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게, 그리고 용감하게
운동을 본격적으로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처음 한 운동은 요가였다. 갑작스레 너무 격한 운동은 무리가 될 것 같아 한참을 고민하다가 예전에 조금 하다 만 요가를 다시 해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장 초급자 코스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물론 처음에는 그것도 힘들었다. 타고난 유연성은 있는 편이어서 몸을 꼬거나 접는 동작은 그럭저럭 따라 했지만, 문제는 근력이었다. 다들 쉬어가는 타임이라고 하는 다운독 자세마저 근력이 없는 나에게는 너무도 힘겨운 동작이었다.
그렇지만 매일 했다. 정말 힘들었지만 '이것만은 꼭 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하루 1시간씩 버티고 버텼다. 두어달 쯤 지나자 다운독 자세가 그렇게 힘들지만은 않게 되었다. '깊게 다섯 번 호흡하며 호흡을 정돈하세요'라고 하는 선생님의 말대로 나는 다운독 자세를 한 채로 호흡을 정돈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조금씩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더 깊은 동작을 해보고 싶었다. 흔히 '요가한다'라고 할 때 떠올리는 대단한 자세들도 한 번쯤 해보고 싶어 졌다. 그래서 목표로 잡은 것은 후굴자세(우르드바 다누라아사나)와 헤드스탠드(살람바 시르사아사나)이다. 목표를 너무 크게 잡은 게 아닌가 하는 고민도 잠시 했지만, 그래도 이왕 하는 거 열심히 해보기로 했다.
이 꿈의 동작을 위해, 1시간의 정규 요가 시간 이외에 따로 스트레칭도 더 하고 근력운동도 추가했다.
먼저 후굴 자세를 하기 위해서는 몸을 땅에서 밀어내야 하니 생각보다 팔 힘과 어깨 힘이 많이 필요했다. 그래서 팔굽혀펴기도 연습했다. 처음 도전한 팔굽혀펴기는 1개도 제대로 하지 못해 자꾸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러나 나의 연습은 계속되었고, 팔굽혀펴기 5개를 무리 없이 하게 되었을 때쯤 후굴 자세를 도전해보니 성공할 수 있었다. 목표로 삼고 노력한 지 3주 만의 일이었다.
이제 헤드스탠드(살람바 시르사아사나)를 목표로 몸을 움직여야 할 차례였다. 온 사방에 방석과 쿠션을 깔아놓고 시도하고 넘어지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이 동작은 단순히 팔힘만 필요한 게 아니라 어마어마한 코어의 힘이 있어야 하고, 복부와 다리에도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수없는 실패를 통해 깨달아갔다. 복근 운동, 코어운동을 추가로 시작했고, 스쿼트도 함께 병행했다. 플랭크, 크런치, 레그 레이즈와 같은 근력운동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했다. 그만큼 몸은 점점 좋아졌다. 1시간의 정규 요가 시간도 점점 가뿐히 소화해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로부터 약 2개월 후, 헤드스탠드를 완전히 성공했다. 정수리와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손으로 깍지를 껴 자세를 만들고 복부에 단단히 힘을 채워 넣고 발가락의 에너지까지 놓치지 않고 집중하고 집중하여 다리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발끝이 완전히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서게 되자, 만감이 교차했다. 지난 3개월 동안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이걸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버티던 모든 시간들.
이걸 정말 성공했다는 것에 한 번 놀랐고, 이 엄청난 동작을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냈음에 또 한 번 놀랐다. 배에 쥐 나고, 팔이 후들후들 떨리고, 목과 어깨가 아파서 잠 못 이루는 밤도 몇 번이나 있었지. 물론, 하루 이틀이면 그런 고생과 아픔은 지나갔지만, 대신 또 다른 고생과 아픔은 계속되었다. 나는 매일 노력했으므로. 그런 맥락에서 결과물이 빨리 나온 것은 가히 탄복할만한 감격이었다.
그러고 보니 인생이 늘 그랬다.
