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나를 만든 건, 어쩌면 8할이 김일지도 모른다. 맛있는 김 몇 장에 뜨끈한 밥 한공기만 있으면 하루 세끼도 가능하다. 플라스틱에 담긴 도시락김이 아니라 방앗간에서 갓 짜낸 들기름과 짭쪼름한 맛소금이 묻어 적당히 열기에 구운 곱창김이면 더 좋고.
마트에 가면 비싸지 않은 가격에 도시락김을 간단히 사먹을 수 있지만 시장에서 파는 빳빳한 재래김이 더 맛있는 건 어쩔 수 없다. 아무래도 어렸을 때부터 시간과 정성으로 구운 김의 맛이 훨씬 좋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엄마는 반찬이 고민되면 때때로 김을 구워주었다. 숟가락 뒷면으로 가볍게 들기름을 발라준 뒤 소금을 한꼬집 친다. 그 다음엔 네모난 석쇠에 김을 앞뒤로 구우면 푸릇한 빛이 감도는 김이 완성된다. 엄마가 김을 굽는 동안 부엌에는 행복한 집의 냄새가 가득하다.
김을 굽는 과정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기름을 바르고 소금을 치고 한 장씩 굽는 과정이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한바탕 '김 전쟁'을 치르고 나면 반경 50cm로는 새까만 가루가 소복히 쌓여있다.
집안 곳곳에 ‘김 도둑’이 숨어있다보니 엄마가 넉넉히 구워도 2~3일이면 사라진다. 끼니 때가 되면 밥 한술에 김이 한 장씩 올라가니 남아날 턱이 없다. 두런두런 식탁에 앉아 심심한 입을 달래기도 하고, 아빠가 저녁 때마다 맥주 안주로 먹으면 한 뼘 높이는 됐던 김이 금세 바닥을 드러낸다.
얼마 전에 곱창김 1톳이 선물로 들어와서 ‘멘붕’이 왔다. 꼬불김 100장은 집밥을 거의 먹지 않는 2인가족이 해결하기엔 너무 많은 양이다.
딱 봐도 맛있는 김이었는데 남 주자니 아까운 마음에 이상한 도전정신이 생겼다. 이걸 내가 해치워버리자. 그리고 포장지를 뜯자마자 느낌이 왔지. 이거, 잘못된 선택 같은데?
발가벗겨진 김을 한참 바라보다 미리 김을 잘라 봉지에 넣고 필요할 때마다 에어프라이어에 돌려 먹는 쪽을 택했다. 꼬불꼬불 도톰한 김은 잘라놓고 나니 물에 불려놓은 미역마냥 한껏 불어난 것 같은데. 아무래도 기분 탓으로 돌리고 싶다.
8등분한 김은 에어프라이어에 3분만 돌리면 완성되는데 들기름과 소금 없이 돌리다보니 맛은 덜했다. 무엇보다 입 안에 너무 달라붙었다. 그래도 좋은 김이어서인지 엄마가 해준 맛은 어설프게 났다.
봉지에 담아 냉동실에 넣어뒀는데 가뜩이나 꽉 찬 냉동실이 감당이 안 돼 일주일째 식탁에 김이 빠지지 않고 올라온다. 엄마네도 부지런히 배달해주고 있다. 오랜만에 구운 김을 먹은 동생도 맛있는지 앉은 자리에서 한통을 뚝딱 비우고 씩, 웃는 입가로 김가루가 덕지덕지 묻어있다.
산 같이 쌓인 이 김을 다 먹고 나면 다음에는 미리 들기름을 바르고 소금을 친 다음에 잘라놔야겠다. 아무래도 마른 김을 맨입에 먹자니 입안에 쩍쩍 달라붙는 게 아쉽다. 그리고는 곧바로 후회하겠지. 이거, ‘또’ 잘못된 선택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