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일기28-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1

by 제대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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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떻게 쓸 것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부록)

글재주는 식별력이다.(p431)

독서에 왕도가 없듯이 글쓰기에도 왕도는 없다. 그러나 독서법의 경우와 마찬가지 옛날부터 일러오는 유서 깊은 충고는 있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고쳐보라는 것이다. 사실 이보다 더 적절한 조언은 있을 수 없다. 옛말 그른 데가 없는 것이다. 간결한 이러한 지침을 실제로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문제의 핵심으로 떠오르는 것일 뿐이다.

-위에 부분에서 많이 읽고는 가능할 거 같다. 하지만 많이 쓰고 고쳐보라는 것은 아직 자신이 없다. 읽기와 쓰기는 연결되어 있는 거 같다. 읽으면서 쓰고 또한 쓰면서 읽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을 쓰게 되는 계기가 궁금해진다. 순수한 열정으로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못 이겨 글을 쓰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글 읽기는 ‘끼니’처럼 글쓰기는 ‘직업’처럼 하면 어떨까? 매일글쓰기카페에서 매일 글쓰기라는 것이 그 ‘매일’이라는 것이 강제처럼 부담처럼 다가올 때가 있다. 어떤 글을 써야할지 모르고 너무 바쁘고 지칠 때 더욱 그러하다. 나는 이제 올린 글이 막 30회를 넘겼다. 200회를 넘겨 300회를 가깝게 글을 쓴다는 것에 고개가 숙여진다. ‘많이 쓰기’위해서 여기에 속해 있다 보면 ‘잘 쓰다가, 못쓰다가, 안 쓰다가’처럼 쓰기는 될 거 같다.

글쓰기는 글읽기와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다. 글이 글을 낳는다. 좋은 글이 좋은 글을 낳고 서투른 글은 서투른 글을 낳게 마련이다. 따라서 좋은 글을 많이 읽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 좋은 글을 읽고 그것을 본뜨면 자연히 좋은 글을 쓰게 마련이다. 따라서 좋은 글의 좋은 점을 알아보는 것이 중요한데 이것은 어느 정도 경험의 축적을 요구하는 일이다.

-결국은 독서

느끼고 생각한 대로 쓰라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느끼고 생각한 대로 쓰자면 그 이전에 느끼고 생각한 대로 씌어진 많은 글, 그것도 좋은 글을 읽어야 한다.

-또 결국은 독서

정말 글재주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좋은 글과 빈약한 글을 가릴 줄 아는 식별력일 것이다. 좋은 글을 알아보는 능력이 그대로 글재주이다.

-정말로 독서가 해답

그가 좋아하는 시인이나 작품은 대체로 그 사람의 문학적 성향뿐 아니라 글쓰기 수준에 대한 유력한 지표가 되어 준다. 특히 시 지망자의 경우 그가 좋아하는 작품이나 시행을 들어보면 그의 수준은 곧 드러나게 마련이다. 즉 한 사람의 글은 그의 글 읽기의 총화의 한 조그마한 노출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세계의 중심이다. 인식 주체 없이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성숙해 간다는 것은 세계의 중심이라도 생각했던 유아적 자아가 한심스럽게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자각해 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자기만의 독자적이고 일회적인 것이라 생각하는 느낌이나 생각이나 경험치고 이미 기술되고 표현되지 않은 것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도 틀림은 없다. 동일한 경험에 접근하는 시각이나 강조점의 극히 미세한 차이로 말미암아 조금씩 다르게 변용되고 변주되어 나올 뿐이다. 따라서 선행 작품에 대한 참조나 고려를 무시하고 습작에 착수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무모한 일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분수를 모르는 짓이다. 또 좋은 글을 읽지도 않은 채 쓰려고만 덤빈다는 것은 옛 조상의 말투를 빌리면 밑천도 들이지 않고 거저 일확천금해 보자는 도둑의 심보에 지나지 않는다. 좋은 글을 많이 읽는 것이 글쓰기의 첫 걸음이다.

-고백하건데 그 도둑이 나 자신이다.

만족 없는 탐구(p434)

우선 많이 읽는다는 것은 글쓰기를 늦추자는 뜻이 아니다. 양서와 고전을 섭렵하는 것은 그 자체가 많은 시간을 요하는 평생교육이다.

좋은 글과 문학작품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소재에 걸맞는 문체와 방법이 있게 마련이고 글쓰기가 소속하는 장르마다 질적 식별의 척도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식별력도 독서 경험의 축적에 의해서 세련되고 연마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치 있는 것이 땀 흘리지 않고 성사되는 법은 없다. 글쓰기도 예외는 아니다. 많이 써보고 또 많이 고쳐보아야 한다. 글쓰기의 지표로서 흔히 거론되는 것이 일사일어(一事一語)라는 가르침이 있다. 이 세상에는 똑같은 나무나 돌이나 물건이 없다. 그러니까 이 나무와 이 물건에 꼭 어울리는 단 하나의 말을 찾아 골라 쓰라는 취지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이렇게 고행에 가까운 각고의 노력을 통해서 불후의 걸작은 태어난 것이다. 정확하고 적당한 말을 찾아 고치고 또 고치는 비평적 노동의 과정을 통해서 그의 문체는 태어난 것이다.

사람마다 문체가 다르듯이 글 쓰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저마다의 방식으로 고심하여 쓰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

본래 글을 쓰는 사람은 글 속에서 숨을 때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글에서 갈등이 없고 고난이 없이 느껴지면 예쁜 포장지에 쌓여있는 속 빈 상자가 나인 거 같아 부끄럽다. 인생의 ‘희노애락(喜怒哀樂)’에서 교훈은 ‘怒’에 감동은 ‘哀’에 있지 않을까?

좋은 책을 반복적으로 읽으면 나의 치부와 슬픔을 파헤치는 글쓰기에 해답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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