고생과 아픔은 물론 지나가기 마련이라지만 또 다른 고생과 아픔은 항상 있다. 하나를 넘기면 또 다른 하나가 다가오곤 했다. 일에 지치거나, 가족 사이에 갈등이 생기거나, 통장 잔고가 부족하거나, 병에 걸리거나, 갑자기 사고를 당하거나 하는 여러 가지 (본인이 어쩔 수 없는) 많은 문제들. 어떤 때는 두세 가지가 한꺼번에 밀려오기도 했다. 밀려오는 고생에 허덕이다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시간이 또 지나가기도 하고 다음 아픔이 다가왔다. 인생은 고해(苦海)라는 말처럼.
이렇게 고통만 가득한 인생이라면 대체 왜 살아가야 하나 싶지만, 그럼에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그 와중에 찾아올 '감격' 때문이다. 한 번씩 찾아오는 이 감격은 '이 고통의 바다 속에서 그래도 열심히 잘 살아왔구나'하는 위로인 동시에, '지금껏 살아온 방식이 틀리지 않았다'라고 인정받는 순간이기도 하다.
얼마 전 시골에 계신 친척분을 찾아뵌 적이 있었다. 80대의 노부부는 전에 한 말을 또 하고, 도무지 못 알아듣겠는 이야기를 또 하셨는데, 그 중언부언과 횡설수설 사이에서 이런 말이 들려왔다.
"그래도 내가 악하게 살지는 않았어. 내 눈에 피눈물 흘릴지언정, 남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하지는 않았지. 그래서 그나마 이만큼 살 수 있는 것 같아. 이만큼 누리고 살게 해 주셨지."
우리나라의 가장 격변기 속에 살아온 연세대 의대와 서울대 법대 출신의 노부부는 6.25 때 가족들을 잃어버리고, 그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안 해도 될 몸고생, 맘고생을 하고 자식을 둘이나 사고로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고, 그리고 어쩌면 친자식보다 더 사랑했던 나의 아빠까지 먼저 떠나보냈는데, 그래도 '악하게 살지는 않았다'라고 하셨다.
원망하지 않았고, 불만 갖지 않았고, 힘든 삶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만큼 누릴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하냐는 이 마음. 표현할 수 없는 이 먹먹함이 나와 할머니, 할아버지 사이 서로의 감동이다. 이 감동 때문인지 나는 유일하게 이 두 분을 만나면 참았던(아니, 참고 있는지도 몰랐던)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감격을 아는 사람'을 만난 감격.
그분들의 삶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짐작컨대 상상할 수도 없는 고생과 아픔이 끝도 없이 밀려오는 하루하루를 사셨을 것이다. 어려운 시대였고, 어려운 삶이었다. 하루하루의 괴로움만 생각해서는 아마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의 괴로움이 지나가 봤자, 내일의 괴로움이 또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그분들의 삶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나는 '악하게 살지는 않았다'는 자부심을 통해 그분들이 그동안 마주했을 감격들을 짐작할 수 있었고, '그래도 이만큼 누리고 산다'는 너그러움이 그분들의 힘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감격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본인의 것이다.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 감격을 마주하는 순간 본인은 안다. '그래, 잘 살아왔어.'
그러므로 삶이란 곧 감격이다. 감격이 없는 삶이란 존재할 수 없다.
문제는 이 감격이 어디서 어떻게 찾아올지 예측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언제쯤 찾아올지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냥 없는 셈 치고 오늘의 이 힘든 삶을 고생 고생하며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없는 건 또 아니므로 희망을 가져야만 한다.
그렇게 예측 불가능한 감격을 바라며 오늘을 힘겹게 살아가는 인생이 불쌍하다가도 막상 그 감격을 마주할 때면 '역시 살아야 해'라는 강한 확신이 든다. 이 힘든 오늘을 열심히 살아갈 힘이 여기서 나온다. 그러므로 오늘을 열심히 또 살아가야 한다. 바르게, 그리고 용감하게.
나는 이제 다음 감격을 꿈꾸며 또 고생과 아픔의 이 삶을 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