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만 있다고 생각한 음식은 고추물금 말고 또 있다. 바로 갱시기죽이다. 엄마는 비가 와서 몸이 으슬으슬 춥거나 겨울 문턱이 다가오면 양은냄비에 갱시기죽을 한 솥 끓여주곤 했다. 가끔은 아빠가 술을 먹고 온 다음날이나 가족 중 누구 하나가 감기기운이 있는 날에도 먹었다.
이 때 갱시기죽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이것도 아마 경상도 사투리일텐데 김치콩나물죽이라고 하면 먹어보지 않은 이들도 대충 그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이름 그대로 김치와 콩나물, 밥을 넣고 끓인 음식이다.
하지만 김치콩나물죽이라는 ‘고급진’ 표현으로는 갱시기죽의 맛이 나지 않는 기분이다. 갱시기죽은 깔끔하게 정제된 서울의 맛이 아니라 차가운 겨울 바람이 불고 있는 시골 마당 한가운데서 뿌연 연기를 한아름 내뿜으며 부글부글 끓여먹을 것 같은 맛이다. 정작 시골에서는 거의 먹지 않았지만, 나한테 갱시기죽은 그런 이미지다.
가끔은 ‘꿀꿀이죽’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렀다. 이름에서 풍기듯 비주얼이 썩 좋진 않지만 맛은 일품이다. 반들반들한 유기그릇보단 평소 먹던 국그릇이나 양은냄비째 먹는 것이 더 맛있다.
갱시기죽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적당량의 물을 냄비에 붓고 익은 김치, 콩나물 조금, 식은밥 한덩이를 넣은 다음 밥이 푹 익을 때까지 끓이면 된다. 이제 막 만든 뜨끈한 흰밥은 맛이 없기 때문에 식은밥이 없다면 차라리 라면이나 소면을 넣는 것이 괜찮다. 멸치육수를 넣으면 더 맛있겠지만 주말에 먹는 간단식에는 그런 호사스러운 행위를 과감히 생략해도 된다.
김치나 콩나물뿐 아니라 냉장고에 굴러다니는 양파 한 조각, 떡국떡 반 줌, 물만두 몇 개를 같이 넣어 끓여도 된다. 남은 깍두기가 있다면 다져서 국물과 같이 넣으면 더 좋다. MSG 없이도 맛이 한 단계 올라간다.
특별한 간도 필요 없다. 김치에 이미 적당히 짠기가 있기 때문에 마지막에 맛을 보고 소금이나 간장을 조금 넣으면 바로 완성된다. 조금 칼칼하게 먹고 싶으면 청양고추가 고춧가루를 조금 넣으면 된다.
반찬도 없이 갱시기죽을 한 그릇 먹고 나면 몸속이 뜨끈해지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확실히 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먹기보다는 몸 안에 온기를 담을 수 있는 겨울에 더 어울리는 음식이 분명하다. 그럴싸한 보양재료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감기 기운이 있는 날 갱시기죽을 한 그릇 해치우고 한숨 푹 자고 나면 몸이 한결 가벼워지는 걸 느낄 수 있다.
요즘 들어서는 술 먹은 다음날 생각날 때가 있다.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시원한 콩나물이 들어가 있으니 해장음식으로 꽤 괜찮은 메뉴다. 시켜보진 않았지만 해장죽이란 이름으로 죽 프랜차이즈에서 몇 번 본 기억이 있다. 생각난 김에 이번 주말, 갱시기죽을 끓여 먹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금요일에 거한 술자리가 필요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