엄마를 쏙 빼닮았다. 호불호가 분명하다. 싫은 사람은 죽어도 싫어해서 목에서 피가 날 때까지 짖어대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온 몸이 부서져라 뛰어다닌다.(문제는 좋아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 

 특히 스킨십을 싫어하는데, 처음 온 날 달려와서 냉큼 안겼던 것을 생각하면 어이가 없을 정도다. 끌어안으면 발버둥을 치며 도망가고, 억지로 무릎 위에 앉혀놓으면 어떻게든 틈을 노려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면서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는 건 또 좋아해서, 어떤 날은 하루 온종일 만져줘야 할 때도 있다. 귀찮아서 안 하려고 하면 내 손을 툭툭 치면서 자기 머리를 들이밀기도 한다. 


 이 극단적인 치와와와 11년이 넘도록 같이 살고 있다. 우리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각자의 시간을 존중한다. '반려'라는 표현보다는 '동거'라는 표현이 적절한 우리의 시간들이 쌓여 이 강아지가 나를 용납해주는 범위가 굉장히 늘어났다.


 이 치와와는 머리 만지는 걸 아주 좋아하는 대신, 손과 발, 그리고 엉덩이 만지는걸 굉장히 싫어하는데, 언젠가부터 나는 만질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내가 그의 손을 잡거나 발을 만지거나 엉덩이를 두드리면 이 녀석은 온몸으로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는데, 그럼에도 꾹 참고 가만히 있어준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이 매우 싫지만, 너니까 참는다'는 눈빛과 '언제까지 할 텐가. 내 엉덩이 만지는 네가 기분 좋은 걸 보니, 너도 참 이상한 취향이구나'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걸 보고 다른 사람이 자기도 만져봐도 되냐며 그 토실토실한 엉덩이에 손을 대려고 하면 이 치와와는 참지 않고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린다. 

 그 누구에게도 참지 않는 치와와지만, 단 하나의 예외는 '나'다. 이제는 내가 앉아있으면 내 몸에 기대앉는다. 심지어 다리 위에 올라와 앉기도 하고 자기를 어서 만지라며 나를 툭툭 치며 엉덩이를 갖다 댄다. '자, 어서 만져. 너 내 엉덩이 만지는 거 좋아하잖아'라며.


너는 나의 강아지, 나는 너의 사람


 문제는 중간이 없다는 것. 내가 어딜 나가는 것도 아닌데 집 안에서 나를 따라다닌다. 화장실로, 부엌으로, 내 방으로, 거실로... 내가 가는 모든 곳에 다 따라온다. 코를 골며 자다가도 내가 움직이면 화들짝 따라오다 보니 내가 있는 모든 곳에 1미터 안에는 그 녀석이 있다.

 밤에 잘 때는 좀 더 심각하다. '같이 좀 자면 안 되냐'라고 하도 끙끙대길래 요즘은 침대에서 같이 자고 있는데, 이 개가 내 팔을 베고 잔다. 자다 말고 내가 뒤척거리다가 팔베개가 빠지면 자기도 몸을 들썩들썩거리다가 내 배나 다리를 베고 다시 누워 잔다. 나는 이게 너무 거슬려 자꾸 잠을 설치는데 이 개는 코를 골며 너무 곤히 자서 뒤척거리는 것도 눈치가 보인다. 이 때문에 잠을 너무 못 자서, 한 번은 치와와를 침대 밑에 내려주며 "오늘은 그냥 바닥에서 자는 게 좋겠어."라고 했더니, 이 개는 그걸 수긍하지 않고 밤새도록 끙끙거렸다. 나도 지지 않고 끝까지 침대 위로 올려주지 않았고, 우리는 결국 그렇게 밤을 새웠다.


 이 미친 극한 애정에 
나는 자꾸 엄마를 떠올린다.


 엄마는 아주 싫어했으나, 
'나'를 좋아했으므로 용납해주었던 시간들.

 더 나아가 나는 귀찮아했지만, 내가 엄마의 모든 것이 되었던 시간들.



 

 우리 집에는 치와와 한 마리가 산다.

 나와 엄마의 관계를 지켜본 치와와. 


 엄마가 없는 지금, 이 치와와가 나에게 다가온다. 


 엄마를 닮아 호불호가 분명한 이 치와와가 이를 악 물고 온 몸에 힘을 주며 나를 용납해주는 걸 볼 때면 엄마 생각이 난다. 

 이 치와와는 내가 집안일을 할 때 유난히 뿌듯해하는 얼굴로 나에게 다가오는데, 나는 자꾸 엄마가 생각난다. 그러고 보니 엄마가 있을 때는 내가 한 번도 이런 일을 하지 않았었던 것 같다. '아마 내가 지금 이렇게 방바닥에 걸레질을 하는 걸 보면 엄마가 저렇게 좋아했겠지.' 

 이 치와와가 나에게 애정을 갈구하며 끙끙댈 때마다 나는 또 엄마 생각이 난다. 나와의 시간을 갈망하며 내 주변을 맴도는 치와와. 내가 계속 귀찮아하다가 못 이기는 척 같이 놀아줄 때면, 이 치와와는 자신의 모든 것을 갈아 넣어 나를 사랑한다. 


 우리 집에는 치와와 한 마리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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