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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블 Apr 27. 2021

인내의 시간, 설레는 시간

김밥


내가 초등학교 때만 하더라도 시골 할아버지네 가려면 버스로 10시간은 족히 걸렸다. 설이나 추석 때 차가 미친 듯이 막히거나 평소에라도 버스 시간이 맞지 않으면 15시간이 걸리는 것도 예삿일이다. 집에서 버스터미널로, 대구에서 다시 시골로, 거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할아버지네까지 들어가는 길은 정말 고행길이나 다름없었다. 꼭두새벽에 출발해도 도착하면 늘 잠잘 시간이거나 당장 누워야 할 만큼 피곤했다. 엄마는 갓난아이를 들쳐업고 초등학생 두 딸을 양 손에 꼭 잡고 시댁으로 향했다.


시골에 간다고 하면 다섯 식구 짐 싸기도 바쁜 엄마가 꼭 하는 것이 있다. 김밥을 싸는 일이다. 해도 뜨지 않은 새벽 일찍 일어나 햄과 당근을 볶고, 시금치를 데치고, 단무지를 썰었다. 생활비 몇 푼을 아낀다는 생각보다는 버스가 너무 막혀 식구들이 휴게실도 못 들리고 끼니때를 놓칠까봐 아침 겸 점심 겸 저녁을 준비한 것 같다. 최근에야 김밥의 원가를 알게 됐는데 사실 재료비와 고생을 생각하면 김밥은 싸는 것보다 사먹는 게 낫다.


엄마가 김밥을 준비하는 날은 고소한 냄새가 나를 깨운다.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한 채 썰지도 않은 통김밥을 한줄 먹고, 집을 나서기 전에 또 꽁다리를 몇 개 주워 먹는다. 엄마는 포일에 김밥을 돌돌 말아 나설 채비를 한다. 버스에 자리를 잡고 나면 군것질거리를 뜯기 시작하는데 언제나 마무리는 김밥이다. 김밥을 한두줄 먹고 잠을 자면 휴게실에서 눈이 떠진다. 그렇게 10시간 넘게 시골 가는 길을 버텼다.


김밥을 먹는 날은 또 있다. 소풍날만 되면 엄마는 분홍색 예쁜 도시락통에 김밥을 싸줬다. 학교 뒤에 야트막한 산에서 친구들과 둘러앉아 먹는 김밥은 정말 맛있었다. 빈 도시락통을 보여주면 뿌듯해하는 엄마의 표정도 내 기분을 간지럽게 했다.


엄마는 김밥을 쌀 때 특히 색감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흰 밥 위에 분홍색 햄과 노란색 단무지, 주황색 당근, 초록색 시금치, 갈색 우엉을 쌓았다. 시금치가 있으면 오이가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색이 겹치는 맛살도 웬만해서는 들어가지 않는 재료였다.


완벽한 색감의 그 재료들을 검은색 김으로 말고, 날 선 칼로 썰면 색색이 예쁜 김밥이 완성됐다. 새롭지 않은 재료가 들어갔는데도 한 데 어우러진 김밥은 신기하게 꿀맛이었다.


재료를 일일이 손질해서 하나씩 간을 하고 말면 두어시간은 족히 걸리는 음식이니 그 정성을 생각하면 맛이 없을 수 없다. 엄마는 티 안 나게 손이 많이 가는 그 음식을 그저 가족을 위해 열심히 만들었다.


양을 대충 맞춘다고 맞췄을 텐데 마지막 몇 줄을 남기곤 재료가 하나 둘 떨어지고 없다. 엄마가 열심히 김밥을 마는 동안 딸들은 더 열심히 햄이며 단무지를 주워먹은 탓이다. 당근이나 시금치는 역시 넉넉히 남아있다.


엄마는 그제야 김치김밥, 참치김밥을 만든다. 남은 재료를 몽땅 넣고 씻은 김치와 참치도 넉넉히 넣는다. 이미 김밥을 먹을 대로 먹어서 더 들어갈 데도 없을 것 같은데 액기스나 다름없는 그 김밥을 놓칠 순 없다. 엄마한테 얼른 잘라달라고 말하고는 끄트머리부터 차근차근 없애간다. 엄마가 마지막 꽁다리를 자를 때가 되면 김밥 한 줄이 모두 내 뱃속에 들어가 있도록. 엄마는 재미있다는 듯이, 딸이 먹는 속도에 맞춰 김밥을 한 개씩 썰어준다.


엄마는 김밥을 한 번 쌀 때 보통 20줄은 쌌다. 다섯 식구라고 해도 두어줄을 먹으면 이미 꽤 먹은 거라서 남은 김밥은 베란다 세탁기 위에 쌓아놨다. 아침, 점심을 김밥으로 먹어 질릴 만도 한데 학교에 다녀온 두 딸은 가방만 잽싸게 내려놓고 베란다로 뛰어갔다. 거실로 들어오는 손에는 통김밥이 한줄씩 들려있다. 늘 너무 많다고, 적당히 싸라고 해도 엄마는 먹다보면 얼마 되지도 않는다며 꿋꿋이 20줄을 만들었다. 그리고 산처럼 쌓여있던 김밥은 그날 밤을 채 넘기지 못했다.


엄마는 어느 날부터 김밥 대신 유부초밥을 싸기 시작했다. 시골에 가는 날에도, 내 소풍날에도 유부초밥을 싸줬다. 유부초밥은 슈퍼에서 사온 키트가 시키는 대로 만들면 뚝딱이다. 키트 안에 있는 단촛물과 후리가케를 밥과 섞어 유부에 넣으면 금방이다.


갑자기 시골 가는 날이 평소보다 더 힘들어졌다. 소풍날 재미도 반으로 줄었다. 엄마가 만드는 유부초밥을 중간에 빼먹지도 않았다. 똑같은 엄마가 만드는 음식인데 맛이 없어진 기분이 들었다. 한참 뒤에 엄마한테 이 기분을 전했다. “엄마, 나 소풍 가는 날에는 유부초밥이 먹기 싫어. 김밥이 먹고 싶어.” 어느새 고등학생이 된 딸의 편식이 황당할 법도 하지만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김밥을 싸기 시작했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엄마, 아빠, 남편과 같이 시골에 가기로 한 뒤 엄마한테 예전의 그 김밥이 먹고 싶다고 했다. 엄마는 냉큼 알겠다고 했다. “우리 딸이 먹고 싶다는데 당연히 해줘야지.” 아빠가 아침 일찍 문 연 김밥집을 찾아다니느라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는 뒤늦게 들었다. 그땐 엄마가 싸준 김밥을 더 이상 못 먹게 되는지 몰랐다. 그저 서운한 마음이 조금 들었다. 늘 부족하고 철없는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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