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이자 마지막일 대나무숲 (3)

이제 정말 괜찮아졌다는 뜻으로

by 채 은


위 글과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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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학을 하고서는 본가로 돌아갔다. 아웃백 스테이크하우스와 동탄의 영어 학원 초등부 강사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몇 달을 괴롭히던 복합적인 문제였는데, 건강 상태는 빠르게 돌아왔다. 아버지는 쓸모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 같다고 했던 영어 학원 아르바이트는 주 5일 5시간을 잡아먹긴 했다. 하지만 매주 3시간을 함께 보내는 초등부 아이들과 원장님의 칭찬감옥 속에서 매일 웃고 즐거웠으니 나에게는 큰 효과가 있었다.


그 와중에도 어학 연수나 한 달 살기 여행을 몇 번쯤 알아봤다. 아무것도 못 하겠는 느낌이 들던 때와 다르게 자꾸 새로운 일을 벌이고 싶었다. 나를 새로운 땅에 놓고서 결국에 돌아올지라도 새로운 삶을 잠시 사는 척이라도 하게 해주고 싶었다.


오래 연락을 못했던 고등학교 친구와 만나 얘기를 하던 중 아주 값싸게 나온 6개월 뒤 LA행 티켓을 보고서 그 자리에서 예매했다. 그리고 5~6개월간 돈을 모아 향후 3년을 통틀어 마지막 여행일 것이라고는 당시에는 예상치 못했던 한 달 살기 여행을 다녀왔다. 이후 복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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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이야기로 돌아와서, 1학년 1학기엔 두 과목 빼고는 모조리 F를 맞아 6학점을 수강하고 평점평균이 3.5이다. 1학년 2학기엔 12학점에 2.63, 2학년 1학기엔 9학점에 2.83을 받았다. 졸업까지 남은 학기 내내 18~21학점까지 전공 7-8개를 들어가며 4점대를 받다가 겨우 3.77로 졸업했다.


그래서 내가 받은 3.77은 사실은 남들이 받은 3.77보다 더 큰 서사를 지녔다. 휴학을 결심한 이유도, 휴학을 통해 어떤 것을 얻었는지도, 휴학하고 나서 어떻게 달라졌는지도 그렇다. 그러나 사회의 어떤 조직은 3.77을 성에 차지 않아 할 수도 있고, 어쩌면 이유를 물어주지조차 않을 수 있으며, 이 모든 서사를 '불성실', '나약함', '자기 관리 역량 부족' 등 판단의 근거로 일축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사회의 약속된 언어로, "대학 밖에서 좀 새로운 사회 경험을 쌓고 싶었고,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서 한 달 동안 미서부에서 지내면서 홈스테이 했던 가족을 보고 왔습니다."라고 말하고 눈초리를 피하자. 그러나 이 대나무숲에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으니, 나는 비로소 이 거짓말의 가책에서 자유로워진 기분을 잠시라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되도록 다시는 이 대나무숲을 둘러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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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로, 하다못해 학생회도 대학도 면접 안 보고 들어간 내가 봤던 첫 면접이 기업 인턴 면접이었다. 그래서 휴학 질문에 대한 답변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어떻게 살다 겨우 이 자리에 왔다고 설명하기엔 날 속단하실까 두려워서, 입 밖으로 두루뭉술하게 '건강상의 이유로...'하고 말해본 적이 있다.


더 묻지 않으시고 '이제는 다 괜찮아진 거냐'라고 물어봐주셨는데, '네'라고 말하면서 눈물이 날 뻔 해 당황했다. 그 물음과 음성이 너무 따숩기도 했지만, 그 질문을 받고서야 알았다. 정말 나는 이제 괜찮아졌다는 것을. 꾸며내지 않고 사실대로 말해도 답변이 같을 수 있다는 게 다행이고 행복해서.


누적된 삶의 시간을 보면, 나에겐 패턴이 있다. 나는 늘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지고서 그걸 만회하는 나머지 시간을 오래 갖는다. 그런데 그게 사실 성장과정이다. 실패는 성장 서사의 좋은 발단이고, 나는 자의든 타의든 실패를 기꺼이 겪고 마음껏 괴로워하는 시간을 보내다 나름의 결단력과 저력으로 어느새 헤어 나온 후 다음 정류장을 향해 걸어간다.


저만의 서사가 있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인력이 있는지 서로를 알아본다. 고집 없이 금쪽같이 태평하게 자란 나는 조금 더 여성스럽고 호호 여기저기서 더 많은 사랑을 받을까 꿈꿔보기도 하지만, 결국 찍어먹어 보고 뒹군 후에 장렬히 안녕을 외치는 내 주변엔 멋지고 단단한 사람이 너무도 많다. 자신만의 길을 가는 사람, 딛고 일어섰으나 또 다른 파도를 기다리는 사람, 이겨내는 과정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이센스의 '독'이라는 노래 가사 중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소개하며 마친다.


흉터를 가진 모두에게 존경을,

이겨낸 이에게 축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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