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처럼 상대의 온도를 따라 하기
며칠 전 동생과 단둘이 훠궈를 먹으며 나눈 대화이다. 동생은 며칠 전 고등학교 친구와 함께 2박 3일 부산 여행을 다녀왔다. 그전에 다녀온 다른 친구들과의 제주 여행에서 몇 가지의 잡음이 있었던 걸 알기에, 넌지시 이번 여행은 별 일이 없었느냐고 물었다. 1시간 동안 기다려서 들어간 라멘집, 좋아하는 연예인이 추천했다는 국밥 노포, 친구가 제안해서 찍은 릴스 이야기를 늘어놓기에 대충 흘려들으며 재밌었겠다고 호응했다.
그런데 잠시 동생이 고민하다 말을 이어갔다. 여행 마지막 날 아침, 그 친구가 자신에게 편지를 썼다고 했다. 일 년에 종이 편지 30통 정도는 친구들과 여전히 주고받는 나로서는 동생이 좋은 친구를 두었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기록에 담아 상대에게 선물할 줄 안다니, 조금 놀라며 '오, 좋은데? 너랑 여행해서 너무 좋았대?' 하고 물으니 그게 아니란다. 듣자 하니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고등학생 때부터 둘이서 꼭 여행 가자고 했었는데 드디어 와서 너무 행복하고 꿈만 같아. 학창 시절엔 내가 너무 어리기도 했고, 널 너무 좋아해서 내가 너한테 하는 만큼 너도 똑같이 나에게 해주길 바랐었나 봐. 그런데 이제는 네가 나한테 해주는 것과 상관없이 내 마음을 너한테 다 표현하고 주려고 해. 여행 와서 너무 재밌었어'
둘은 학창 시절에 어떤 일로 잠시 멀어졌다가, 성인이 되고 다시 연락이 닿아 가까워진 사이임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누가 여행 말미에 쓰는 편지에 저런 내용을 담지? 그 친구는 동생에게 기대한 것이 있으나, 오래전부터 충족되지 않았으며 이젠 그 부분을 그저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던 것처럼 들렸다. 아마 동생도 편지에서 이런 내용을 보고 당황스러웠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어 적잖이 놀란 마음을 숨기며 말했다.
"들어보니 그 친구가 너에게 바랐던 게 있었는데 네가 몰라준 모양이네."
"학생 때부터 그랬어. 걔는 막 애정 표현도 많이 하고, 애교도 많고, 좋으면 '와~ 진짜 좋아!', 행복하면 '오늘 진짜 최근 들어 제일 행복하다', 이런 얘기 스스럼없이 했어. 자기가 하고 싶은 건 꼭 해야 하는 성격인데, 저렇게 행복해하니까 내가 별로 원하지 않는 것이어도 맞춰주고 그랬었거든."
"그럴 수 있지. 누구나 서로 다 맞춰주니까. 근데 그 친구는 너도 그렇게 해주길 바라?"
"어. 꼭 그러고 나서 나한테 물어봐. '너는?' 이렇게."
"그럼 넌 뭐라고 하는데?"
"난 그런 말을 진짜 못 하겠어. 그냥 저런 말을 들을 때마다 머리가 하얘지고, 뭐라고 말해줘야 할지 모르겠어. 그래서 그냥 '그러게', '그니까', '나도~' 정도로 대답해."
동생은 일평생 하지 않던 표현을 요구하니 곤란했을 것이고, 그 친구는 동생이 자신과 보내는 순간을 자신만큼 행복하게 느끼지 않거나 표현을 아낀다고 생각해 서운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객관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동생과 친구 모두가 조금씩만 노력하면 될 일처럼 느껴졌다. 동생은 친구가 자신에게도 비슷한 온도의 말을 원한다는 것을 알아차려 주고, 더 따스한 말을 더 자주 입 밖으로 내뱉으면 된다. 반면, 그 친구 또한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늘 똑같은 크기의 생각과 감정과 마음을 갖는 — 어쩌면 충족되기 어려운 — 기대를 조금 내려놓으면 된다.
어떤 얘기를 먼저 해줘야 할지 잠시 고민을 했다. 생각해 보니 나도 동생 같은 사람이었고, 내게도 동생의 친구 같은 사람이 있었다. 웃기게도, 다른 사람 앞에서의 나는 한때 서운함을 느끼던 그 친구의 입장이었던 적도 있었다. '우린 어떻게 하더라?' 생각을 하다 동생이 기울일 수 있는 노력을 나름대로 제안한다.
"나도 그런 친구가 있어. 나도 그런 말 잘 못해. 우리가 평소에 그런 말을 많이 하고 살지도 않는데 어떡해? 근데 나는 나한테 익숙한 방법이 아니라고 해도, 그 친구가 전해주는 말과 비슷한 온도로 말해. '나랑 소중한 휴일을 보내줘서 고마워. 요즘 정말 답답했는데 너랑 좋은 날씨에 쏘다니니까 하나도 기억 안 나고 벌써 너랑 헤어지기 싫어'하고 말해. 이거 어려운 거 아니잖아."
그랬더니 동생은 한껏 얼굴을 구기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한다.
"언니가 그렇게 말한다고? 진짜 그런 말 어떻게 하냐. 아니 그리고 당연히 어려운 거 아닌데, 왜 그렇게 해서까지 친구의 좋은 기분과 행복에 동조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고 오글거려."
