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조미료
내 인생은 엄마가 만들어준 음식으로 채워져 있다. 20년 넘게 엄마와 살며 엄마가 만들어준 음식을 먹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새삼 식구(食口)의 의미를 떠올려 본다.
우리 식구 입맛은 튀는 사람 없이 비슷하다. 맵고 짠 음식을 잘 못 먹고, 나물은 뭐든 곧잘 먹는다. 비린 음식에도 지나치게 예민하지 않다.
몇 달 전부터 엄마와 아빠를 위해 반찬을 배달하고 있는데 내가 만든 요리도 꽤 엄마의 손맛을 닮아있다. 간을 보고 있으면 ‘어? 이거 엄마가 해준 맛인데?’ 싶은 날도 왕왕 있다. 혼자 기특해한다. 내가 먹던 음식을 반찬으로 만들다보니 어렸을 때 엄마가 내준 식탁과 꽤 비슷하게 된다.
엄마가 해준 음식의 포인트는 ‘건강’이었다. 밖에서 외식을 하거나 가끔 엄마 본인이 힘들 때 햄을 구워주는 걸 제외하면 대부분은 영양식으로 채워져 있다. 일찌감치 김치가 식탁 한쪽에 자리 잡고있고 시금치무침이나 콩나물무침 같은 나물이 곁다리로 끼어있다. 메인요리로는 제육볶음이나 고등어구이가 꽤 자주 올라왔다. 거기에 다섯식구 밥그릇과 국그릇이 함께 올려지면 식탁은 금세 풍성해진다.
엄마가 요리를 할 때 옆에 있으면 음식이 완성될 때 즈음 찬장에서 이름도 없는 유리병을 꺼내 톡톡, 뿌리는 걸 자주 볼 수 있다. 시금치무침에도, 우엉조림에도 넣고는 이번엔 또 다른 유리병을 꺼내 제육볶음에 넣는다. 국에는 비슷하게 생긴 다른 유리병의 무언가가 들어간다. 처음에는 미원이나 다시다 같은 MSG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야 엄마가 직접 만든 천연조미료라는 걸 알게 됐다.
엄마는 멸치와 새우는 기본이고 버섯이나 다시마도 분말형태로 만들어 요리에 넣곤 했다. 재료를 말려, 혹은 말린 걸 사서 믹서기에 갈아버리면 끝이니 간단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MSG라는 강력한 라이벌이 있으니 사실 썩 효율이 좋은 방식은 아니다. MSG는 기가 막히게 저렴한 데다 어느 마트에 가도 종류별, 중량별로 전시돼 있으니 편리하다.
그런데도 엄마가 조미료를 직접 만든 이유는 (뻔한 이야기지만) 음식엔 정성이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 가족이 먹는 음식은 제일 좋은 재료를 넣고 싶은 게 엄마들 마음이다. 가루가 될 멸치는 살이 오를 대로 올라 통통했다. 새우는 예쁜 붉은색이다. 재료를 하나씩 갈아서 깨끗하게 씻어둔 유리병에 담아두면 1년은 충분히 먹을 만한 양이 나온다. 그걸로 고기를 볶을 때, 나물을 무칠 때 조금씩 넣으면 감칠맛이 갑자기 쑥, 올라온다. 다시다보다야 심심한 맛이지만, 소금이나 간장을 덜 넣게 되니 그만큼 속에 부담도 없고 밥이 술술 넘어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끼니를 때우는 수준에서 요리를 했는데 최근 음식에 관심이 생기자 나도 천연조미료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다시마가루, 새우가루를 사서 쓰다가 얼마 전 엄마 냉장고를 정리하다가 냉동실 한 구석에 처박혀있는 멸치를 발견하곤 냅다 달라고 했다. 역시 딸은 엄마집 냉장고 털이범이다.
혼자 멸치를 다듬을 자신이 없어 엄마에게 도움을 청했다. 엄마와 나란히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멸치를 다듬으니 시간은 꽤 걸렸지만 힘들지 않은 작업이었다. 멸치 머리와 내장을 떼고 났는데도 양이 적지 않다. 일단 엄마네에서 판을 펼쳤으니 엄마집에 있는 믹서기를 꺼내 갈아본다. 멸치를 다듬는 데 두 시간은 족히 걸린 것 같은데 가는 건 30초면 뚝딱이다. 예쁜 병을 찾아 멸치가루를 담아낸다. 엄마는 집을 나서는 내게 비린 맛이 나지 않으려면 음식 마지막이 아니라 중간쯤에 넣고 함께 끓여주면 된다고 일러둔다.
집 가는 길이 든든하다. 된장국이나 버섯전골에 멸치가루를 반숟갈 정도 넣어주면 맛의 차이가 확 난다. 멸치가루를 놓을 위치를 찾다가 다시마 한 봉지를 발견했다. 재료가 지나치게 많으면 일단 스트레스를 받고 보기 때문에 예전 같았으면 이걸 어떻게 해치울지 안절부절 못했을 텐데 이걸로는 다시마가루를 만들면 될 것 같다. 이 핑계로 이번주에도 엄마네에 들려야겠다.