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감(交感)
외국어 배우듯 강아지 말을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과 강아지는 각자의 언어 시스템 자체가 다르므로 대화다운 대화가 불가능하다. 이는 매우 답답한 상황으로 이어진다. 대체 강아지가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왜 다른 강아지만 보면 싸우는지, 갑자기 왜 그렇게 짖는지, 더 나아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새로 바꾼 사료가 맛이 괜찮은지와 같은 것들에 대해서 한 마디만 해주면 좋겠는데 강아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아니, 무슨, 앞으로의 세계 경제상황이나 인공지능에 대해 토론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가끔 물어보는 말에 yes, no만 해줘도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강아지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절레절레하지도 않는다.
이건 강아지 입장에서도 답답한 일이다. 강아지도 얼마나 말하고 싶을까. 배가 아프다고, 지난번 사료가 더 맛있었다고, 오늘은 약 먹기 싫다고 얼마나 말하고 싶을까. 나한테 해야 할 말은 또 얼마나 많을까. 어젯밤에는 왜인지 목이 말라서 물을 계속 먹었더니 물그릇에 물이 없다고, 추운데 환기 그만 시키고 베란다 문 좀 닫으라고 얼마나 말하고 싶을까. 프라이팬에 계란 프라이라도 하면 온 집안에 냄새가 퍼지는데 "기왕이면 달걀 하나 더 해서 나도 좀 주면 안 돼?"라고 얼마나 말하고 싶을까. 시간에 쫓겨 급히 신발 신고 나가는 내 뒤통수에 대고 "언니! 자동차 키 안 챙겼잖아!"라고 얼마나 소리 지르고 싶을까.
바로 이런 차원에서 '훈련'이 필요한 거라고 예전에 어떤 책에서 본 적이 있다. 강아지들에게 "앉아!", "일어서!", "손!" 하는 훈련은 "이것 좀 보세요! 우리 강아지가 이렇게 똑똑해요!", 혹은 "우리는 이렇게 강아지를 잘 훈련시킨답니다"라는 자랑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앉아!"라는 말에 강아지가 앉는다는 것은 서로 교감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드디어 말이 통하게 된 것이다. 강아지는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는 주인의 말을 드디어 알아들었다는 사실에 매우 기뻐한다고 한다. "언니! 우리가 통했어! 내가 언니 말을 알아들었잖아! 보이지? 세상에, 내가 언니 말을 알아듣고 지금 앉았잖아!!"
이후 훈련은 매우 재밌어진다. "일어서!", "손!"과 같은 후속 훈련들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진다. 강아지들은 그렇게 주인과 교감해나간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주인과의 커뮤니케이션!
참 흥미로운 사실이었다. 강아지 훈련이 단순한 개인기나 서커스 차원이 아니라니. 훈련을 하면서 강아지가 행복해한다니.
우리 집 강아지들을 떠올려보니 정말 그랬다. 나는 한 번씩 "앉아!", "손!" 할 때면 미안해하곤 했었는데(아마 '훈련'이라는 말 때문이었던 것 같다. 훈련받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오히려 강아지들은 적극적으로 훈련에 임했다. 앉고 일어서는 걸 하루 종일 반복하면서도 꼬리를 흔들었고 또랑또랑 눈을 뜨고 나를 바라봤다. 어떤 때는 갑자기 다가와 내 손등을 손으로 툭툭 치면서 '어서 손 달라고 해봐! 내가 손 줄게!'하기도 했다. 그건 '언니! 언니랑 대화하고 싶어. 나랑 교감해줘.'라는 의미인 것이다.
우리가 나눌 수 있는 대화의 주제는 점점 늘어났다. 엘빈 토플러나 톨스토이와 같은 것들은 아니었지만 강아지는 내 말을 듣고 내 말대로 행동했다. "일로 와!" 하면 일로 오고, "절로 가!" 하면 절로 가고. 강아지는 기쁜 마음으로 나와 커뮤니케이션했고, 나 또한 기쁜 마음으로 강아지와 커뮤니케이션했다.
나는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다. 뉴욕에서 나에게 어떤 전공을 했냐고 물어보면 그때는 저널리즘(journalism)이라고 말하는 게 가장 알맞은 표현이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아~" 혹은 "오~" 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사실, 신문방송학은 저널리즘보다는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을 배운다고 하는 게 더 맞다. 정치 커뮤니케이션, 광고 커뮤니케이션, 방송 커뮤니케이션, 조직 커뮤니케이션 등...