"그 친구가 네 마음을 오해하기 쉽거나 서운해하는 지점을 네가 적은 노력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데, 굳이 해줘야 할 이유를 아직 찾게 되는 거라면 하지 않아도 돼. 그렇지만 너에게 없는 것과 익숙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마냥 '왜 저러지 참 특이하다'하고 넘어가기보다는 계속 배울 점이라고 생각하려고 해 봐. 뭐든 극단적인 건 안 좋아. 필요할 때 할 수 있으려면 어색함이 줄어가는 기간을 미리미리 가져야 해."
동생은 조용히 듣다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은 노력해 보겠다'라고 답했다. 대화는 끝났지만 여러 생각이 들었다. 너무 꼰대처럼 들렸을까?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반응을 너에게 요구하는 게 그 친구의 욕심인 것 같다고 공감해 줄걸 하는 후회가 잠시 스쳤지만, 누군가에게 조언 아닌 조언을 할 때는 나의 일이었다면 내가 스스로에게 했을 법한 말을 전하는 편이 항상 후회가 덜했던 게 기억나 도로 안심했다.
지금까지도 만날 때마다 편지를 주고받는, 가장 가까운 친구가 그런 편이다. 너랑 만나는 날이라서 날씨가 따라준다느니, 자기 삶에서 너 같은 사람을 옆에 둘 수 있어서 너무나 행운이라느니, 너와 함께면 무서울 게 없을 것 같다는 말들, 절절한 사랑 같은 우정을 눈 하나 깜짝 않고 말한다.
나는 이런 표현과 찬사를 들을 때마다 어딘가 숨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고 당황스러웠다. 나에 대한 좋은 인식과 마음을 여과 없는 표현으로 글과 말을 지어 전달해 주는 사람이 낯설었다. 왜냐하면 감사함이든 미안함이든 꼭 알아줬으면 하는 감정이 있어도 나는 그걸 전달하는 일에 원체 재주가 없었다. 어련히 마음이 상대로부터 알아차려지길 기대하며, 그저 평소처럼 주변을 맴돌면서 신경을 쓰고 있다고 위안을 삼았다.
그렇게 제 발 저려서, 아님 혹시 나만 유난일까 봐 혼자 구겨뒀다 펼쳐 보인 마음은 누군가에게는 가 닿지 않았고, 누군가에게는 지어낸 것처럼 인위적으로 들렸으며, 언젠가는 그저 나 스스로를 위한 것이었던 적도 있다. 내가 정 내키고 마음에서 우러나면 그런 말도 하게 되겠거니 생각했던 때가 무색하게, 정작 나는 누군가에게 선물 같은 말을 받으며 살아도 학습도 못하고 돌려줄 줄도 모르는 사람으로 커가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저서의 첫 번째 장에서는 하늘의 벌로 인해 벌거숭이 인간이 되어 지낸 천사가 마침내 하늘의 뜻을 깨닫는 장면이 나타난다.
"모든 사람이 생을 유지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숙고해서가 아니라 사람들 안에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서로 떨어져 살기를 바라지 않으셨기에 각 사람에게 스스로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드러내지 않았고, 사람들이 함께 사는 것을 원하셨기에 모든 사람에게 스스로와 모두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드러냈다."
결국 부대껴 살면서 사랑, 애틋함, 따뜻함이 적용되는 범위를 나 자신에만 한정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확장시키면서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것이 인간 세상사의 본질임을 작중 '하느님'의 말을 빌려 전달한다.
편지 속 문장으로, 공간에 울리는 소리로, 마음을 건드리는 다정함을 전하는 법을 여태 나를 스친 사람들에게 많이도 배웠다. 배워도 배워도 계속 배울 점이 보였다. 표현이 많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 옆에 있는 것은 크나큰 행운이다. 화면만 켜도 원망을 마주하기 아주 쉬운 세상이라서 더 귀하기도 하지만, 내가 뻣뻣하고 표현에 인색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마음을 건드리는 다정한 문장들을 늘어놓는 사람들은 이따금 계산 없이 자신의 마음을 상대의 겁도 없이 손에 쥐켜준다. 찰나의 기쁨과 행복과 재미를 쉽게 감지하고, 그냥 지나치기보다 주변과 공유하려는 사람과 함께하다 보면 나도 닮아있다.
한편, 일상적인 일에 작은 의미들을 내 멋대로 입히고 좋은 쪽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배운다. 그리고 그런 의미는 어떤 일화에만 입혀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일화들의 집합이나 마찬가지인 삶에도 덧입혀진다. 결국 그 삶을 사는 나에게도 의미들이 더해지고, 이것이 곧 작은 것에도 정성을 들이는 태도와 당연하고 뻔한 것들 사이 무감해지기 쉬운 마음을 경계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된다.
빈말을 노력해 보라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사실은 따뜻하고 여린 심장을 가졌지만 '조금은 정 없고, 털털하고, 딱딱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면, 당신의 따뜻함이 앞서야 할 때는 어색함 없이 나설 수 있도록 조금씩 연습을 해보는 것도 좋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주변에 나보다 조금 더 높은 온도를 가진 사람들을 많이 두라고 권하고 싶다. 그렇게 곁에 머물면서 얻게 된 것, 내가 닮고 싶다고 생각한 것들을 조금씩 돌려주다 보면 알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보다도, 고맙고 미안한 것에 대한 마음가짐과 그런 내 마음을 잘 표현하는 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