이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결국 사람과 사람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것이다. 어떤 콘텐츠를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에 따라 구분할 뿐이어서, 사실 각 커뮤니케이션 과목들은 서로 겹치는 부분도 많고 반복되는 내용도 많다.
(불행히도 이제는 신문방송학과가 없는 학교가 많다. 신문과 방송을 중심으로 한 미디어의 시대는 지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대학에서 학과의 명칭을 바꾸었다.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으로 바꾼 학교도 있고, 언론정보학과랑 통합시킨 학교도 있다.
나는 우리 학교가 '신문방송학 전공'이라는 타이틀로 졸업시킨 마지막 졸업생인데, 마지막 4학년을 보낼 때 학과 명칭을 바꾸는 것에 대해 대대적인 토의와 토론이 이루어졌었다. 온갖 명칭들이 다 나왔다. 기존에 있던 언론정보학을 비롯해서 커뮤니케이션학, 미디어 커뮤니케이션학, 방송학 등... 어떻게 하면 '신문방송학'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과 '커뮤니케이션'의 내용을 잘 살릴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교수님들도 고민이 많았고 학생들도 의견이 분분했다. 결국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으로 결론이 났는데, 그때는 '근본 없는 이름'인 것 같다며 불평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나는 그게 최선이었다고 생각했다. 사실, '신문방송학'이라는 이름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우리가 '커뮤니케이션'을 배운다는 걸.)
4년 동안 커뮤니케이션을 배우고,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조금) 깨달으면서, 우리 모든 세상이 다 커뮤니케이션으로 이루어진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에게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건 조금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온갖 것들이 다 커뮤니케이션이다. 말과 글로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뿐 아니라 몸짓과 분위기로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이 있고, 개인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있는가 하면 여러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있고, 지식전달을 위한 커뮤니케이션도 있고 공감과 이해를 위한 커뮤니케이션도 있고...
커뮤니케이션은 '언어'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무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 말하고 알아듣는 그런 커뮤니케이션도 얼마든지 있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사소한 손짓 하나의 의미도 포착해낸다. 말로 표현되지 않는 말을 알아듣고, 화려한 언변 없이도 적절하게 의사표현을 한다.
결국은 마음인 것이다. 한국말이든 미국말이든 그게 문제가 아니고, 얼마나 마음이 통하는지가 문제다. 상대방의 마음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는지, 그의 마음의 결에 본인의 마음의 결을 얼마나 포개는지.
어떤 사람과의 대화는 참 답답하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말이 통하지 않는 느낌이다. 그런 사람과의 대화는 참 재미가 없다. 대화가 뚝뚝 끊긴다. 그런 사람에게 나는 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어차피 마음이 통하지 않으니, 내가 아무리 진심을 담아 이야기한들 그 사람의 마음에는 가 닿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있는 이야기, 없는 이야기까지 다 꺼내 하게 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에게는 어느새 내 속마음을 홀랑 다 꺼내 말하게 된다. 가끔 그런 사람을 만나면 커뮤니케이션의 희열을 느끼곤 한다. 통하는 느낌인 것이다. 내 마음이 그에게 읽히고, 그의 마음이 내게 읽히는 그런 순간. 대화는 재밌어지고, 시간은 훅 지나간다.
아마 그것이 교감일 것이다. 나는 그의 마음을 읽으며 기뻐하고, 그는 나의 마음을 읽으며 기뻐한다.
12년째 우리 집에는 치와와가 산다.
치와와와 나눌 수 있는 대화가 많아지고, 그런 우리의 시간이 점점 쌓이면서, 우리는 이제 각자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하게 되었다.
나는 치와와에게 말한다. "어쩜 이렇게 예뻐? 누가 이렇게 예쁘게 만들어놨어?"라고 하면 강아지는 한껏 예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본다. "오늘은 바다 보러 가자. 멀리 가야 하니까 차를 타야 해."라고 하면 강아지는 긴장한 얼굴로 산책 나갈 준비를 한다. "언니 나갔다 올게. 저녁에 해 지기 전에 들어올게."라고 하면 '알았어. 빨리 와'하며 나를 배웅한다.
치와와도 나에게 말한다. "언니! 오늘 치와와 타임 지금 하면 안 돼?"라며 다가오면 나는 귀찮음을 무릅쓰고 치와와 타임을 갖고, "언니, 나 저 사람 싫어." 하며 귀를 늘어뜨리면 나는 강아지를 끌어안고 눈을 가려준다. "잠깐만 참아줘. 지금 저 사람을 내쫓을 수가 없어. 미안해."
우리의 커뮤니케이션이 빛을 발하는 순간은 바로 목욕할 때다.
치와와는 목욕을 싫어하지만 내가 "목욕도 너무 잘하네~" 라고 하면 목욕을 좋아하는 척한다. 샴푸질을 하면서 "이쪽 발!" 하면 이쪽 발을 들고, "저쪽 발!" 하면 저쪽 발을 든다. 물기 닦을 수건을 가져오면 알아서 수건 위에 발을 문지르고, "잠깐 기다려, 드라이기 가져올게"라고 하면 그 수건을 깔고 앉아 꼼짝 앉고 기다린다. 강아지에게 드라이기는 가장 공포스러운 물건 중 하나이지만, 내가 "우리 치와와, 속전속결로 빨리 말리고 빨리 나가자~" 하면 치와와는 네 다리를 발발 떨면서도 끝끝내 가만히 있어준다. "잘했네~ 어떻게 이렇게 용감해? 아주 그냥 예뻐 죽겠네" 하면 강아지는 그 모든 싫음과 두려움 속에서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또 예쁜 표정을 짓는다. 드디어 목욕이 끝나고 "다 끝났네! 자 이제 털고 나가요~" 라고 하면 강아지는 남은 물기를 털고 ("한 번 더 털고!" 라고 하면 한 번 더 털고) 얼른 밖으로 나가 홀가분한 발걸음으로 춤을 춘다.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는 눈물을 핥아주는 개가 나온다.
(...) 개 한 마리가 그녀의 얼굴을 핥았다. 강아지였을 때부터 눈물을 핥아주는 데 익숙해져 있나 보다. 여자는 개의 머리를 쓰다듬고, 비에 젖은 등도 어루만져주었다. 그녀는 개를 끌어안고 남은 눈물을 마저 흘렸다.
(...) 길에 있는 뭔가에 정신이 팔린 것인지, 아니면 지금 있는 동네에 익숙해져 너무 멀리 가고 싶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오직 그녀의 눈물을 핥아주었던 개만이 눈물을 흘렸던 여자를 따라왔다.
(...) 눈물을 핥아주는 개는 이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움직였다. 마치 양떼를 보호하기 위해 태어난 개가, 양을 한 마리도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사명감으로 행동하는 것 같았다.
(...) 그리고 그녀를 따르는 것이 그의 의무였다. 언제 다시 눈물을 핥아 줄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 아닌가.
(...) 눈물을 핥아주는 개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개는 늘 자신이 언제 필요한지를 알고 있다. 의사의 아내는 개를 끌어안았다.
- 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
나의 치와와는 눈물을 핥아주진 않지만, 다가와 내 옆에 앉는다. 어떤 음악을 듣고 너무 좋아 울 때도, 스포츠 경기를 보다가 감격해서 울 때도, 그리고 개인적인 슬픔에 몸서리치며 울 때도 "왜 그래? 무슨 일이야?"하고 묻지 않는다. 나 또한 치와와에게 "감동받아서 그래" 혹은 "슬퍼서 그래"라고 구구절절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말도 하지 않지만, 나란히 앉아 그저 서로 교감한다.
사람보다 낫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나라에서 같은 교육을 받고, 같은 사회의 일원이어도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답답해 미치고 속 터져 죽겠는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엄마는 늘 말했다. 마당 넓은 시골집에서 개나 키우며 살고 싶다고. 나에게도 늘 말했다. 토칠이만큼만 하라고. 나는 몰라줬던 엄마의 마음을 토칠이는 알아줬을 것이다. 나는 위로할 수 없었던 엄마의 외로움을 토칠이는 끌어안아줬을 것이다.
나의 치와와가 그러하듯.
나의 말을 알아들어줘서 고마워. 나 또한 너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서 좋단다.
그래도 아플 때는 제발 좀 말해줬으면. 어디가 아픈지. 어떻게 아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